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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은퇴 후 내겐 자연이 최고의 경전이다

등록 2022-12-08 18:48수정 2022-12-08 18:49

필자인 고진하 목사 시인. 고진하 목사 제공
필자인 고진하 목사 시인. 고진하 목사 제공

지난봄에는 박경리 선생의 문학의 숨결이 살아 있는 토지문화관 창작실에서 지냈다. 창작실 아래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글쓰기가 잘 안 풀리거나 심심할 때는 종종 그 연못을 찾아갔다.

연못에는 연잎들이 많이 올라와 있고, 물 위에 수평으로 떠 있던 연잎들이 물을 벗어나 허공으로 쑥쑥 올라오고 있었다, 해질녘이면 자주 가서 물가 바위에 혼자 멍하니 앉아 허공에 뜬 연잎들 흔들리는 걸 보고 오곤 했다. 연잎 위에는 올챙이 적 꼬리가 떨어져 나간 어린 개구리들이 올라와 엎드려 있었다. 먹이를 노리는 동작인지, 쉬는 동작인지는 모르지만, 연잎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어린 개구리를 보고 있으면 온갖 시름을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 와도 밤이 되면 글쓰기가 술술 풀렸다. 중국의 유협이란 사상가가 말했던가. 시를 생성하는 힘은 허심(虛心)과 고요라고. 창작실에 머무는 동안 거의 매일 한두 편씩 시를 썼다. 그렇게 쓴 시들은 대부분 누군가 불러주어 받아쓴 것 같다. <월든>의 작가 데이비드 소로우가 했던 말도 떠오른다. “작가, 글 쓰는 사람은 모두 ‘자연의 서기(書記)’다.” 그렇다면 요즘 나는 글 쓰는 옥수수며 연잎이며 소나무며 새들이며 구름일까.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두해 전 나는 목사직에서 은퇴했다. 이젠 주일이 돌아와도 설교할 일이 없으니 주일도 공일일 뿐. 안식은 덤. 의무적으로 경전을 열어볼 일이 없어진 나는 이제 산전수전(山典水典) 읽으며 새 길을 열어가려 한다. 호기심이 많고 방랑을 좋아하니 더러 옆길로 새기도 하겠지만 그 또한 집으로 가는 길.

요즘 나는 내가 돌아갈 집을 야생에서 발견하곤 한다. 낡은 한옥 처마에 둥지 튼 제비들, 텃밭의 꽃에 날아와 앉는 나비나 꿀벌들, 나뭇잎을 모조리 갉아 먹는 말썽꾸러기 꽃매미 유충들, 호미로 밭을 매다 보면 꿈틀거리는 지렁이나 땅강아지들, 이런 동식물들과 적극적으로 사귀며 소위 야생 수업을 하고 있는 셈. 늦깎이 학생으로 말이다.

이디스 시트웰이라는 시인은 노래했다. “시는 우주의 신비로운 빛들을 발견하여, 우리에게 잊힌 낙원들을 되찾아 준다.” 그동안 휘황한 문명의 수혜를 한껏 누려 왔지만, 이젠 그 안에 갇혀서 살아가면 질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속도와 편리와 효율을 중시하는 첨단문명보다는 야생의 자연에서 ‘우주의 신비로운 빛들’을 발견하곤 한다.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야생의 자연 속에서 사는 일은 무척 힘들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거친 숲이나 계곡을 걷거나 그곳에서 채집을 하여 먹거리를 해결하는 것은 문명의 편리에 길들여진 몸으로는 감당해내기 힘든 게 사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10여년 전부터 잡초나 야생초 따위를 뜯어 요리를 하며 식생활을 영위해 온 경험이 있어 크게 두렵지는 않다. 이런 식생활을 하며 스스로 터득한 것은 우리 몸은 야생을 좋아한다는 것. 우리 몸은, 입부터 항문까지, 여전히 원시 시대의 몸 그대로니까.

야생의 자연은 누가 봐주는 이 없어도 꽃을 피우고 꽃이 지면 푸른 잎을 밀어올린다. 이런 대자연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는 나의 시 쓰기는 한적한 숲에 홀로 꽃을 피우는 야생의 동무들처럼 고독과 무심과 모험, 더러는 보물을 캐고 싶어 욕망의 옆길로 새는 경험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30년 넘도록 썼지만 아직도 시가 뭐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모름, 그 모름의 신비를 껴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겸허한 에너지는 대자연의 야생이 제공해 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하심공경(下心恭敬)의 마음으로 당신, 나의 당신 앞에 바짝 엎드릴 뿐이다.

글 고진하(목사 시인·원주 불편당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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