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
우리의 훈민정음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독창적인 문자라는 평가는 이미 세계 유수 언어학자들에 의해 거듭되고 있어서,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그들이 아직 포착하지 못한 것이 있다. 훈민정음의 자모(字母)는 철학적 설명 체계를 갖춘 역사상 유일한 문자라는 사실이다. 물론 동양의 15세기 이론체계로 구현된 철학이니 그들의 눈에 포착될 리 만무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야 그렇다 치고, 그럼 한국 사람은 얼마나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우리의 전통 자산이 우리 자신에게조차 낯설어져 버린 현실을 먼저 돌아보아야 할 듯하다.
<주역>에서는 “역(易)의 도는 넓고 커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갖추어 있으니, 요약하면 하늘과 땅과 사람의 도리이다”라고 한다. 이른바 천지인 삼재론이다. 천・지・인에서 사람은 하늘 아버지, 땅 어머니의 소산이되 그 부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귀한 존재로 여겨진다. 나아가 세상 만물은 돌멩이 하나까지도 천지 부모의 자식들이니, 그 맏이인 사람이 수많은 형제자매를 잘 돌보아 함께 천수를 누리는 것이 효(孝)라는 사상이 삼재론에 담겨 있다. 즉 만물을 낳고 살리고자 하는 천지 부모의 마음을 닮아 나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불초자(不肖子)가 되기를 면할 수 있다. 불초(不肖)는 닮지 못했다는 뜻이니, ‘불초자’는 부모를 닮지 못한 불효자식이란 말이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靈長)이 되는 것은 바로 천지 부모의 뜻을 잇는 이러한 자기인식과 실천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훈민정음 중성은 ∙ ㅡ ㅣ천지인 삼재로 구성되어 있다. ∙ 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둥글게 순환하는 하늘의 모양을 그렸고, ㅡ는 평평한 땅 모양을 그렸으며, ㅣ는 하늘과 땅을 잇는 직립(直立)한 사람의 모양을 본떴다. 그런데 사람이 하늘과 땅을 ‘잇는다’는 말의 함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이란 하늘과 땅으로 상징할 수 있는 두 상반된 가치를 종합해서 실현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정신과 물질, 영혼과 육체, 추상과 구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직립’한 사람의 형상에도 의미가 있다. 동물이 네 발로 다녀서 땅과 나란한 것과 달리, 사람은 하늘을 향해 머리를 세우고 꼿꼿이 섬으로써, 생존 욕구가 충족되면 그만인 동물성에서 벗어나 보다 고차원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그러나 두 발은 대지에 굳건히 버티고 서서 결코 현실의 기반을 떠나지 않는다. 한쪽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와 땅의 가치, 이 상반된 양자를 종합하여 꽃피우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해례본>이 전하는 이야기이다.
▪ 하늘(초성)과 땅(종성)의 소리는 사람(중성)을 통해 완성된다
우리글의 초성, 중성, 종성 역시 하늘-사람-땅의 구조이다. 초성은 소리를 처음 일으키기 때문에 하늘의 역할이고, 종성은 소리를 마치는 땅에 해당하며, 모음인 중성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의 역할에 해당한다. 그런데 모음인 사람이 없으면 소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 글자라도 생각해 보라. 중성 없이 초성과 종성만으로는 완성된 소리를 이룰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면 천지의 뜻은 온전히 실현될 수 없다. 초성-중성-종성과 하늘-사람-땅은 이렇게 함께 연동한다. 우리가 매일 글을 읽고 쓸 때마다 사람이 역할을 함으로써 천지의 뜻과 기능이 제 빛을 발한다는, 우리글의 사람에 대한 철학이 글자의 원리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못 다하는 이야기 : 사람은 고정된 틀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
사실 <해례본>에 담긴 인간론의 백미를 맛보려면 이젠 너무나 낯설어진 세계의 언어를 맞닥뜨려야 한다. 지금 그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다 풀어낼 수는 없고, 그 난해한 암호의 결론만 살짝 내보이련다. 조선 초기 새롭게 등장한 주역의 이론을 담은 ‘하도(河圖)’라는 도상(圖象)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이 그림이 지향하는 가치가 오행의 ‘상극’이 아닌 ‘상생’이며, 양을 높이고 음을 억누르는 체계(억음존양:抑陰尊陽)가 아니라 음과 양이 균형적 조화를 이루는 이상세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만 기억해 두자. 그것이 훈민정음의 작자가 지향했던 가치의 방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해례본>이 도상을 통해 말하려는 핵심은 중성 11자에 음양의 균형과 조화라는 이상적 가치가 담겼다는 것과, 사람인 ㅣ는 어떤 이론적 틀로 고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해례본>은 이렇게 말한다.
하도(河圖) : 1~10까지의 숫자가 오행상생의 원리에 따라 동서남북에 배치되어 있다.
훈민정음 중성도 그림 <학산이정호전집>. 중심에는 ∙ ㅡ , 가운데는 ㅗ ㅏ ㅜ ㅓ, 바깥쪽으로는 ㅛ ㅑ ㅠ ㅕ가 동서남북의 방위와 오행의 숫자에 맞춰 배치되어 있다. ㅣ는 방위와 숫자가 없다.
“사람은 무극(無極)의 참됨(眞)과 음양오행의 정기(精氣)가 신묘하게 엉겨 이루어진 존재이므로 일정한 방위와 숫자로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무엇으로 규정할 수 없는 궁극적인 것(無極)을 마음속 깊은 자리에 품고 있어서 참되고, 선하며, 아름다운 가치를 뿜어낼 수 있는 신묘한 존재라고 해야겠다. “사람은 어떤 수치적 통계나 이론으로 정의될 수 없는 무규정적 존재”라는 것이 훈민정음의 인간 이해이다. 미리 규정되거나 한계지어 있지 않기에, 스스로 자신의 모습과 가치를 규정해갈 수 있는 자유와 잠재력이 자신에게 있다.
재미있게도 사람의 생긴 모습으로 그의 운명을 예측하는 상학(相學)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심상(心相)이라 한다. 마음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니, 어떤 모습을 빚어갈지는 나 자신에게 달려있다. 훈민정음 역시 자연과 사람의 삶이 어떤 법칙 아래에 있음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인간의 의미를 보여준다. 사람은 한갓 운명론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 의미를 끝없이 창출할 수 있는 열린 존재이다.
▪훈민정음 혁명
훈민정음이 담고 있는 사상은 하나의 조용한 혁명이다. 첫째는 글 모르는 사람들이 누구라도 손쉽게 문자생활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는 문자혁명이며, 둘째는 이 문자를 쓰는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신이 하늘과 땅을 잇는 가치창조의 주체이자 어떤 고정된 틀로 규정되지 않는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인간 혁명이다. 훈민정음은 하나의 문자혁명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자기모습에 대한 꿈이다.
각 사람의 책상 위에 노트북과 태블릿이 놓이고, 모든 사람의 손에 핸드폰이 쥐어지기를 바랐던 꿈이 한갓 망상이 아니었듯, 이제 모든 인류가 문자생활의 혜택을 누릴 수 있고, 그 문자에 담긴 인간의 가능성을 자유롭게 빚어내길 바라는 꿈 역시 부질없는 몽상은 아닐 것이다. 21세기에 생각하는 세종대왕의 뜻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상상해보자. 문화로써 인류를 혁명하는 것, 이것이 한류의 현재와 미래가 된다면 어떨까? 세계인에게 각광받는 한류가 흥미 위주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나 쉽게 증발되는 쇼 비즈니스의 차원을 넘어, 하늘과 땅을 잇는 주인공으로서 인간의 휴머니즘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송신탑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이미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발산하기 시작한 한류가 그런 성찰과 희망의 교두보로 성장해 간다면, 이는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 감으로써 이른바 후천은 도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훈민정음 마무리 이야기입니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