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여우숲생명학교 교장. 사진 여우숲 제공
가을이 왔다. 혹여 잊고 지냈다면 눈 들어 더 자주 하늘을 볼 일이다. 가을이야말로 하늘을 느긋이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아니던가. 하늘은 홀로 있지 않고 땅으로 닿아있으니 우리의 시선도 자연스레 땅을 더듬게 된다. 이즈음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 빚어내는 천지의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신비롭다. 하늘의 배경은 그윽하게 파랗고 이따금 떠 있는 구름은 느리고도 성글다. 이 시절의 일출과 일몰 풍경은 다른 어느 때보다 장엄하고 노을빛은 숙연하다. 노을을 향해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겸손해진다. 먼 산은 대체로 불그스레 물들고, 그리 멀지 않은 숲은 확연해지는 색의 대비를 통해 또 다른 신비를 드러낸다. 마치 브로콜리가 산으로 옮겨간 듯 몽글몽글한 모습으로 녹색의 배경에 묻혀 한 덩어리였던 나무들이 제각각 모양을 드러낸다. 땅에는 낙엽이 뒹굴기 시작하고, 땅에 붙박은 채 헐거워져 가는 나무들과 사위어가는 풀들은 고단했던 한 해에 제 삶이 이룬 흔적이거나 증거처럼 열매들을 붙들고 있다. 철새들은 대부분 회귀했고 이제 텃새들이 분주할 시간이다. 하늘과 땅이 만나 빚어내는 리듬 위에서 생명 저마다는 때에 맞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마치 지치지 않는 춤을 추듯이.
숲의 말을 듣는 법을 전해주겠다면서 하늘과 땅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숲을 이루는 생명을 더 온전히 이해하려면 하늘과 땅이 그려내는 무늬를 함께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 풀과 나무도 아무 곳에서나, 또 아무렇게나 태어나고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는 하늘과 땅이 빚어내는 무늬 속에서 반드시 제게 알맞은 땅을 찾아 태어나고 자라게 되어 있다. 생명은 모두 그러한, 자신만의 여건 속에서 제 삶의 무늬를 그려간다. 옛날에는 하늘이 그리는 무늬를 천문(天文), 땅이 그리는 무늬를 지문(地文)이라 불렀다. 한편 무늬의 개념으로 인문학에 접근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인문(人文)을 ‘사람이 그리는 무늬’라고 파악한다.
단순한 예로, 남과 북을 가르며 동과 서로 뻗어있는 산 모양을 상상해 보자. 능선의 북쪽 땅은 하늘과의 관계가 그 반대쪽인 남쪽 땅과는 확연히 다르다. 일조량이 상대적으로 적고 온도도 더 낮은 편이다. 양쪽의 여건에 모두 적응한 종(種)이야 남북을 가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만, 제 삶에서 빛의 양이 절실하도록 태어나는 생명은 주로 남사면의 땅에서만 태어나고 살아간다. 한편 능선부와 계곡부의 땅은 또 다른 무늬를 그려낸다. 능선부는 빛이 풍부한 편이지만 계곡부는 상대적으로 일조량이 적다. 대신 아래로 흘러 퇴적된 유기물이 많아 상대적으로 비옥하고 수분도 넉넉하다. 반대로 능선부는 더 척박하고 습도 조건 역시 각박하다. 따라서 물이 중요한 버드나무는 계곡부에서, 빛이 절실한 소나무는 주로 능선부에서 만날 수 있다.
생명은 그렇다. 홀로이되 홀로일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생명이다. 그 어떠한 생명도 제 홀로 삶의 무늬를 그려갈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따라서 숲 생명을 온전히 만나고 그들을 헤아림으로써 삶의 신비를 만나고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낱생명’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온생명’의 스케일로 확장해야 한다. ‘낱생명’과 ‘온생명’이라는 말은 장회익 선생에게서 따왔다. (장회익, 삶과 온생명(현암사, 2014))
하지만 근대 이후 우리가 숲을 바라보는 시선은 지나치게 단순해졌다. 오늘날 일반인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관점으로 숲을 본다. (당신은 주로 어떤 눈으로 숲을 바라보는 편인지 생각해 보기 바란다.) 첫째, “얘는 이름이 뭐지?” 둘째, “얘는 나물로 먹나?” 셋째, “먹으면 어디에 좋나?” “혹은 어디에 유용하고 이로울까?” 넷째, “그럼 떼로 재배하면 돈 좀 되려나?” 다섯째, 그나마 내가 다행스러운 시선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와- 예쁘다!”가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대유행에 가까운 시선이 되어가고 있는 “숲에는 피톤치드가 많아서 좋아. 오늘도 숲에서 힐링했어” 정도이다. 이는 모두 인간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선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숲을 바라보는 시선이 여기에만 그친다면 매우 아쉽다. 왜냐하면 숲을 만나 삶을 사랑할 용기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시선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랬던 사람이다. 유년 시절부터 불혹의 나이가 되기까지 주변에 널린 게 풀이고 나무고 생명이었지만 내게는 그들과 깊은 연결감이 한 가닥도 없었다. 유소년 시절에는 도끼나 낫자루, 혹은 땔감이나 싸리 빗자루를 만들 소재들이 있는 곳이 산이요 숲이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가끔 미술 수업 시간에 풍경화를 그릴 대상지가 그것이었고, 더러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싸리버섯이나 송이버섯, 솔버섯을 따러 올랐던 공간이 그곳이었다. 언젠가는 어린 소나무를 집 마당에 옮겨심고 싶어서 산에서 몰래 캐다가 심었다가 홀딱 죽게 만든 기억이 남아 있는 공간이 숲이었다.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던 시절에는 주말에 북한산이며 도봉산, 수락산, 관악산 등을 오르내리며 뻗친 스트레스를 만지작대던 공간이 서울 근교의 숲이었다.
숲에 사는 모든 생명이 저마다의 무늬를 그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되는 사건은 소박한 계기로 일어났다. 나는 어느 날 등산 중에 수락산 정상 부위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바위를 뚫고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은 늘 있었던 풍경이 그날 느닷없이 내게로 걸어와 말을 건, 한없이 소박한, 하지만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었다. 가난과 무지로 가득 찬 산골 마을에서 태어난 삶 때문에 욕망하는 것을 다 추구해볼 수 없었던 나는 내 삶이 은근히 억울했었다. 그런데 그날 소나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 좀 봐! 나는 흙도 없고 물도 제대로 없는 여기서 이렇게 살아. 바위를 뚫고 살아. 해마다 꽃 피우고 열매 맺으면서 마음껏 햇살을 누리면서 말이야!”
그것이 시작이었다. 나는 저 불가능할 듯한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숲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홀로 숲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고 몇 년 뒤에는 스승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생명에게 직접 묻기 시작했다. 맑은 침묵과 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을 품고 묻기 시작했다. 내가 숲의 말을 다른 이들보다 더 깊고 넓게 들을 수 있게 된 데는 앞의 방법들이 다 유용했지만, 주로 저 마지막 공부 방법에서 비롯한다. 즉 맑은 침묵과 연민 속에서 생명에게 직접 물어보는 시간 말이다.
‘너는 왜 저기가 아닌 여기에 있느냐? 너는 왜 봄날의 따사로움을 저버리고 서리를 맞으며 피어나느냐? 눈 속에서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꽃을 피우는 네 삶에는 도대체 어떤 사정이 있는 것이냐? 너는 왜 한 쪽 방향으로만 꽃을 피우느냐? 너는 왜 속을 비운 줄기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느냐? 너는 왜 그렇게 높게 높게 자라 숲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만 하느냐? 반대로 너는 왜 그렇게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땅을 이불 삼은 빈대처럼 붙어사느냐? 어떤 이들은 드문드문 떨어져 살며 피고 지는데, 너희는 왜 꼭 떼로 살며 함께 피고 함께 지느냐? 네 잎은 무엇을 위해 주름을 만들었느냐? 너는 왜 침엽수이면서도 다른 녀석들과 달리 홀라당 잎을 지우고 겨울을 나느냐? 너는 어쩌다가 날카로운 가시로 온몸을 둘렀고 또 너는 무슨 사연으로 한 장의 잎으로도 나를 독살할 수 있게 되었느냐? 너는 왜 누워서 살고, 너의 이파리는 다른 녀석들과 달리 그토록 짧은 것이냐? 네 잎이 그토록 넓고 큰 이유는 무엇이냐? 다른 나무들과 달리 네 줄기는 왜 초록색이냐? 너는 왜 다른 소나무들과 달리 더 거칠고 두껍고, 붉은빛이 아닌 은빛 눈을 달고 있는 것이냐? 네 꽃은 무엇 때문에 그리 오랜 시간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는 것이냐? 네 꽃이 혹은 열매가 그토록 붉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너의 꽃은 왜 하늘이 아닌 땅을 바라보며 피는 것이냐? 너는 왜 잎도 없이 꽃 먼저 피우고 잎을 틔우는 것이냐? 잘려도 뜯겨도 꺾여도 자꾸자꾸 다시 솟구쳐오르는 그 눈물겨운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나는 저마다 각자 다른 꼴로 사는 생명들에게 그 꼴을 이루게 된 배경과 사연에 대해 끝없이 물었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을 묻기 시작했다. ‘땅에 붙박아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에서 천지 사방 너와 너의 하늘을 넘보는 다른 생명과는 어떻게 그토록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것이냐?’ 그러다가 더 깊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조급해하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느릿느릿 걸으며 가만가만 물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 살아 무엇 하겠다는 것이냐? 너와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이냐?’ 대답은 순서 없고 예고 없이 돌아왔다. 어떤 날 어떤 존재는 물음 즉시 답했고, 다른 날 어떤 존재는 여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하늘이 지은 글자 없는 책인 숲의 말을 하나씩 하나씩 알아듣게 되면서부터 나의 삶은 바뀌었다. 우선 살다가 누군가로부터 입은, 혹은 내가 준 어떤 상처가 여태 아물지 않아서 마치 메꿔지지 않은 웅덩이처럼 남아 있었던 것들이 아무런 판단 없이 보이기 시작했다. 만날 것들이 만났고, 부딪힐 것들이 부딪혔던 자리였음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드디어 미움과 자기학대를 거두고 내 손으로 삽을 들어 틈만 나면 나를 그 자리로 끄집어 가두었던 지난날의 웅덩이를 메울 수 있었다. 또한 삶의 풍요와 자유가 목표의 성취에 있는 게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에 놓여있는 것임을 알아채게 되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올 것을 오게 하고 갈 것을 가게 할 힘이 생겼다. 더 너른 지평 위에서 책임 있는 참여자이자 때로 관찰자로 내 삶을 대하게 되었다. 나는 마침내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
요컨대 삶을 사랑하게 하는 숲을 만나기 위해서 제시하는 숲의 말을 듣는 법은 맑은 침묵 속에서 연민의 마음으로 생명에게 물으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날 문득 그 대답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근대 이후를 지탱하고 있는 도구적 이성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 방법론은 낯설고 심지어 허황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우선 시인 정현종의 시 <방문객>(정현종, 섬(문학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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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 그의 과거와 / 현재와 / 그리고 /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부서지기 쉬운 /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 마음이 오는 것이다 - 그 갈피를 /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 마음, /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인은 말한다. 우리 앞에 누가 방문객으로 당도하거든 그를 환대해야 한다고. 왜냐하면 그의 온 생이 걸어 내게로 온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그가 내게 유익할 인간인지, 무익할, 혹은 해로울 인간인지를 분별하는 오늘날의 일반적인 관계 방식과 시선을 거두라고 요청한다. 왜냐하면 내가 마주하고 있는 그의 단면 너머에는 어마어마한 배경과 사연이 담겨 있고, 그것이 함께 걸어와 나와 마주하는 것이니까. 그의 과거와 현재와 심지어 미래까지 품고 내 앞에 선 것이니까. 시인은 우리는 모르지만 아마 바람은 알 것이라 말한다. 부서지기 쉬운 인간으로서 그가 어디쯤에서 넘어졌고 어디쯤에서 깊은 웅덩이를 파게 되었는지를. 하늘과 땅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바람만은 그의 일생과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환대의 방법으로 시인은 우리가 그 바람을 흉내 내 볼 것을 제안한다.
숲의 말을 듣는 법 역시 마찬가지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품고 있는 삶의 서사를 함께 읽어야 한다. 그 존재가 품고 있는 절박함을 가늠하고,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며 마주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지극히 이분법적인 사고와 인식체계에 익숙해졌다. 우월하거나 열등하거나, 유리한 것이거나 불리한 것이거나, 선이거나 악이거나, 유익하거나 해롭거나, 쓸모가 있거나 쓸모없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내 편이거나 적이거나, 성공이거나 아니면 실패인 것으로… 그렇게 사물과 인간과 생명을 압축하여 대하는 시선이 만연했다. 앞에서 요약한 숲을 바라보는 대개의 시선 역시 저 이분법적 시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단면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는 습관적 시선을 거둘 때, 그때서야 비로소 숲의 그윽한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읽고 들어볼 숲의 말은 하늘과 땅의 무늬 안에서 생명이 살아가고 있음을 파악할 때, 더욱 온전히 들릴 것이다. 또한 천지가 만나 빚어내고 있는 리듬 위에서 생명이 자신의 리듬을 가다듬으며 화답하는 것이 생명의 삶이라는 관점을 유지할 것이다. 그것은 생물학·생리학·생태학 같은 근대적 이성이 획득한 지적 체계를 존중한다. 그러면서도 온 생명을 관통하면서 지배하고 있는 우주적 법칙을 함께 살피는 동아시아적 사유와의 연결 위에서 전개될 것이다. 숲이 우리에게 전하는 깊이 있는 말은 ‘저 풀이 아무것 아니라면 나 역시 아무것 아님’을 각성할 때 들려올 것이다. 인간을 정점에 두고 나머지를 피라미드의 하위에 둔 아리스토텔레스적 위계를 허물고 우리 모두 대등한 존재임을 자각할 때 찾아올 소식일 것이다.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