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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바다를 본 사람은 물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등록 2023-09-21 09:38수정 2023-09-21 09:39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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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개 없는 우물로 뭇 생명 살리는 뜻은

우물 정
우물 정

우물에 대한 추억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옛날 사람이다.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골 마을에는 아직 수도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마을 중간에 우물이 있었다. 할머니 댁 울 안에도 우물이 있었기 때문에, 동네 샘터로 물을 길으러 갈 일은 없었다. 그저 동네 아이들과 샘터에서 장난치며 놀던 일, 도르래로 물을 길어 올려 쌀도 씻고 빨래도 하시던 할머니 옆에서 나도 돕겠다며 훼방을 놓았던 일들이 아련하게 기억의 한 자락으로 남아있다. 이후 집집마다 펌프가 설치되고 수도가 들어오면서 우물은 다 사라졌지만, 우물에는 펌프와 수도가 대신할 수 없는 오랜 서사와 서정이 스며있다.

우물가에는 급히 먹다 체할세라 목마른 길손에게 버들잎 놓아 물바가지 내미는 지혜로운 소녀가 등장한다. 또 물 한 모금 청하는 나그네에게 그가 몰고 온 낙타들에게까지 물을 떠서 먹이는 엽렵한 아가씨도 등장한다. 예수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선포한 것 역시 우물가에서의 일이다. 불교에도 전생에 정성껏 복을 지은 이가 다시 태어나자 그 몸이 금빛으로 빛나며, 그 자리에 우물이 솟아났다는 설화가 있다. 급수공덕(汲水功德)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우물은 복 있는 이가 만인의 생명을 살리는 대표적 매개라 하겠다.

동북아시아에도 우물에 대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장대한 서사가 있으니, <주역>의 마흔여덟 번째 괘인 정괘(井卦), 곧 ‘우물’ 이야기이다.

우물, 잃음도 얻음도 없이 누구나 쓰는 물건

고을은 바꾸어도 우물은 바꿀 수 없다.

잃음도 없고 얻음도 없이

오고가는 이가 우물을 우물로 쓴다.

“개읍(改邑) 불개정(不改井)”, “마을은 바꾸어도 우물은 바꿀 수 없다” <주역> 정괘(井卦)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이 살기 위해 입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물’만큼 긴요한 것이 없다. 그러니 예전에 무리가 함께 살 마을을 정할 때나 도읍을 정할 때 물의 소재와 이로움을 먼저 찾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정이 생겨 주거지를 옮겨갈지라도 우물까지 가져갈 수는 없다. 우물은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곳에 누가 살든 누가 먹든 말이다. 많이 길어 먹는다고 줄지 않으며, 그저 두더라도 가득 차 넘치지 않는다. 그래서 우물은 잃고 얻음이 없이 그저 그 모습대로, 오고 가며 그를 찾는 이들의 소용이 된다. 이러한 우물의 공덕을 정괘에서는 “우물은 길러주되 다함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 물을 마시는 생명들을 길러주되 바닥나는 일 없이 그 덕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우물 정
우물 정

“우물은 길러주되 다함이 없다[井, 養而不窮也].”

그렇지만 누군가 그 물을 마시고자 한다면 그리로 와서 길어 먹어야 한다. 또한, 두레박을 위로 완전히 끌어올리지 못하거나, 아예 두레박을 깨버린다면 물은 먹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거절함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우물이지만 스스로 구하려는 노력 없이는 먹을 수 없는 법이다. <주역>의 산수(山水) 몽괘(蒙卦䷃)에 이와 유사한 교훈이 있다. 몽괘는 그 모양이 위는 산(☶)이고, 아래는 물(☵)이어서, 산 아래 샘이 솟는 모양이다. 몽(蒙)은 어리다, 어리석다는 뜻이다. 몽매함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발심하여 스승을 찾을 일이지, 남이 대신 깨우쳐 줄 수 없다는 것이 몽괘의 가르침이니, 목마른 자 스스로 물을 길어 먹어야 한다는 정괘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덮개 없는 우물로 서로의 삶을 기르고 돕는다

정괘(井卦)의 절정은 바로 맨 위 상효(上爻)에 있을 것이다. 우물의 공덕은 뭇 생명들이 위로 퍼 올린 그 물을 먹는 데 있다. 그러니 특정인만 먹을 수 있도록 우물의 뚜껑을 덮어서는 안 된다. 산속의 옹달샘, 흐르는 강물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마시는 자의 것이다. 이것이 샘을 파는 이가 명심해야 할 우물의 본질이다. 더함도 덜 함도 없이 뭇 생명을 길러 마지않는 우물의 덕성이야말로 사람이 배워야 할 교훈이 아닐까?

정괘 상효에서 ”미더움이 있어서 크게 길하다”라 한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미더움이 있다”는 ‘유부(有孚)’이고, “크게 길하다”는 ‘원길(元吉)’이다. 부(孚)는 어미 새가 발톱으로 알을 움켜쥐고 품어서 새끼가 잘 부화하도록 지키고 있는 모습이며, 원길(元吉)은 일반적인 길함을 넘어 크게 선하고 길하다는 뜻이다. ‘으뜸’의 뜻인 원(元)은 <주역>에서 생명을 살리는 어진 덕성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건괘(乾卦)에서 “원은 선(善)가운데 으뜸이다”라고 하였듯이, 덮개 없는 우물은 그렇게 뭇 생명을 살리는 사업을 “크게 이루기에” 원길(元吉)이라고 <주역>은 말한다.

이러한 정괘의 도리가 정치를 만나 이루어진 제도가 바로 정전법(井田法)이다. 고대의 이상적 세법이라 일컫는 정전법의 ‘정(井)’자는 바로 우물에 둘러친 격자 모양인 井에서 그 의미를 취한 것이다. 정전법은 여덟 가구가 토지를 균등하게 9등분하여 각자 1분씩 취하고, 그 나머지 1분을 여덟 가구가 공동경작해 세금을 납부하는 방식이다. 이는 균평(均平)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우물이 품은 평등한 생명 살림과 무궁하게 베풀어 기르는 뜻이 조세법으로 이어지고 있음이 흥미롭다. 정괘에서는 “군자가 정(井)의 모습을 본받아 백성을 위로하며 서로 돕기를 권면한다.”라 하였으니, 정전법이 그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정괘를 통해 정치를 논평하였던 조선 중후기의 학자 김도(金濤, 1580~1646)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우물은 인민을 기르기 위한 것이다. 마을의 가운데 하나의 큰 우물이 있으면 사람들이 의지해 길러져 생활하지 않음이 없으니 우물의 쓰임새가 어찌 크지 않겠는가! … 군자가 그 형상을 본받아 백성을 위로하고 돕기를 권면하여 서로 살리고 서로 기르는 도를 두게 하니 백성을 양육하는 바가 넓다고 할 수 있다. 후세에는 그렇지 못해 한갓 자신만을 기르고 백성을 기르는 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을 깎아 자기를 받들게 하여 나라도 따라서 망하니 애통하도다.”(<주역천설(周易淺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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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그릇 마시며 마음을 쉬어가는 샘터, 휴심정(休心井)

기독교 성경에 보면 유대인 예수가 사마리아 지역을 지나던 중 한 우물가에서 쉬면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하지 않는 사이였으므로 예수의 행보는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그 우물은 공동 조상인 야곱의 시대로부터 내려온 샘물이었으니, 할아버지의 샘터에서 물 한 바가지 청한들 어떠하랴. 문자대로라면 그 우물은 거의 2000년 동안 뒷사람들의 삶을 지켜온 셈이다. 그 유서 깊은 우물가에서 예수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며, 그 물은 그의 속에서 영원한 삶에 이르도록 솟구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 선언한다. 필자의 생각은 이러하다. 진리의 생명수는 지역과 족속, 옛날과 지금을 넘어 갈구하는 자의 목마름을 적셔주며, 그 소식이 마중물이 되어 그 멸하지 않는 샘의 원천이 내 안에서 터져서 솟아나기에 다시 목마르지 않은 것이다.

<맹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 이야기를 하기 어렵고, 성인의 문하에서 노닌 사람에게는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렵다.” 영혼을 휘어 감는 진리의 소식을 접했을 때의 감격을 바다를 처음 본 사람이 느낄 충격과 감동에 비유한 것이겠다.

17세기의 학자 이민구는 <지봉유설>을 지은 이수광의 아들이다. 그는 ‘구도장원공’으로 불린 율곡 이이 이후 처음으로 세 번이나 장원을 한 보기 드문 수재였다. 그는 어린 시절 바위 아래에서 물이 솟는 것을 보고, 동네 아이들을 불러다 같이 샘을 팠다. 그로부터 53년 뒤 그곳을 다시 지나게 된 이민구는 그 샘이 이미 고색창연한 우물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물을 길어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그 시절 손수 깊은 샘 새로 팠더니

세월이 이제 오십 해가 흘렀구나

돌샘의 시원한 물 여전히 줄지 않았건만

거기 비친 늙은이는 누구이던고 (<동주집>제18권)

생의 후반기 15년간을 유배지로 떠돌다가 돌아온 그가 이 우물을 다시 보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린 시절 발견한 샘의 원천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잘 만들어 놓은 우물이 반세기가 넘도록 청량한 물을 내어줄 줄을 그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그 우물은 그 후로도 오래오래 길손들의 목마름을 적셔주었으리라.

수 없는 길손들이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청량한 물 한 바가지 달게 마시며 쉬어가는 이 휴심정(休心井)의 샘터가 오래오래 남아있기를, 그래서 내 안의 샘의 원천이 솟구칠 마중물 한 그릇을 내어주는 덮개 없는 우물로 길이 남기를 축원해 마지않는다.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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