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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다 비움으로써 산다…대나무가 풀어낸 숙제

등록 2023-06-01 16:03수정 2023-06-01 16:22

픽사베이
픽사베이

대나무 이야기-하

대나무는 어떤가?

대나무는 빛과 양분 모두에 큰 결핍이 없는 공간을 좋아한다. 그런 공간이 있을까? 있다. 숲과 숲 바깥이 만나는 지점, 바로 경계지대가 그런 곳이다. 서식지를 살펴보면 대나무는 주로 숲정이에 산다. 우리나라의 숲은 대부분 경사진 산을 토대로 형성되어 있다. 경사진 숲은 산 정상부로부터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비탈을 타고 형성된다. 비탈이 거의 끝나고 평지에 이르는 공간에 이르면 주로 농토나 마을이 형성돼 있다. 숲과 마을, 혹은 마을 뒤의 농토와 숲 사이, 그 경계지대쯤, 그곳 숲정이가 바로 대나무의 주된 서식지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편의를 위해 그런 자리에 대나무를 식재했다고 하더라도, 그 식물의 적지(適地)가 아니면 그 공간에서 살지 못한다. 따라서 대나무의 서식 적지는 바로 숲정이다.)

이 경계지대는 동식물들에게 특별한 공간이다. 숲 안쪽에서 생성된 유기물이 경사를 타고 토양의 겉과 속으로 흘러내려 쌓이는, 그래서 숲이 만들어낸 풍부한 양분의 혜택을 어느 정도까지는 저절로 누릴 수 있는 공간이다. 이 공간의 이득은 그것만이 아니다. 숲 안쪽 방향에는 이미 다른 식물들이 하늘을 차지하고 있어 그늘이 드리우는 자리지만, 숲 바깥쪽으로는 아직 하늘이 완전히 열려있어 양분을 누리면서도 빛을 포착하고 누리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양분과 빛을 다 충족할 수 있는 공간! 숲의 경계지대에 사는 식물 대다수는 이 두 가지의 이로운 환경을 한꺼번에 탐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나무로는 오동나무나 국수나무가 그렇고, 쥐똥나무, 누리장나무, 찔레나무, 복분자, 인동덩굴, 댕강나무, 작살나무, 붉나무, 자귀나무, 두릅나무 등을 꼽을 수 있다. 대표적인 풀로는 꽃향유나 산국, 큰꽃으아리, 더덕 등이 떠오른다. (대나무 외에 경계에 사는 몇몇의 다른 식물들이 감당하며 풀어내고 있는 삶의 숙제와 그 생태에 대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대나무만 먼저 살핀다.)

대나무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곧게 그리고 드높게 자란다. 고산이 궁금해한 ‘대나무의 꼴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생장방식과 생태(生態)에 관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대숲에서 보는 대나무는 몇 년 만에 그 높이까지 자랐을까? 숲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대나무는 1년에 다섯 마디씩만 자랍니다.”라고 농을 치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속아 넘어간다. 아마 대나무가 자라는 시기에 그 생장의 전체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어 그럴 것이다. 진실은 대나무는 한 해에 자신이 키울 일생의 키 전부를 키운다는 것이다. 한 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2달 이내에 일생 살아갈 높이까지 다 자란다. 죽순은 따뜻한 봄철, 혹은 장마 전에 대나무의 땅속줄기(地下莖)로부터 발아한다. 이후 비, 특히 장맛비가 내리면 대나무는 엄청난 속도로 자란다. 조건이 맞으면 하루에 60~100c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대나무는 왜 그렇게 빠른 속도로, 곧게 높게 자랄까? 나는 그 까닭을 치열한 경계지대에서 빛과 양분을 확실하게 차지하려는 대나무의 분투 때문이라고 읽는다. 숲의 경계지대는 확실히 기회의 땅이다. 하지만 그래서 또한 치열하다. 숲의 가장 바깥쪽을 이미 차지하고 살던 식물들은 빽빽한 숲 안쪽의 공간보다는 넉넉하게 빛이 떨어지는 바깥 공간을 호시탐탐 노린다. 그 열린 공간으로 씨앗을 떠나보냄으로써 새로운 개체를 퍼트리기도 하지만, 햇빛이 풍성한 숲 바깥쪽을 향해 지속적으로 가지를 뻗는다. 햇빛이 넉넉해야 살 수 있는 대나무는 햇빛을 놓치면 안 된다. 치열한 다툼이 있는, 그러나 아직은 비어있는 숲정이의 그 하늘을 단박에, 그리고 영구히 차지하는 방법을 대나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찾아냈다.

대나무의 핵심적인 방식, 혹은 꼴(behavior)은 이러하다. 첫째, 봄철 발아한 죽순은 비가 오는 절기와 만나면 맹렬하게 수직으로 솟구쳐 자란다. 비 온 뒤의 죽순이 자라는 모습은 맹렬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우후죽순(雨後竹筍)은 그 현상의 요체를 담고 있는 말이다. 열린 하늘을 차지하기 위한, 햇빛을 향한 엄청난 속도의 수직 성장, 놀랍게도 그 분투는 대략 2달이면 끝난다. 그 공간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성취와 함께.

대나무꽃.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대나무꽃.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둘째, 고산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나무는 군락을 이루며 산다. 왜 군락을 이루며 살까? 그 이유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대나무가 유성생식이 쉽지 않은 식물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대나무의 꽃을 본 적이 있는가? 대나무의 꽃을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본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대나무는 일생 단 한 번만 꽃을 피운다. 그것도 대략 60~120년의 세월에 단 한 번 찾아오는 경험이다. 대나무는 단 한 번의 꽃을 피우고 그 이듬해가 되면 모두 죽는 특성을 가졌다. 그러니 대나무의 꽃을 보는 경험은 결코 쉽지 않다. 유성생식이 쉽지 않은 대신, 뿌리 노릇을 하는 땅속줄기(地下莖)를 통해 자기 생명을 복제하면서 무성생식의 방식으로 번식하고, 또 세력을 확장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생 단 한번 꽃을 피우는 이유는 아마 후대의 유전자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 때문일 것이다. 눈물겹다. 군락 전체가 일제히 꽃을 피운 뒤 생을 마감하는 까닭은 땅속뿌리가 붙들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꽃 피우는 데 모두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생리적 측면에서는 무성생식을 통해 번식하는 방식으로 군락을 이루게 되었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태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최적인 서식지를 끝없이 넘보는 다른 식물들로부터 군락을 이루어 영토를 지켜내려는 분투로 읽을 수 있다. 뿌리줄기가 서로 얽혀 있고, 매년 새로운 대나무를 뽑아 올릴 수 있는 군락, 그 대숲의 틈바구니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은 거의 없으니까 말이다. 비슷한 예로, 소나무도 군락을 이루어 서식지를 방어하는 특성을 보인다.

그늘에서는 살기 어려운 생리적 특성을 지닌 소나무들은 자신보다 높이 자라는 식물이 자신의 아래에서 자라면 위험에 빠진다. 그럴 경우 빛이 쏟아지는 하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나무는 군락을 이루어 살면서 타감작용(他感作用)을 한다. 즉, 자신의 하층에서 다른 식물들이 발아하는 것을 억제하는 물질을 생성·분비함으로써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는 것이다.(타감작용은 졸저, 숲에게 길을 묻다, 비아북, 2019, ‘자식’ 부분 참조)

고산의 질문, ‘곧기는 뉘 시킨 것이냐?’에 대한 대나무의 대답은 아마 이렇지 않을까? ‘하늘이 부여한 삶의 숙제를 푸느라 그리되었소! 무심한 생(生)과 극(剋)의 작용 속에서 숙제를 풀어 나의 세계(서식지와 하늘)를 이루고 지켜냄으로써, 마침내 꽃피워 보려다 그리 되었소!!’

대나무밭. 픽사베이
대나무밭. 픽사베이

속은 어이 비었는가?

고산의 또 다른 질문, 대나무의 속은 왜 비었을까?

대나무는 전체 크기를 놓고 볼 때 높이보다 줄기가 턱없이 가늘다. 단독으로 대나무를 떼어놓고 보면 한 그루 또는 한 포기의 대나무는 위태롭기 그지없다. 왜 그 위태로운 모습으로 자랐을까?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하늘, 즉 햇빛을 확보하기 위해 대나무는 그 위태로운 선택을 했을 것이다. 게다가 대나무는 숲의 변방, 혹은 가장자리에 산다.

숲의 가장자리에 홀로 서 있는 대나무를 본 적이 있는가? 얼마 전 고창군 선운산에 있는 한 연수시설로 강연을 다녀온 적이 있다. 시설은 선운산의 한 자락, 숲정이 근처에 터를 잡고 있었다. 선운산 숲과 연결된 건물 주변으로는 대나무가 빼곡히 군락을 지어 살고 있었다. 건물과 너무 붙어서 그랬을까? 대나무 군락 중에서 건물과 가까운 부분에 있는 대나무를 약 3~4m 정도 폭으로 일제히 벤 것을 보았다 베어진 자리는 시각적으로 훤했다. 대나무 입장에서는 큰 재난을 겪은 것이리라. 하지만 그런 재난을 겪는다고 대나무가 삶을 포기할 리 없다. 베어진 자리의 군데군데에서 드문드문 크고 작은 죽순이 새로운 생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그중 유난히 빨리 자라 이미 죽순의 단계는 넘었고 아직은 어른 대나무의 꼴에 도달하지 않은 한 녀석을 오랫동안 마주 보고 서 있었다. 건물과 대숲 사이, 그 벌채되어 황량해진 공간으로 골바람을 닮은 바람이 수시로 불어왔다. 그때마다 대숲에서는 촤아~ 촤아~ 신비로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순. 사진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죽순. 사진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군락을 이룬 대나무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조금도 위태롭지 않았다. 꼿꼿이 서서, 그러나 바람의 결을 따라 군락의 끝부분들이 자연스럽게 일렁이면서 바람을 맞고, 바람을 떠나보내고 있었다. 하나의 뿌리에 기반을 두고 각각의 뿌리들이 사방으로 뻗어가며 뒤엉켜 있을 땅속의 그림을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다. 뿌리로부터 단단히 서로를 붙들고 꼿꼿하게, 떼로 자라나 숲의 최전방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이하고 있는 대숲. 그 자연스러운 일렁임과 그것이 빚어내는 신비한 소리에 나는 한동안 나를 잊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불현듯 앞서 본, 그 단독으로 솟구친 어린아이 같은 대나무가 궁금해졌다. 홀로 서 있는 어린 대나무는 불어오는 빠른 속도의 바람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어린 대나무는 다 자란 대나무보다 훨씬 유연했다. 아직은 성장 중이라서 이미 다 자란 대나무처럼 굳세고 단단하게 목질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능수버들의 가지나 강아지풀만큼 유연하게 휘어지지는 않았지만, 어린 대나무는 바람의 결을 따라 어느 정도 줄기와 끝을 휘었다가 다시 일어서고 다시 휘고를 반복하며 바람과 만나고 있었다.

대나무가 사는 숲정이라는 서식지는 숲의 경계지대 중에서 숲이 들이나 마을과 만나는 지점의 공간이다. 그 자리는 숲의 중심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숲의 최전방에 해당한다. 대나무는 숲의 최전방을 제 서식지로 삼고 살아가는 식물이다. 숲의 최전방은 빛과 양분 모두를 누릴 수 있는 기회의 땅이지만, 동시에 숲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제일 먼저, 가장 세차게 만나야 하는 자리다. 그것을 어떻게든 감당하고 극복해 내야만 하는 땅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나무의 또 다른 숙제는 바람이다. 대나무는 바람이라는 숙제를 어떻게 풀었을까? 이해를 돕기 위해 같은 숙제를 풀어낸 다른 식물의 방식을 조금 살펴보자.

강가에 서서 바람의 숙제를 풀어낸 식물이 있다. 의지할 곳 별로 없는 강가 개활지에 맨몸으로 우뚝 서서 거센 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고, 그 바람과 어떻게든 화해해야만 물가에서의 삶이 가능했을 능수버들이나 수양버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어린 가지를 한없이 부드럽게 만듦으로써 바람이라는 숙제를 풀었다. 거친 바람이 강가로 부는 어느 날, 강가를 찾아 바람의 숙제를 풀고 있는 버드나무들을 가만히 마주해 보시기 바란다. 한편 벼는 들판의 중심부, 논에 서서 꽃 피우고 이삭을 맺는다. 벼는 그 이삭이 누렇게 익어갈 즈음 어김없이 찾아오는 몇 개의 태풍과 어떻게든 화해해야만 한다. 벼는 어떻게 태풍에 꺾이지 않을 수 있을까? 간단하다. 벼가 찾아낸 비법은 속을 비우는 것이다. 그리고 줄기에 적당한 마디를 두어 속을 비운 원줄기가 쉽사리 꺾이거나 뒤틀리지 않도록 했다.

대나무숲.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대나무숲. 여우숲생명학교 제공

숲의 최전방에서 바람을 맞아야 하는 대나무는 벼와 비슷한 꼴을 하고 있다. 잎은 좁게 내고, 속은 비우고, 줄기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마디를 두었다. 바람에 대한 저항을 줄였고, 강직함 속에서도 유연함을 잃지 않는 방법을 찾았다. 무엇보다 골격이 뒤틀리지 않도록 마디마다 일관된 격막을 설치해두었다. 이 정도면 ‘왜 속을 비웠느냐’는 고산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을까? 그렇기를 희망한다. 또한 ‘누가 그것을 시킨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사족을 덧붙여 두고 싶다.

그것은 아마 신이 하신 일이며 동시에 대나무 자신이 한 일일 것이다. 신은 무자비하다. 하늘은 특정 생명에게만 은혜를 베풀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무자비해야 천지만물이 고루 제 자리에서 제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태로운 바람을 아예 없앤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바람이 없이는 누구도 숨을 쉴 수 없다. 모든 생명은 곧 사라질 것이다.

하늘은 무자비하지만, 하늘은 또한 질서와 리듬으로 만물에 비춘다. 그리고 생명 저마다에게 그 질서 위에서 저마다의 리듬으로 춤출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누군가는 속을 비워 리듬과 하나가 되었고, 누군가는 부드러움을 갖추는 것으로 신의 질서와 리듬에 발을 맞추었다.

김용규(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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