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나무는 양지바른 땅이면서 동시에 양분도 적당히 있는 자리를 서식지로 선호하는 나무다. 숲에 빛과 양분이 동시에 보장되는 자리가 있을까? 있다면 어디쯤일까?
일반적으로 숲의 안쪽(중심부)은 양분이 많이 쌓이는 자리이지만, 상층부를 차지하는 나무들 탓에 하층으로는 빛이 투과되기 어려운 곳이다. 반대로 들이나 계곡, 하천, 도로 등 숲의 바깥쪽은 비교적 빛 조건이 좋은 양지바른 공간이지만, 상대적으로 양분은 모자라는 땅이기 쉽다. 식물의 발아와 생장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소는 ①햇빛(광선) ②물(습기) ③토양(양분) ④공기(통풍 조건) 등이다. 식물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이 조건들이 모두 다 완벽하게 갖추어진 시공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무엇인가 넘친다면, 다른 무엇인가는 모자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곳이 생명을 지배하는 환경이다. 불완전한 조건!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생의 조건이다.
이 ‘태과(太過)와 불급(不及)의 원리’가 숲에도 냉정하게 관통되고 있다. ‘(특정한 존재에게) 자연은 인자하지 않다(天地不仁)’라고 통찰한 노자의 말(老子, <道德經> 5장)은 아마도 이 냉정한 현실의 간파에서 길어 올려진 말일 것이다.
이 준엄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빛과 양분 둘 다를 탐하며 살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 흔하지 않다. 하지만 있다. 숲과 숲 바깥이 만나는 ‘경계’의 지대가 바로 그러한 자리다. 숲을 이룬 경사진 산을 한 번 상상해 보자. 우리가 상상하는 공간은 높게는 산꼭대기로부터, 낮게는 들판이나 계곡으로 그 각도가 점점 낮아지는 흐름을 이루고 있는 숲 공간이다. 이어지는 경사가 그 가파름을 멈추기 직전의 지점에서 통상 숲과 숲 바깥의 경계가 형성된다. 이 지점이 바로 빛과 양분 모두를 확보할 수 있는 자리이다. 숲과 걸쳐 있어서 토양 속에 유기물 함량이 그 바깥보다 일반적으로 넉넉하다. 또한 안쪽으로는 나무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지만 바깥으로는 하늘이 열려있어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빛도 잘 누릴 수 있는 자리다. 오리나무는 주로 그런 땅에 서식하는데, 숲에서 꽃을 가장 이른 계절에 피우는 나무 중의 하나다.
오리나무는 이른 봄에, 다른 나무들이 잎을 틔우기 전에, 서둘러 꽃을 피운다. 그런 ‘오리나무’를 나는 ‘봄바람을 읽는 나무’라고 부른다. 오리나무는 꽃샘추위 전후로 부는 강한 바람을 기억하는 나무다. (식물학적 표현의 건조함과 딱딱함을 누그러뜨려 더 많은 대중이 자연의 말에 귀 기울이도록 돕고 싶은 나는 식물학이나 생태학의 성과를 종종 인문적 통찰로 변환하여 표현한다) 오리나무는 꽃의 수정에 바람을 활용하는 나무, 이른바 풍매화(風媒花)다. 우리가 대문이나 현관에 입춘대길과 건양다경의 글씨를 써 붙이고 하루하루 더해가는 따사로운 봄기운을 느끼며 안도감과 새로움에 대한 설렘을 느낄 즈음, 갑자기 며칠 동안 모래 먼지를 일으킬 정도의 세찬 바람이 불며 우리를 다시 움츠리게 하는 때가 있다.
오리나무의 꽃은 이때 부는 바람을 기다리며 피어난다. 2~3월경 겨울과 봄의 문턱에서 거세게 불어대는 그 봄바람에 맞춰 오리나무는 ‘꼬리모양(尾狀) 꽃차례’를 한 수꽃을 확 터트리며 한 그루당 수억 개 이상의 수꽃가루를 날려 보낸다. 수꽃이 터트린 꽃가루는 이제 바람을 타고 암꽃의 암술머리를 만나야 한다. 대부분의 수꽃가루는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소수의 꽃가루가 암꽃과 닿아 새로운 생명의 시작점을 이뤄낸다.(David George Haskell, ) 그 희박한 가능성을 더 높이기 위해서 오리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잎을 틔우기 전에, 심지어 자신도 잎을 틔우지 않은 상태에서 꽃을 피우는 것이다. 자신을 포함해 다른 나무들이 잎을 가득 돋워내게 되면 바람에 날아가는 꽃가루가 그 이파리들에 걸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리나무처럼 바람을 매개자로 삼든, 물을 매개자로 삼든, 곤충을 매개자로 삼든, 꽃이 수정에 성공하여 열매가 되기까지는 모두 이토록 절실하고 어려운 과정이 있다. 열매가 다시 씨앗으로 성숙하는 과정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다. 열매는 비바람에 떨어지지 않아야 하고 미성숙한 상태에서 누군가에게 낚아채지거나 해서도 안 된다. 모든 운명적 사건을 피한 열매만이 씨앗으로 성숙할 수 있다.
꽃이 결실에도 성공하고, 열매가 씨앗으로 성숙하는 일에도 드디어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드디어 그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는 씨앗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씨앗이 모두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씨앗이 발아하기까지 또 다른 어려움이 놓여있다.
필자 김용규 괴산여우숲생명학교 교장. 사진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발아할 자리에서만 발아하는 씨앗
어렵게 성숙한 씨앗이 모든 가능성을 이미 담고 있는 원기 덩어리라고는 하지만, 씨앗은 아무 자리에서나 발아하지 않는다. 씨앗은 오로지 딱 발아할 자리를 만나야만 발아한다. 높고 넓게 자연을 보면 생명은 모두 자신이 태어나기에 알맞은 자리에서만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놀라운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여러 종류의 씨앗을 모아 아무 공간에나 흩뿌려보자. 그리고 그 씨앗이 다 발아하는지 아닌지 살펴보자. 결코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씨앗은 아무 데서나 발아하지 않는다. 싸리나무는 싸리나무가 태어날 자리에서만 태어나고, 갯버들(흔히 버들강아지라 부르기도 한다)은 갯버들이 태어날 자리에서만 태어난다. 싸리나무의 씨앗은 다른 무엇보다 빛 조건이 좋은 환경에서 발아하고, 갯버들은 빛 조건에 더하여 물에 가장 가까운 땅에서만 발아한다. 물론 빛과 물이 넉넉한 공간, 즉 광선과 수분의 조건이 좋은 땅에서만 태어나는 나무는 여럿 있다. 대개는 버드나무속 나무들이 그렇다. 그중에 왕버들이나 용버들 같은 나무들은 그 태어나는 자리가 버들강아지와는 다르다. 키가 작은 나무인 버들강아지는 주로 계곡을 서식지로 택하여 발아할 때, 왕버들이나 용버들 같은 나무는 여러 계곡이 만나 이루는 하천을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다.
키 작은 갯버들은 주로 계곡에 산다. 사진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키가 큰 버드나무가 사는 하천. 사진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물속에 사는 생명들도 그렇다. 버들치는 버들치가 태어날 자리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쏘가리는 쏘가리가 태어날 자리에서 태어나 살아간다. 붕어는 붕어의 자리에서, 미꾸리는 미꾸리의 자리에서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이다. 땅속을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생명들도 마찬가지이다. 땅강아지도, 지렁이도, 두더지도 모두 제 삶의 서식지가 다르다.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한 들짐승 역시 그렇다. 고라니와 노루는 같은 초식동물로 얼핏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각각 선호하는 서식 공간이 다르다. 너구리는 서울의 한강에도 종종 출현하지만, 그곳에서 단비를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허공, 그러니까 누구만의 공간이라고 경계 지어질 수 없는 공중을 나는 날짐승들도 그렇다. 우리 눈에 자주 띄어 둘 다 익숙한 새인 까치와 까마귀를 보라. 그들 역시 태어나고 살아가는 공간이 다르다. 마찬가지 곤줄박이는 곤줄박이의 터에서, 꿩은 꿩의 터에서, 말똥가리는 말똥가리의 터에서, 그리고 박쥐는 박쥐의 터전에서 태어나고 살아간다. 얼핏 보면 천연의 숲이 무질서하고 어지러워 보이겠지만, 숲을 이루는 생명 모두는 이렇듯 개별적으로는 저마다 독립적이면서도, 전체 속에서는 완전한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자연 만물의 이 아름답고 정교한 질서에 대하여 <중용>(中庸)은 일찍이 위와 같이 간결한 문장을 담아 그 아름다운 신비를 짚어둔 바 있다. <중용> 1장의 첫 문장은 성리학(性理學)의 ‘성(性)’과, 성리학의 다른 이름인 도학(道學)의 ‘도(道)’, 그리고 도를 닦는 과정인 ‘교육(敎)’과 수행에 대한 개념을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유자(儒子)들의 성리학이 <중용>을 그토록 중요하게 여긴 까닭을 저 한 문장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나긴 세월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사유체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쳐온 저 거대한 문장을 견문이 좁은 촌부가 감히 독해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다만 숲과 함께 살고 사유하던 어느 날 문득 저절로 알아채게 된 수준에서 읽어보자면 이러하다.
“성(性)은 하늘이 명한 것이다. 그 성을 따라 사는 것을 도(道)라 한다. 그 도를 닦아나가는 과정이 교육(이요 배움)이라 할 것이다.” 문자를 따라 이렇게 풀면 너무 추상적이어서 뜻이 언뜻 와 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자연과 뒹굴며 문득 몸으로 터득하게 된 뜻을 은유와 함께 적어 본다. ‘①하늘이 사람에게는 사람의 성(性)(인성, 또는 인간성)을 내리고, 물에는 물의 본성을 내렸다. 민들레에게는 민들레의 성을, 산삼에게는 산삼의 성을, 버드나무에게는 버드나무의 성을, 전나무에게는 전나무의 성을 각기 내렸다. 어미에게는 모성(母性)을, 아비에게는 부성(父性)을, 각 주체들에게는 개성(個性)을 주었다. ②사람이 사람의 본성(性)을 따라 살면 그것이 사람의 길(道)이다. 민들레가 민들레에게 품부(稟賦)된 性을 따라 살면 그것이 민들레의 道요, 버드나무가 자신에게 품부된 性을 따라 살면 그것이 버드나무의 道다. ③민들레가 민들레로 꽃 피우고, 버드나무가 버드나무로 꽃 피우며 살기 위해 배우고 수련해 가는 과정이 바로 교육이요 배움이다.’
<중용>은 모두 제 본성이 있으니 저마다 그 본성을 따라 추구하고 실천하며 사는 것에 높은 가치를 두면서, 참된 교육과 수련의 의미에 대해 이토록 짧으면서도 명확한 뜻을 담아 정리하고 있다. 문장을 읽을 때마다 삶과 교육(배움)의 지표로 삼을 문장 중에 이보다 더 탁월한 문장이 어디 또 있을까 생각한다.
장차 제 삶을 완성할 힘을 다 응축하고 있는 것이 씨앗이지만, 자연 상태에서 씨앗은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조건을 갖춘 자리에서만 발아한다. 물 본능이 짙은 버드나무를 바위가 솟구쳐 드러난 산꼭대기에서 만날 수 없고, 양수분의 욕망이 까다로운 산삼을 가까운 숲에서 흔히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른 예로 빛을 강렬히 갈급하는 본성을 지닌 양수 식물들은 그늘이 짙은 숲 안쪽 자리에서는 발아하지 않는다. 길섶에는 그토록 흔한 민들레를 깊은 숲 한복판에서는 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민들레는 짙은 그늘을 못 견딘다.
<중용>의 진단처럼, 자연을 지배하는 하늘의 섭리를 따라 생명은 모두 태어날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부여받은 자리에서 저마다 자신의 길(道)을 이루어간다.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땅에서 저마다 자신의 길을 이뤄가는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자신의 빛깔과 모양과 향기로, 자신의 때에 맞춰 꽃 피고 열매 맺는 숲을 보라!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우며 때로 그윽한가!
자신이 되어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건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기쁜 일이다. 그러나 그건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저마다의 길에는 각자의 숙제가 놓여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모두 풀어내야 할 제 삶의 숙제를 반드시 풀어야만(修道) 꽃필 수 있다. 숲에서 자기 삶의 숙제를 풀지 않고 꽃 피는 풀과 나무는 단 한 그루도 없다.
그러면 도대체 왜 풀어야 할 삶의 숙제가 생명 앞에 놓이는 것일까? 이제 그 신비를 만날 때가 되었다. (다음 글에 이어짐)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