필자 고진하 목사 시인. 고진하 목사 시인 제공
단비가 내린 후 내가 사는 한옥 마당에도 어린 풀들이 쏙쏙 고개를 내민다. 어린 풀들이 돋는 걸 보니 내 안에도 생기가 솟는다. 그래, 올해도 후회 없는 생을 살아야지. 이런 다짐은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에게나 선물로 주어지는 생은 일회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로 살기 위해 무뎌진 마음을 벼리며 시간의 돛을 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뜻을 세워도 뜻대로 되지는 않는 경우가 많다. 묵은 과거와의 단절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 속에서 켜켜이 쌓인 미움, 원망, 분노, 질긴 미련이 여전히 내 의식 속에 똬리 틀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해야 할까.
다른 방법이 없다. 내가 죽어야 한다. 낡은 관습과 의식에 사로잡힌 내 에고가 죽어야 한다. 그래야 새 삶의 여명이 동트고 시간이 새싹을 틔운다. 내가 좋아하는 몽골의 시인 D. 우리앙카이의 <한 번의 생에 여러 번 죽는다>는 시는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우리의 의식을 일깨우고 있다.
가을에 숲이 누렇게 변할 때마다 나는 죽는다
차가운 한풍이 사납게 울부짖고
어린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쓰러질 때마다 나는 죽는다
잠이 덜 깬 몽골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 어딘가에서 배가 침몰할 때
먼 외딴 초원의 고요를
엽총 소리가 놀라게 할 때 나는 죽는다
한 번의 생에 여러 번 죽는 것은
내게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
고진하 목사 시인과 부인인 권포근 야생초요리가가 사는 원주 불편당. 고진하 목사시인 제공.
그러니까 시인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자연의 벗들이 시련과 역경, 죽임을 당할 때 자기도 죽는다는 것이다. 또한 바다에서 배가 침몰해 누군가 죽을 때 자기도 죽는다는 것이다. 이때 시인이 말하는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육신의 소멸? 아니다. 자기 에고의 죽음을 통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비심의 발현일 게다. 그렇다. 시인은 자기 에고의 죽음을 통해 우주 만물과 공생하는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한 번의 생에 여러 번 죽는 것은 시인의 고백처럼 가장 어려운 일임이 틀림없다.
그런 죽음이 어려운 일일지라도 우리 또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죽지 않으면 삶의 새로운 차원은 열리지 않는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부부가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영위하려면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내 생각이나 뜻을 절대 양보할 수 없으니 당신이 양보하라고만 하면 그 결혼은 파탄에 이를 수밖에 없다. 가정만 아니라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죽음 혹은 희생을 통해 공동체가 살아나고 활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시의 의미심장한 후반부를 다시 읽어보자.
한 번의 생에 여러 번 죽는 것은
내게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어려운 일!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은
한 번의 생에 오직 한 번 죽는 사람들과
날마다 함께 살아가는
너무도 끔찍한 일!
우리가 여러 번 죽는 건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시인은 더 어려운 게 있다고 한다. 한 번의 생에 오직 한 번 죽는 사람들과 날마다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은 끔찍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한 번의 생에 오직 한 번 죽는 그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시인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육신의 소멸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최후의 소멸 말고는 평소 자기 에고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건 끔찍하다고 일갈한다.
“나는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성인이 그럴진대 우리 또한 날마다 죽어야 날마다 사는 거듭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신생의 기쁨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달력의 낱장이 넘어간다고 새 삶의 여명이 동터오지 않는다. 우리 속에 탐욕과 어리석음이 꿈틀거리는 한, 타인에 대한 미움과 원망, 분노가 일렁이는 한, 연두가 싹트는 봄은 오지 않는다. 꽃샘바람이 불어 싸늘한 날씨지만, 우리 안에 깃든 냉기를 몰아내고 온기를 회복할 때 우리는 아름다운 봄의 전령이 될 수 있으리라.
글 고진하/(목사· 시인· 원주 불편당 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