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생명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계절의 흐름과 변화에 예민하다. 어부는 어부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산사람은 산사람대로, 바깥에서 몸을 쓰며 사는 노동자는 노동자대로.
섬진강 어귀에 산다는 어느 유명한 시인이 언젠가 TV에 함께 출연해 강연을 하던 자리에서 내게 물었다. “여름이 언제부터지요?” “여름의 시작은 입하(立夏)가 아니던가요?” 나의 의문형 대답을 듣고, 그가 이렇게 짚어 주었다. “시골 사람들은 오동나무에 꽃이 피면 그때부터 여름으로 가늠해요.” 이후 나는 그런 방식의 시간 가늠법이 부쩍 흥미로워졌다. 그런 식으로 하면 언제부터가 봄일까? 여우숲 근처에서 일생 농사지으며 사시다가 몇 해 전 세상을 떠나신 마을 할머니는 내게 오랜 지혜를 전수하셨다. 미소 띤 얼굴로 “삼짇날에야 비로소 봄이 오는 겨.” 이때 드디어 나비가 선을 보이고 강남으로 떠나갔던 제비가 다시 돌아오고 뱀도 겨울잠에서 깨어나 활동을 시작하니, 이날부터 체감할 수 있는 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계절의 변화는 어제까지는 겨울, 오늘부터는 봄, 이렇게 일도양단하듯 진행되지 않는다. 모든 변화(易)가 그렇듯, 계절 역시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는 태극(太極)의 본 모습을 고스란히 표현하며 변화해 간다. 봄은 겨울 끝자락과 중첩되어 찾아온다. 초여름은 봄과 겹치며 찾아온 뒤 장마와 삼복더위를 동반하는 한여름으로 내달렸다가 늦여름으로 흐른다. 늦여름도 마찬가지 가을의 성질과 섞이면서 서서히 저물어간다.
시골사람들은 자연과 더불어 그 리듬을 하루하루 읽으면서 때맞춰 농사짓고, 밥 짓고, 옷 짓고, 집 지으며 삶의 바탕을 챙겨야 했다. 그래서 그들이 시간과 계절의 전환을 느끼는 방법은 숫자로 표기된 달력과 달리 훨씬 입체적이고 구체적이며 감각적이어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낡고 오랜 것이 되어버린 저 감각법을 나는 여전히 좋아한다. 도시에서 돌아와 숲과 더불어 사는 나는 오동나무에 꽃 피고, 곧이어 아카시나무에 꽃이 피면 이제 여름이 시작되는 때임을 알아챈다. 뒤따라 이팝나무에 한가득 꽃이 필 것도 안다. 제비나비가 각별히 사랑하는 자귀나무에 꽃이 그득히 피었다가 지면, 얼마 enl 뒷마당 한쪽 화단에서 꿀벌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능소화와 무궁화가 오래토록 피고 질 것이다. 너른 잎으로 숲의 경계지대를 더듬으며 사는 칡덩굴은 이즈음 드디어 연보라색 꽃을 송이송이 피우고, 풍부한 꿀 향기를 너울너울 풍길 것이다. 그 즈음 우리 땅 위로 걱정스러운 장마가 스친다. 이 무렵 숲은 더없이 울울창창해져 명실상부 한여름임을 알린다.
한여름이 되면 숲 밖에 사는 동물 대부분은 헉헉댄다. 두꺼운 털옷을 원망도 없이 입고 혓바닥을 최대한 길게 뽑은 상태로 가쁘게 숨을 헐떡이는 이웃집 개를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다. 일찍이 숲을 떠나온 우리도 선풍기나 에어컨을 끼고 이 시절의 무더위를 견디지 않는가? 꿀벌들의 한여름도 숨 가쁘기는 마찬가지, 벌들도 연신 날개에 물을 적셔 제집(벌통)으로 퍼 나른다. 날개에 적신 물을 벌통 내부의 벽에 뿌리고 기화열을 이용해 그 좁은 공간의 내부 온도를 낮추려고 몸부림하는 계절이 바로 한여름이다.
왜 여름에 가장 많은 꽃이 필까?
사람들에게 “사계절 중 어느 계절에 가장 많은 꽃이 필까요?”라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봄!”이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대답하는 까닭은 아마도 그들의 기억과 경험 때문일 것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중첩의 시간, 우리 산천은 아직 무채색이다. 봄꽃은 그 무채색의 산천을 배경으로 도드라져 피고, 사람들은 그 화사한 봄꽃을 각별하고 반갑게 마주한다. 그 마주함의 기억은 강렬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뻗쳐 그때 주로 꽃구경을 떠나본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종종 기억과 다르다. 연구자의 집계에 따르면 봄에 피는 꽃은 전체 꽃의 대략 15% 정도에 불과하다. 가장 많은 꽃이 피는 계절은 오히려 초록으로 가득한 여름철이다. 여름에 피는 꽃이 전체의 대략 절반 정도를 차지한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달리 왜 가장 많은 꽃이 봄이 아닌 여름에 피는 걸까? 식물 입장에서 봄과 여름은 어떤 계절일지 생각해 보자.
만약 숲에서 나무나 풀이 자기 혼자서만, 혹은 듬성듬성 떨어져 타자로부터 아무런 간섭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아마 그 어느 계절보다 마음껏 자라고 또 꽃 피워 열매 맺기 좋을 계절은 여름일 것이다. 식물에게 여름은 거의 모든 조건에서 유리한 때다. 여름은 일조량과 강우량, 매개자 모두 가장 풍부한 때다. 기온 조건 역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리하다. 식물이 자라고 꽃 피고, 또 꽃가루받이를 하는 데 필요한 모든 환경적인 변수가 여름철에 가장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에 가장 많은 식물들이 꽃을 피운다.
이른 봄 눈 속에서 피는 꽃의 사연
하지만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앉은부채’와 ‘얼음새꽃’(‘복수초’를 일컫는 향명(鄕名))이라는 식물이 있다. 그들은 늦겨울, 혹은 초봄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운다. 그들 삶의 절정기는 겨울과 중첩된 이른 봄이다. 그러니까 낙엽 지운 뒤 누구도 잎사귀를 틔우지 않은, 무채색 가득한 숲에서 아직 더러 눈도 내리고 밤에는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는 조건 속에서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그들이라고 왜 환경 조건이 불리한 때 꽃을 피우고 싶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그들도 따뜻한 여름을 자신의 때로 삼고 싶을 것이다. 아마 비슷한 기온 조건에서 피어나는 ‘현호색’이나 ‘산괴불주머니’도 그럴 것이다. 꽃샘추위가 들이닥치곤 하는 이른 봄에 피는 개나리나 진달래도 아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 봄, 눈 속에서라도 꽃을 피워야 하는 존재들은 도대체 어떤 사연을 품고 있을까? 여름에 피는 것이 모든 조건에서 훨씬 유리할 텐데, 그들은 왜 하필 해의 길이가 짧고 날씨도 춥고, 그래서 움직이는 곤충과 벌레도 드문 시절에 삶을 시작하고 꽃을 피우는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이 뿌리박고 살아내야 할 곳인 숲이 결코 홀로 살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숲은 다양한 생물이 모여 생명 공동체를 이루는 공간이다. 숲의 형성에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하는 식물 역시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생(生)하고 극(剋)하는 관계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면서 자연스럽게 수직의 공간 구조를 형성한다. 지금 당신이 경험한 숲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 보라.
낮은 자리로부터 높은 공간까지 각각 어떤 식물이 살고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옮겨가면서 떠올려 보자. 숲의 가장 낮은 자리에는 누가 사는가? 맞다. 이끼나 키 작은 풀이 살고 있다. 그들 주변에 어떤 것들이 놓여있나? 나뭇가지, 물기를 머금거나 썩어가고 있는 낙엽…. 그보다 조금 높은 자리에는? 진달래나 쥐똥나무, 국수나무 같은 떨기나무(관목)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 위로는 신나무나 산사나무, 쪽동백, 때죽나무, 더 깊은 숲이라면 주목 같은 아교목(亞喬木)이 공간을 채우고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위쪽 공간으로는 층층나무나 산벚나무, 참나무나 팽나무, 혹은 소나무, 깊고 오래된 숲이라면 서어나무 같이 키 큰 교목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간다. 조림의 흔적이 있는 숲이라면 은사시나무나 일본잎갈나무(제주도의 경우 삼나무)처럼 교목 중에서도 더 높게 자라는 나무들이 최상층 공간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숲의 수직 공간에서 앞에 언급한 ‘앉은부채’나 ‘얼음새꽃’은 가장 낮은 자리를 부여받고 살아가는 풀이다. 풀 중에서도 아주 작은 편에 속하는 식물들이다. 새삼 기억할 것은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간다는 점이다. 하면서도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씨앗은 아무 데서나 발아하지 않는다는 사태다. 관련하여 자연 상태에서 이들이 태어날 수 있는 땅, 즉 그들의 서식지는 키 큰 나무들이 이미 먼저 살고 있는 공간이다. 즉 앞서 숲을 이룬 생명들의 낙엽과 나무껍질, 부러진 가지 같은 유기물이 숲 바닥으로 떨어져 어느 정도 양분을 머금게 된 토양이라야 비로소 그들의 씨앗이 발아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에서도 ‘앉은부채’는 ‘얼음새꽃’보다 습윤한 곳에서 발아하고, 얼음새꽃은 상대적으로 성글고 빛이 좀 더 드는 땅에서 발아한다. 이런 미세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는 앞서 숲을 차지한 식물들이 펼쳐낸 무위(無爲)의 공헌에 힘입어야만 태어날 수 있다. 이전에 척박했던 땅에 개척자처럼 먼저 태어나 이미 살고 죽은, 혹은 살고 있어 숲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식물 덕분에 이들은 태어날 수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이들은 앞선 존재들이 만들어 놓은 유기물이 어느 정도 있어야만 발아하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눈 덮인 숲. 사진 김용규 괴산여우숲생명학교장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우리는 삶에 관한 흥미로운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생명 모두는 덕분에 태어나고 자랄 수 있지만, 동시에 그들 때문에 극복해야 할 숙제를 안게 된다는 점이다. 조금 더 설명해 보겠다. 자신보다 먼저 상층부를 구성한 식물이 펼친 무위의 공헌으로 숲 바닥에 양분이 생겼고, 그 덕분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키 작은 존재들은 키 큰 존재들이 형성하고 있는 상층부의 울울한 수관(樹冠)이 방해 요소가 된다. 그 우거진 공간 아래에서 이제 빛을 포착하여 스스로 광합성을 하고 꽃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만 한다. ‘앉은부채’처럼 키 작은 그 존재가 되어 상상해 보라. 빛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얼마나 열악할지.
이러한 조건을 극복해 내기 위해 ‘앉은부채’와 ‘얼음새꽃’은 그 불리한 시절을 택해 생장하고 개화하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길을 개척해냈다. 이들이 삶의 절정으로 택한 시기는 기온과 일조량, 강우량과 매개자 조건 등이 모두 불리한 시절이다. 하지만 상층부의 식물은 그 불리한 조건 때문에 아직 잎을 내지 않았다. 따라서 그 불리함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부족한 빛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생의 관계가 빚은 극의 조건을 이겨내기 위한 자기 극복의 시간과 과정은 진화사적으로 매우 길고 험난했을 것이다. 추위로부터 자신을 견뎌내야 하는 숙제를 풀기 위해 그들은 우선 농도가 짙은 부동액으로 자신의 몸을 무장했다. 활동하는 매개자가 거의 없는 시절이라는 숙제도 풀어야 하는 그들은 자신이 피우는 꽃 내부의 온도를 바깥보다 높이는 비법을 개발했다.(대략 3~6℃ 정도) 겨울을 성충의 상태로 건너는 곤충과 벌레 중에 이 즈음 활동을 시작한 녀석들은 밤 추위를 지울 공간이 절실하다. 그들은 ‘앉은부채’와 ‘얼음새꽃’이 보내는 따뜻한 꽃 안으로의 초대가 너무도 반가워 기꺼이 찾아든다.
한편 강우량이 빈약한 시기, 물이라는 숙제는 어떻게 풀고 있을까? 자연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입춘이 지나면 빛의 온도가 서서히 높아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입춘 다음 찾아오는 절기는 북녘땅 대동강의 얼음도 녹인다는 절기인 우수(雨水), 하지만 그 전부터 이미 양지바른 땅의 눈은 녹기 시작한다. 이즈음이면 낮은 기온으로 얼어붙었던 숲 바닥도 약간의 쿠션감이 생기고 촉촉해지기 시작한다. 한낮에 낙엽 층을 걷어 내보면 아직 땅의 더 깊은 부분은 얼어있지만, 흙의 표면 부분에서는 조금씩 습기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몸집이 작은 풀인 ‘앉은부채’나 ‘얼음새꽃’은 뿌리 역시 깊지 않다. 반대로 몸집이 큰 상층부의 식물은 상대적으로 뿌리가 깊다. 깊은 곳의 흙은 아직 얼어 있어 물의 이동이 원활하지 않다. 그래서 자신의 줄기와 가지로 아직 물을 끌어올릴 수 없는 때지만, 저 작고 눈물겨운 존재들은 녹아내리는 눈의 물과 촉촉해지는 토양 겉 부분의 수분을 이용해 자신의 꽃을 피워낸다. 그렇게 저들이 온갖 결핍의 숙제를 넘어 결실을 맺고 난 뒤에야 숲의 상층부는 연초록의 잎으로 채워진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일찍 봄소식을 전하는 저 아름다운 생명의 특별한 사연이 이러하다.
눈 덮인 여우숲. 사진 김용규 괴산여우숲생명학교장
일음일양(一陰一陽). 어디에 오직 나를 생(生)하는 여건만 있고, 또 어디에 오직 나를 극(剋)하는 관계만 있으랴!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 날, 아직은 눈 쌓인 그 숲으로 찾아가 ‘앉은부채’를 마주한 날, 비슷하게 눈 맞으면서도 샛노란 제 빛깔 놓지 않고 피어있는 ‘얼음새꽃’을 만나면, 나는 그들을 한 통의 따뜻한 편지처럼 읽는다. 나만 힘들다고 믿는 이들에게 위로를 담아 보내는 이른 봄꽃의 편지 말이다. 이른 봄꽃이 보내는 글자 없는 편지를 더듬더듬 읽어본다.
“어쩌면 산다는 건 일생 자신에게 부여된 숙제를 푸는 과정이 아닐지,
저마다 그 숙제를 풀어 마침내 제 꽃을 피우라는 것이
생명을 부여한 신의 뜻 아닐지.”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