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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사람 아직 살아있네 살아있어

등록 2023-12-25 10:02수정 2023-12-25 10:16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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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이제 연재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이 글을 포함해 남은 서너 편의 글은 그간의 내용을 종합하면서 결론에 대신하는 내용을 담아보려 한다. 숲에서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를 종합하기 위해 우선 연재한 내용 전체를 간략히 돌아본다.

당신을 숲으로 초대한 뒤, 나는 가장 먼저 숲을 바라볼 새로운 눈을 제안했다. 근대 이성의 영향을 받아 숲을 그저 자원 수준으로 대상화하게 된 오늘날의 익숙한 시선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우리 자신과 다르지 않은 존재로 생명을 바라보는 시도를 하자고 제안했다. 숲을 인간 공동체와 다르지 않은 생명 공동체로 바라보자고 요청했다. 그러기 시작하면 ‘하늘이 지은 글자 없는 책’(無字天書)인 숲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열 수 있다고 했다. 천지자연과 생명들이 펼치는 원형리정(元亨利貞), 생장수장(生長收藏),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질서와 리듬을 읽기 시작하면 우리 삶의 근본 원리와 중요한 지점들을 파악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를 통해 태어나서 죽기까지 우리가 겪게 되는 삶의 문제에 관한 깊고 아늑한 지혜를 얻어보자고 했다.

다음으론 우리 고유의 우주론과 생명론을 빌려 만물을 지배하는 준엄한 법칙 하나를 이해했다. 만물이 태극의 질서 아래 놓여 있고, 따라서 생명의 삶 역시 대극적 모순이 서로를 떠받치고 또 교대하고 순환하면서 그 실체를 이루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존재들과 생명성의 특징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아울러 우리는 씨앗 또는 알로 응축된 원기 안에 이미 그 생명이 자기 삶을 헤쳐갈 힘이 프로그램으로 접혀 있는 씨앗의 신비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 씨앗(알)은 아무데서나 태어나지 않고, 모두 태어날 자리에서만 태어나는 오묘한 질서 속에 있음도 알게 되었다. 과학 언어로는 그것이 바로 서식지의 로고스요, 생태학(oikos+logos→ecology)의 가장 기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부분임도 지적했다.

태극이 빚는 태과불급(太過不及)의 이치와 역동에 따라 각각의 서식지에는 그 생명에게 유리하고 도움이 되는 환경 요소(生의 요소)도 있지만, 반대로 그 생명에게 불리하고 오히려 제약되는 요소(剋의 요소)도 함께 작용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리하여 생명은 저마다 한편으론 선물을, 다른 한편으론 극복해야 할 삶의 숙제를 안고 태어난 셈이라고 설명했다. 본론에 해당하는 여러 편의 글에서는 다양한 서식지에 사는 생명이 어떤 숙제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는지를 밀도를 높여 살펴보았다. 태어나 살아가는 서식지에 따라 빛이, 혹은 양분이, 물이, 바람이, 또는 인간과 동물의 간섭 등 다양한 문제가 그곳에 사는 생명이 어떻게든 극복해야 할 주된 숙제가 된다는 점을 알았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삶이란 생명 각자에게 부과된 숙제를 넘어 저마다 자신의 꽃을 피우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나의 관점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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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이 삶에 건네는 소중한 가르침들

아주 먼 옛날 생명은 모두 하나의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기나긴 세월 동안 각기 고유하고 독특한 생명의 무늬를 그리며 현재에 이르렀다. 예컨대 새는 파충류로부터 도약을 이뤄내며 공중을 날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종은 호로록 호로록 날며 항상 가까운 터전에 머무는 텃새의 무늬를 새겨온 반면, 어느 종들은 장대한 날갯짓으로 철마다 대륙과 해양을 종·횡단하며 사는 무늬를 그려왔다. 마찬가지 인간 역시 기나긴 여정을 거치며 인간 고유의 무늬를 새겨왔다. 흔히 인간이 새겨온 인간 고유의 무늬, 그것을 인문(人文)이라 부른다. 다른 생명과는 차별되는 우리 인간만의 무늬, 그 정수를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그건 아마도 ‘사람다움’일 것이다. 이 ‘사람다움’을 통해 인간은 진정 다른 생명과 구분된다. 따라서 인문학은 결국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길을 탐험하고 제시하는 위치에 있는 학문이다.

숲으로부터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배울 수 있을까? 그간 식물로부터 빌릴 수 있는 다양한 생존 전략과 기술에 대한 논의는 흔히 있었다. 하지만 숲을 이루는 생명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게 그 신비하고 탁월한 생존의 전략과 기술만일까? 아니다. 새로운 눈을 열고 몇 걸음 더 들어가기만 하면 더 심원한 부분과 만날 수도 있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노자가 남긴 저 유의미한 깨침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자. 이제 심안(心眼)을 통해 숲이 우리에게 넌지시 알려주는 사람다운 삶의 길에 대한 지혜를 갈무리해보자.

태어나서 죽기까지, 그리고 개별적 존재에서 공동체까지, 인간 삶이 마주하는 거의 모든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 거의 모든 대답을 담고 있는 책이 숲이다. 그래서 하자고 하면 아주 긴 이야기가 될 터지만, 이 시대 사람답게 사는 데 큰 의미가 있을 지혜를 중심으로 허용된 지면을 생각하며 아래와 같이 세 분야로 그 지혜들을 묶어본다.

1. 온전한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2. 소중한 것들과 함께
3. 사랑하며 또 사랑하며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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닦달하며 사는 현대인

우리가 온전한 삶을 사는 걸 방해하는 주범 중의 주범은 양분돼 가는 세계와 이분법적 사고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삶이 선명하게 양분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삶을 성패로, 우열로, 선악과 미추 등으로 양분해 놓고 어떻게든 찬란한 쪽을 차지하려 한다. 그것이 좋은 삶이라 믿고 그러기 위해 기를 쓰며 산다. 공부는 성적으로 증명해야 하고, 일자리는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이 최고고, 경기는 무조건 이겨야 하고, 시도한 사업은 꼭 성공해야 하고, 투자했다면 손실 없이 벌어야 하고, 자식이 원하면 다 해줄 수 있는 부모가 되어야 하고, 사랑은 달콤해야 하고, 서로가 완전히 이해받는 연인이어야 하고, 양심과 내용이야 어떻든 소송에서는 패소하지 않는 변호사여야 하고 등등. 그들은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더 완전하고 완벽하기를 원한다. 완벽에의 추구, 이는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존재들에게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세계가 심화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사람들이 그 세계를 당연하다고 여기며 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결과 현대인은 수시로 스스로 닦달하며 살기 시작했다. 닦달하며 살아서 좋은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도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물질적·외양적·도덕적 우월감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삶 전체는 갈수록 메마르고 성정은 점점 더 성마르지 않은가? 오히려 자꾸만 본래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고, 삶의 밑바탕에 불안과 두려움을 깔고 살지 않는가? 심하면 타인과 자신을 미워하고 타인에 대한 원망이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 자책 등으로 괴로워하며 살지 않는가? 정작 좋은 삶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데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며 사는 경우가 점점 허다해지고 있다. 오로지 세상의 기준을 추종하면서 사람다운 삶의 길로부터 멀어지고 자신의 고유성을 팽개치면서까지 세상이라는 상자에 자신을 우그려 넣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추구하게 되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잊고, 삶을 과정이 아닌 결과 중심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넘쳐나고 있다. 급기야 그들은 인류의 소중한 가치이자 기쁨인 부끄러움과 양심, 연민과 연대, 절제와 존중과 사랑, 신비와 의례, 시와 노래 등에 무관심하거나 그것을 그저 삶의 장식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감탄이 일상에서 사라졌다. 감탄할 대상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감탄할 수 있는 자기 안의 센서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근원적으로 우리 안에서 때마다 펼쳐지기를 열망하고 있는 생명성마저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 당신도 경험했겠지만 온전한 삶을 사는 이들에겐 그냥 딱 봐도 생명성이 느껴진다. ‘아 저 사람 살아있구나!’ 아직 학업의 압력을 받지 않는 나이의 아이들을 보면 더더욱 분명하게 생명성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그 살아있음의 기쁨을 느낀 최근이 언제였나? 가물가물하다면 다시 짚어보자. 생명성의 핵심이 무엇인가? 근본은 새로워지는 것이다. 새로워지고 싶어 모험하는 것이요, 그래서 때로 아픈 것이며 더러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근본적으로는 따뜻함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생명성의 핵심 아니던가!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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