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현동 아현초등학교에서 열린 가을운동회도중 학생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다. 사진 이정용 선임기자
천지자연의 문채를 그려낸 훈민정음 초성 이야기
▪ 우리 생활 속 오행의 흔적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만국기가 펄럭이는 운동장에서 희고 푸른 운동모자를 뒤집어쓰고는 목이 터져라 응원하던 어린 시절의 운동회를 추억한다. 왜 그런지 굳이 생각할 일도 없이 운동회는 늘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청백전을 벌이는 것이 당연했다. 청과 백이 오행에 따라 동쪽과 서쪽을 상징하는 색깔임을 알게 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이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에도 생활 속 오행의 관념을 적잖게 발견할 수 있다. 정월 대보름에 먹는 오곡밥, 다섯 가지 맛이 난다는 오미자(五味子) 차, 동・서・남・북・중앙의 다섯 방위를 색으로 표현한 오방색(五方色), 궁궐과 사찰 그리고 향교의 단청(丹靑) 등이 우선 떠오른다. 색동저고리, 비빔밥, 구절판의 화려한 빛깔도 오방색의 연장선에 있겠다. 무엇보다 수도 서울 다섯 방위에 흥인지문(興仁之門), 돈의문(敦義門), 숭례문(崇禮門), 홍지문(弘智門)을 세우고 그 중심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목을 널리 드러내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오행 관념이 한국 문화와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해 왔음은 물론이다. 우리가 잘 아는 고구려 고분의 사신도(四神圖)는 가운데 무덤의 주인을 안치하고 네 방위의 수호신을 그려 넣었는데, 특히 북쪽의 현무(玄武)는 신랑 뱀과 거북 각시가 뒤엉켜 음양의 화합을 나타내고 있다. 그보다 앞선 사례로 <삼국사기>에 보면 1세기 무렵 고구려 제2대 유리왕 시절에 북방의 색을 띤 검은 개구리와 남방의 색인 붉은 개구리가 싸우다 검은 개구리가 몰살당하자, 이를 두고 대치관계에 있던 부여(夫餘)의 패망을 점쳤다는 정치외교적 기싸움의 냄새가 물씬 나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백제의 경우는 아예 중국의 기록(<周書>)에 백제인들이 ‘음양오행을 잘 알았다’고 쓰여 있고, 신라 역시 <삼국사기>에 여러 기록들이 있으며, 또 ‘단청’이야기도 눈에 띈다. 솔거가 그린 소나무 벽화에 종종 새들이 날아들었는데, 후에 색이 바래 단청으로 보수하자 다시는 새들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삼국의 행정조직으로 고구려의 오부제(五部制), 백제의 오방오부제(五方五部制) 등도 모두 오행 관념의 반영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의 학술, 정치, 제도, 천문, 의학, 문화풍속에 반영된 오행사상은 이루 다 거론할 수가 없다.
목・화・토・금・수의 오행은 단순히 나무・불・흙・쇠・물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그것으로 상징되는 어떤 포괄적 성질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봄철에 ‘구불구불 뻗어나가는(曲直)’성질을 목(木)으로 상징한다. ‘구불구불 뻗어나간다’는 말이 이상한 듯하지만, 그것은 여린 봄기운이 무거운 겨울 기운을 이기며 올라오는[乙] 모습이기도 하고, 아기가 태어날 때도 회전하며 나오는 것을 보면, 구불구불 나아가는 운동이 생명이 자라나기에 유리한 자연의 지혜인가 보다. 여름철 불꽃처럼 올라가는 성질(炎上)을 화(火)라 하고, 가을에 급격히 변하여(從革) 단단하게 열매 맺는 성질을 금(金)이라 하며, 겨울에 생명의 기운을 아래로 내려 뿌리를 촉촉이 적시는(潤下) 성질을 수(水)라고 한다. <주역> 건괘의 원・형・이・정(元亨利貞)이 봄・여름・가을・겨울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듯, 오행의 목・화・토・금・수 역시 그렇게 비겨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토는 밖으로 뻗어나가는 성장을 멈추고 이제 단단한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조절해 주는 중심의 역할이다. 꽃 떨어지고 열매 맺힌다.
동북아시아에서 오행은 이 세계를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파악하기 위해 고안된 일종의 보편적 분류틀이다. 방위, 색, 숫자, 신체, 곡식, 동물, 식물, 사람이 지켜야 할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의 덕목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 오행의 체계로 분류하지 못할 것이란 없다. 그러니 거창하게 말하면 오곡밥, 오미자차, 색동옷, 비빔밥은 다섯 가지 빛깔을 통해 우리의 의식주에 이 세계를 다 담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의 발성기관에 깃든 천지자연의 모습
훈민정음이 어떤 원리에 입각해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한 “훈민정음해례”의 ‘글자 지은 풀이’는 먼저 음양오행이 세계의 보편 법칙이며, 훈민정음은 목소리에 깃든 음양오행의 이치를 찾아내었을 뿐이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목소리에 깃든 음양오행의 이치를 글자로 담아내는 과정은 초성 17자에서 잘 드러난다. 17자는 지금은 쓰지 않는 여린히읗, 꼭지이응, 반치음을 포함한다. 사람의 목소리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다섯 발성기관에서 나오는 것으로 분류된다. 발성 부위의 순서대로 본다면 목구멍소리, 어금닛소리, 혓소리, 이빨소리, 입술소리이다. 각 발성기관을 대표하는 기본음 ㅇㄱㄴㅅㅁ이 있고,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획을 더해 나머지 글자를 만든다. 이를테면 혓소리의 그룹은 ㄴㄷㅌ, 이빨소리의 그룹은 ㅅㅈㅊ 와 같은 식이다. 기본음은 각 발성기관의 모양을 그렸다. ㅇ는 목구멍을,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습을, ㅅ은 송곳니를, ㅁ은 입술을 다문 모양을 그대로 그렸다. 발성기관의 모양을 그려낸 글자의 모양, 그것이 바로 ‘주역’이 말하는 상(象)이다.
이정호 저 <국문영문해설역주 훈민정음>(보진재)
▪초성의 오행에는 방위, 계절, 음(音)이 있다
이미 오행의 체계로 포착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람의 목소리 역시 오행에 근본하기 때문에 훈민정음은 네 계절, 방위, 각・치・궁・상・우의 오음(五音) 등과도 잘 어울린다. “해례”의 설명은 이렇다. 먼저 발성기관 중 가장 깊은 곳인 목구멍소리는-물(水)-북쪽-겨울-우(羽)에 해당한다. 목구멍은 깊고 물기가 많으며, 소리의 특성도 물처럼 투명하여 걸림이 없어서이다. 그다음에 위치한 발성기관인 어금닛소리는 나무(木)-동쪽-봄-각(角)이 된다. 어금니는 얽히고 길어서 나무와 같다. 그다음에 위치한 발성기관인 혀는 불(火)-남쪽-여름-치(徵)이고, 그 소리의 특징은 마치 불이 굴러 퍼지며 너울너울하는 것과 같다. 그다음 송곳니에 해당하는 쇳소리(金)는 서쪽-가을-상(商)이다. 마지막으로 입술은 전체 발성기관을 감싸 안고 있는 형상으로 오행의 토(土)-끝여름/환절기에 해당한다. 오행의 토는 만물을 감싸 안고 포용하며, 고정된 자리가 없이 네 계절의 끝에 붙어서 고르게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토(土)를 여름의 끝자락에 붙이기도 하는 것은 극한에 이른 더위가 방향을 바꾸어 추위를 향해 돌아가는 큰 변화의 지점이기 때문이겠다. “해례”는 위와 같은 설명의 끝머리에 “이상 첫소리에 음양과 오행의 방위의 수가 있음을 말했다”라 맺음 한다. “해례”가 말하는 대로 초성 17자의 음양오행 방위의 수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은 오행상생의 그림이 된다.
▪ ‘상극’이 아닌 ‘상생’을 지향하는 초성의 다섯 방위
음양과 마찬가지로 오행 역시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작용하는데, 그 관계 방식이 상생(相生)과 상극(相克)이다. 상생관계는 수는 목을 낳고(水生木), 목은 화를 낳고, 화는 토를 낳고, 토는 금을 낳고, 금은 수를 낳는다는 식이다. 상극은 물은 불은 이기고(水克火), 불은 쇠를 이기고, 쇠는 나무를 이기고, 나무는 흙을 이기고, 흙은 물을 이긴다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세상은 상생과 상극의 상호작용으로 굴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편이 반드시 좋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이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도 있는 법이다. 누구라도 근심 걱정이 많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만, 그 근심거리가 나를 살리는 원동력이 되고, 안락하기를 바라지만 그 안락함이 되레 나의 생명력을 해치기도 한다.
그런데 훈민정음 초성은 오행의 ‘상생(相生)’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만약 독자가 ‘훈민정음 초성 17자의 배치는 아・설・순・치・후(牙舌脣齒喉)의 순서에 따른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행의 ‘상생’관계에 따른 이해이다. <해례본>의 첫머리에서 정음 28자를 설명할 때, “ㄱ은 君자의 첫 발성이다”라고 하여 ㄱ부터 설명을 시작한 것도 아・설・순・치・후의 오행 상생의 순서에 따른 것이다. 상극이 아닌 상생을 택한 것은 아마도 ‘낳고 살린다’는 상징적 의미를 취한 것이 아닐까?
아설순치후의 오행상생관계로 배열된 초성 17자 . 사진 <학산이정호전집>
▪<해례본>에 나오지 않는 초성 이야기
<해례본>에 나오지는 않지만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20세기의 종교사상가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1890~1981)의 훈민정음에 대한 이해이다. 그는 ㄱ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건(乾)의 상징으로, ㄴ을 하늘 말씀을 고스란히 받아 안은 땅의 곤(坤)으로 풀이하였다. 다석은 우리말에 담긴 철학성과 종교성을 깊이 사색한 인물이다. 그가 ㄱㄴ을 건괘와 곤괘에 비겨 본 것은 매우 단순한 듯하지만, 필자는 여기에 <주역>과 훈민정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겼다고 느낀다.
<주역>에서 말하는 곤(坤)의 특징은 ‘순(順)’이다. ‘순종한다’ ‘따른다’는 의미인데, 이는 주체적 판단 없이 그저 시키는 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유학적 관점에서는 하늘로부터 받은 선한 본성을 훼손됨 없이 고스란히 지켜 따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종교적 관점으로 말하면 하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 안아 순종하는데, 그 정도가 죽음에 이를지라도 그렇게 한다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거룩함과 매운 절개의 뜻을 담고 있는 글자가 순(順)이다. 더구나 곤(坤)은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고, 하늘의 일을 대행해서 끝마칠 뿐(无成以終)이라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주역>이 말하는 곤괘의 이야기이니, 다석 선생의 뜻이 꼭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ㄱㄴ에서 건곤을 매개로 한 종교적 수행의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이왕에 말이 나왔으니, 역학(易學)의 관점에서 훈민정음을 연구한 인물로 학산(鶴山) 이정호(李正浩, 1913~2004)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저서 <해설 역주 훈민정음>과 <훈민정음의 구조원리>를 통해, 훈민정음이 역(易)의 원리에 입각해 지어졌음을 밝혔다. 학산은 훈민정음은 어학서일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역학서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 가운데 훈민정음 초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부분을 언급하자면, 비록 “해례”에는 설명이 없지만, 학산은 초성에 천지인 삼재와 간괘(艮卦☶) 소년의 모습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초성 기본자를 합하면 하늘○ 땅□ 사람△의 모습이 들어있으며, 이를 펼쳐 놓으면 머리가 큰 어린아이의 모습이 된다. <주역>의 체계에서 간괘(☶)는 소년(막내아들)을 상징하고 한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국에서 출현한 <정역>에서는 ‘주역(周易)’의 선천시대 질서가 끝나고, 새롭게 도래할 후천시대의 주역(主役)으로 간(艮☶) 소년을 지목하고 있으니, 훈민정음 초성에서 어린이의 상(象)을 펼쳐볼 수 있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초성의 천지인삼재와 간(艮) 소년. 사진 <학산이정호전집>
▪오행의 문화는 역사적인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다
훈민정음은 초성이나 중성이나 모두 음양오행과 천지인 삼재를 바탕으로 하지만, 초성은 음양오행이 위주가 되어 자연의 문채를 표현해 냈다면, 중성은 천지인 삼재의 원리가 보다 중심이 되어 깊은 인간학적 의미를 제시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차에서 마무리하도록 하자.
놀랍게 생각될 수 있지만 사실 <주역>책에 ‘오행’이라는 글자는 나오지 않는다. 풍부한 음양적 사유와 ‘음양’이라는 글자가 있을 뿐이다. 음양과 오행은 고대의 어느 시기부터 마치 고춧가루 없는 김치를 생각하기 어려운 것처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음양과 오행이 융합함으로써 <주역>은 보다 새롭고 풍성하게 연구될 수 있는 방법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틀거리는 수천 년 동안 동북아시아 문명의 기층을 이루며 삶의 양식으로 뿌리내렸다. 이제 현대의 한국인은 더 이상 오행적 세계관을 의식하면서 살지는 않지만 오랜 문화적 훈습이 그리 쉽사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절기를 의식하며 자연의 리듬과 함께 호흡하는 생활양식, 상생과 상극 관계의 조화로운 운용, 공동체와 함께 살아가는 삶의 주체 형성 등에는 알게 모르게 음양오행적 세계관이 일정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본다.
수천 년이 흘러왔어도 음양오행의 바탕이 되는 세계관은 ‘변화(易)’이며, 상반된 음양의 역동적 작용을 통해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오늘날 어떤 방면에서 음양오행을 연구하고 활용하든 그 방향은 사람의 삶을 보다 성숙하게 이끌어가는 길잡이여야 한다는 것이 미래를 여는 음양오행 활용법의 정석(定石)이겠다.
※훈민정음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