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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일상을 챙기지 않고, 특별해지려는 게 ‘사이비’다

등록 2023-03-09 17:01수정 2023-03-09 17:27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 영성이라면 일반적으로 갖는 선입견은 수도자들만이 갖는 것이고, 산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 무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 거룩하거나 영적인 이미지를 갖는 것 등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즉 일상적인 것이 아닌 것을 영성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갖는 이런 편견을 사이비 종교인들이 파고든다는 것이다. 도인인 척, 대단한 영성가인 척하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신을 자처하면서 지배 욕구를 채운다.

영성은 일상이다. 일상을 벗어난 영성은 허상이거나 허구이지 참영성은 아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마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영성은 평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종교는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수준의 삶을 요구함으로써 종교적 신경증자들을 양산 중이다.

# 코로나바이러스가 순화 중이란다. 바이러스가 치명적이어서 숙주들이 다 죽으면 자기들도 사라지는지라 바이러스들도 머리 쓴단다. 이것은 자연계의 법칙이다. 독한 것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독오른 뱀, 독초 등등 독이 오른 것들은 사람들이 가까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독 오른 사람 곁에는 아무리 그가 하는 말이 옳을지라도 가까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종교도 마찬가지다. 자기 종교만이 유일하다 하고, 죽음으로 신앙을 지키자고 하는 독 오른 종교는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영성이란 내 마음의 독기를 빼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는 밥이다. 그 밥이 독 오른 밥이라면, 누가 먹을 것인가. 버려져도 개도 안 먹는다. 심지어 그 자리에 독초들이 자란다.

# 일본 천주교회의 역사는 피비린내 난다. 왜 도망들을 못 간 걸까. 왜 죽으나 사나 자기 영주 밑에 있었을까. 촘촘하게 곳곳에 설치한 검문소때문이란다. 영주의 영역을 벗어나도, 다른 영주에게 죽임을 당해야하니 체념하는 것이다. 이런 체념심리는 지금도 여전한 듯하다.

코로나 기간 동안 수십만명의 노인들이 죽었는데도 정부에 대한 비판이 없다. 일본 정부는 말 그대로 갑질하는 데도, 체념하는것이다. 갑질 정부에 항의하고, 항거하는 우리 국민과는 정반대의 성향이다. 일본강점기 일본의 권력자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검문소들을 만들고, 우리 국민을 무기력화 체념화시키려했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일본인들과는 달리 체념하지 않고, 끊임없이 대항하였다. 나는 이런 우리 국민 정서가 자랑스럽다. 문제는 일본 극우들은 아직도 식민지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고 우리 중 일부 몰지각한 자들도 그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검문소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국민을 노예화하려는 자들은 용서해선 안 된다. 그런데 종교 안에서도 심리적 검문소를 악용하는 일들이 빈번하다.

자기 종교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여서, 심리적 감옥에 가두고 가스라이팅으로 죄책감을 심어주어 스스로 노예가 되게 만드는 악행들이 아직도 빈번하다. 주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벗이라 부르겠다 하셨는데, 주님의 벗들을 다시 종으로 만드는 자들은 검문소를 만든 일본 영주들과 다를 바 없는 카인의 후예들이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 가톨릭 교회는 전세계에 순교자들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늘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고자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가톨릭 교회에 의해서 죽은 이들에 대해서는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남미에서 벌어진 학살극, 유럽에서 벌어진 개신교와의 잔혹한 종교전쟁 등을 말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다른 종교들도 유사하다. 일본 천주교인들을 학살한 것은 일본 불자들이다. 미얀마 국민을 학살하는 자들도 불교도들이다. 이슬람 역시 학살을 자행한 종교이다. 왜 거의 모든 종교들이 살인 행위에 가담하고, 살인 행위에 동조하거나 침묵을 지킨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말씀보다 종교 자체에 대한 집착이 종교를 정치적 조직으로 변질시켜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한다. 마치 거대 기업들이 공룡들처럼 작은 기업들을 먹어 치우는것 처럼 종교 역시 그런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대형 종교들은 대기업들의 행태를 답습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톨릭 수도자들은 가난의 서원을 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은 현대인들의 행복관과는 정반대인데도 대대로 강조되는 것은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자 노력해야 종교가 종교다움을 유지할 수 있고, 종교가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 홍성남 신부(가톨릭영성심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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