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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기쁘게 하는 인생공부법이 여기 있다

등록 2022-12-28 16:10수정 2022-12-28 16:16

공부의 네 가지 채널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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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공부

대한민국은 공부의 나라다. 대다수 사람은 어려서부터 젊은 시절까지 지독하게 공부로 내몰린다. 각급 학교의 본래 설립 취지는 아닐지 모르지만, 학생들의 공부는 대부분 생존을 위한 기술, 또는 그 열쇠를 획득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한때 그나마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교육기관이라던 말이 있었으나, 그 뜻은 매가리를 잃었다. ‘진리의 상아탑’은 시대에 풍화되어 먼지처럼 흩날리더니 이제는 그 형체조차 아득하다. 아니다. 이 시대는 오히려 대학이 더 치열하고 노골적인 취업 기관 수준으로 전락한 것이 현실이다.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는 이 나라의 독특한 학원 지형을 보면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각급의 교육기관 곁에는 아주 촘촘하게 학원이 포진해 있다. 초등학생에게 줄넘기를 가르치는 학원으로부터, 대학생들에게 취업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학원에 이르기까지. 어린이와 젊은이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학원에서 또 공부해야 한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외국의 기관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공부에 생을 거는 세태다.

어리고 젊은, 그 푸른 시절의 시간과 열정과 비용, 그리고 어떤 다른 기회가 그렇게나 집중적으로 오직 각종 시험공부에 투입되고 있다. 하지만 가슴 아프게도 그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낸 개인들의 삶이 예전, 그렇지 않았던 시절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하면 삶도 그만큼 좋아져야 할 텐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그토록 열심히 공부해서 자기 형편에 맞는 소위 좋은 직장 -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아니면 힘을 가질 수 있는, 혹은 안정적인 직장 - 을 얻은 뒤에는 자신과 세상을 사랑할 힘이 더욱 커지고, 그의 일상이 매우 평화롭고 기쁨 넘치는 삶으로 채워져야 당연하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이를 제대로 만나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삶은 여전히 채워야 할 것들의 목록을 인생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얻기 위해 날마다 분투하는 날들이라고, 또한 어딘지 모를 불안, 혹은 우울감과 동행하고 있는 편이라는 사람들의 소식을 더 자주 듣고 있다. 자신의 소중한 젊은 날들을 갈아 바친 공부와 그것이 이룬 성취가 그의 삶을 구하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라니! 공부가 삶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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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그 방향의 문제

공부가 삶을 구하지 못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먼저 짚고 싶은 점은 공부의 방향, 혹은 위치에 관한 문제다. 오늘날의 공부는 삶의 진실한 방향에 대해, 그리고 우선순위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한 상황에서 떠밀리듯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방향은 늘 ‘나, 여기(a)’를 필요로 한다. 방향을 잡으려면 먼저 내 위치(내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가 좌표로 잡혀야 한다. 다음으로는 ‘도달하려는 지점(b, c, d…)’이 있어야 한다. 공부를 통해 그가 도달하려는 지점이 ‘b’라면 그는 ‘a’로부터 ‘b’에 이르는 가상의 선을 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을 염두에 두고 ‘a’에서 ‘b’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을 펼칠 것이다. 이때 ‘b’가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이면 그는 거기에 필요한 ‘공부’를 열심히 해나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가 ‘삶을 사랑하며 기쁘게 살기’라는 ‘c’를 도달 지점으로 설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의 방향은 ‘a’로부터 ‘c’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는 사랑을 비중 있게 공부할 것이다. 또한 그의 공부에는 반드시 자신에 관한 연구(a)가 포함될 것이다. 기쁨을 누리며 살기 위해 그는 기어코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노력할 것이다.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으로 잠시 즐거울 수는 있다. 그러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는 더 근원적인 감정인 기쁨을 얻을 수가 없다. 버드나무는 버드나무로 살아 기쁘지, 소나무 흉내를 내며 사는 것으로 기쁠 수 없다. 찔레는 찔레로 피지, 장미 흉내를 내지 않는 이치와 같다. 식물 저마다가 피우고 있는 모든 꽃은 제 본성의 발현이다. (이 부분은 이을 다른 주제의 글에서 자세히 다룬다) 우리는 그 본성이 아름답게 발현되는 것을 목격할 때 감탄하고 감동한다. 우리가 아름다운 예술 작품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도 그렇고, 진심을 다해 자신의 세계를 이룬, 혹은 이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감동하는 이유가 다 그러하다.

참고로 나는 ‘즐거움’과 ‘기쁨’을 구분하여 사용한다. 내가 들여다본 바로는 즐거움은 우리 마음의 표층에서 일어서는 감정이다. 하지만 기쁨은 마음의 근원에서 발원하는 감정이다. 예컨대 십 년 동안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누군가를 만났을 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더 적절한 말은 무엇일까? 답해보시라. 그를 만나 ①‘즐겁다’ ②‘기쁘다’. 그렇다. 기쁨은 자신의 가장 깊숙한 자리에서 솟구쳐 오르는 근원적 감정이다. 그것은 소비나 게임, 드라마, 수다, 알코올이나 약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즐거움, 혹은 감각적 쾌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감정이다. 기쁨은 자신의 근원으로부터 솟구쳐오르는 환희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볼 때 기쁘다. 듣고자 하는 이들에게 숲의 인문학을 강의할 때도 나는 매우 기쁘다. 보도블록의 틈새에서 보행자들의 발걸음을 이겨내고 피어난 ‘땅빈대’의 꽃을 만날 때에도 나는 감동한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노을과 밤하늘의 별을 우러를 때도 기쁘고,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표정과 웃음을 마주할 때도 기쁘다. 계곡의 맑은 물소리나 아름다운 새소리, 펑펑 내리는 함박눈과 그 풍경들을 볼 때도 기쁘다. 그 모든 풍경과 어울려 느리게 걸을 때도 나는 한없이 기쁘다.

공부가 먼저 삶의 진실한 방향을 겨냥해야 하는 이유가 이러하다. 생각해 보면 공부는 기쁘게 살기 위한 수단이 아니던가. 이 몸으로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인생에서 수단을 위해 목적을 소홀히 하는 삶을 살다가 떠난다면 그 생은 얼마나 애틋한가. 목적과 수단을 뒤바꿔 사는 것보다 불행한 삶이 없다. 요컨대 공부는 기쁨이라는 목적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것이지 그 반대여서는 안 된다.

김용규 괴산여우숲인문학교장. 여우숲 제공
김용규 괴산여우숲인문학교장. 여우숲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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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지혜, 실종된 지혜의 회복을 위하여

다음으로 짚고 싶은 것은, 이 시대의 공부가 주로 지식만을 향하고 지혜로는 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공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지식만이 아니다. 더 깊숙한 지점에 지혜도 기다리고 있다. 어찌 보면 지식만 갖추게 하는 공부는 반쪽도 되지 않는 공부다. 생각해 보라. 법 조항이 모자라 세상이 이토록 어지러운 것일까! 우리 삶이 끝없이 온갖 것들과 부딪는 것이 지식이 모자라서일까! 많은 사람이 끝도 없는 결핍감에 시달리는 까닭이 정말 돈이 모자라서일까! 우리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자꾸 사랑에 발 걸려 넘어지는 이유가 사랑에 아픔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내 사랑에는 아픔이 없기를 바라서일까! 오늘날에는 온갖 것에 대한 지식이 차고도 넘치게 존재한다. 문제는 오히려 지혜의 부족이다. 따라서 지혜의 획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공부야말로 삶을 구할 수 있는 진짜 공부다.

지식과 지혜의 특성에 관해 아래 표와 같이 요약해 보았다.

지식을 통해 우리는 기껏해야 도구적 이성을 획득할 뿐이다(도구적 이성의 폐해에 대해서는 막스 호로크하이머, <도구적 이성 비판>(박구용 옮김, 문예출판사)을 보시라). 하지만 지혜는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한다. 지식은 온갖 것을 구분, 분별하고 그 인과를 파악하는 데 주력한다. 문명이 이룬 눈부신 업적은 바로 이 특성과 주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편 지혜는 이치를 터득하고 깨달아 그 이치와 합일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지식은 주로 표층, 조금 더 나아가 중층을 더듬게 된다. 반면 지혜는 심층과 근원에 닿고자 한다. 결국 지식은 (부분을) 아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면, 지혜는 (전체를) 깨닫는 것을 그 핵심으로 한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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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네 가지 채널과 지혜

공부와 관련해 우리가 좀처럼 생각하지 않는 게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공부에도 여러 채널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익숙한 채널은 ‘머리’(사고)다. 지독한 책벌레들이 내 주변에도 있다. 그들은 숲을, 책을 통해 샅샅이 알고자 한다. 그들은 분류학과 도감에 의존하여 식물이나 동물의 이름을 줄줄 외고 기억해낸다. 그렇다고 해서 그이가 생명을 잘 느끼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잘 느끼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 ‘가슴’(감정, 생태적 감수성 등)이라는 공부의 또 다른 채널이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로 ‘머리’ 중심으로 숲과 생명을 파악하는 데 주력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그렇다.

공부의 세 번째 채널이 있다. 그것은 ‘삶, 실천’이라는 채널이다. 작고하신 나의 어머니가 대표적인 사례다. 어머니는 일생을 무학(無學)에, 문맹(文盲)의 상태로 사셨다. 하지만 당신은 삶에 대한 지혜로 가득하셨다. 관련하여 여기 아득한 날의 기억이 한 자락 있다.

농·산촌의 인구가 도시로 빨려 들어가기 전인 내 유년 시절에는 산골 마을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다. 대다수가 가난하여 의식주와 관련한 모든 게 귀했던 시절이다. 이따금 거지들이 떼를 이뤄 마을을 방문하고 떠돌며 동냥했던 기억도 있고, ‘상이용사’라 불리는 사람들이 빨랫비누 같은 생활 물품을 팔자고 떼를 이뤄 마을로 찾아왔던 기억도 있다. 어린 나에게는 두 패거리 모두가 무서웠다. 특히 ‘상이용사’들은 팔 하나가 없거나 다리가 절단된 몸으로 마을을 돌았는데 어린 내게는 그 모습이 낯설다 못해 무서웠다. 서로가 가난하던 시절에 무엇을 마음 놓고 살 형편이었겠는가. 담은 없고 낮은 울타리만 겨우 있던 시절에 마을 사람들은 바깥의 아우성에 쉽게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 안을 틀어쥐고 밖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밖의 아우성은 갈수록 커지고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박을 타 만든 바가지에 보리쌀을 가득 담아 내게 건네주시며 가져다주라고 하셨다. 우리도 가난하여 양말도 없이 겨울을 나고 기운 옷을 입고 살던 형편인데, 어머니는 왜 그러실까. 무섭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해서 안 가겠노라 투정하면 어머니가 그러셨다. ‘절박해서 그런 것이다. 저 사람들이 절박해서, 살 방도가 저것밖에는 없어서 그런 것이다. 난리 통에 우리는 운이 좋아 멀쩡한 것이고, 저들은 운이 나빠 저런 것 뿐이여.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것이라 했다. 서로 돕고 살아야 사람이지! 냉큼 갖다 드리고 와!’

어머니는 책 한 줄 읽으신 적 없지만,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위의 사례 외에도 내게 아주 다양한 경우를 통해 가르쳐 주셨다. 그 지혜는 삶을 살아내시면서 터득된 것들이었다. 어머니는 또한 연민의 마음이 가득하신 분이었다.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세상을 살아내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교하여 생각하면 이 시대의 머리 중심적 공부는 얼마나 차갑고 쌀쌀맞은가!

공부에는 하나의 채널이 더 있다.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라. 그것은 문자나 말로 성립하지 않는 채널이다. 나는 이것을 ‘영적 채널’이라 부른다. 한없이 마음이 고요할 때, 묵상하거나 기도할 때, 모든 순간에 깨어있는 상태로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들려오는 깨침의 소리를 만날 수 있는 채널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으로부터 일순간도 분리되지 않고, 지금으로부터 잠시도 멀어지지 않을 때, 마치 어떤 음성을 듣는 것처럼 무엇인가 깊게 알아채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작동하는 채널이 바로 이 채널이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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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용할 공부의 채널

이제 정리해 보자. 삶을 사랑하게 하는 숲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열어야 할 공부의 채널은 무엇일까? 그것은 머리로부터 가슴, 실천적인 삶, 그리고 영적 채널 모두이다.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주로 머리(사고, 이성)의 채널을 열면 된다. 하지만 숲을 거닐고 더듬으며 나와 나 아닌 생명을 연결하고 조금씩 사랑할 힘을 회복함으로써 기쁨으로 차오를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나 자신과 다른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 마음을 기꺼이 실천하면서 자주 고요 속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

공부의 채널, 그 목적 등과 관련하여 이렇게 관점을 정리해 두는 까닭은 삶을 사랑하게 하는 숲을 본격적으로 만나기에 앞서 꼭 짚어두어야 할 숲 공부 방법론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글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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