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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쓴맛을 보고 나야 진정한 단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다

등록 2021-02-02 08:24수정 2021-02-02 08:25

불편당 일기17: 씀바귀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산마다 붉은 진달래꽃 벙글고 멀리 산능선 아래로 연분홍 산벚꽃 흐드러질 때면, 오래된 그리움이 꽃향기에 실려 온다. 그리움의 중심엔 흰 수건 머리에 두르고 봄나물 뜯던 어머니가 계시다. 댕댕이바구니 허리에 끼고 들판을 헤집고 다니시는 어머니 뒤를 졸졸 따라가던 빡빡머리 새파란 아홉 살 소년도 있다.

지금도 봄이 오면 그리운 시간의 수레바퀴를 자주 거꾸로 돌려보게 된다. 보릿고개라는 절대 가난이 삶을 무겁게 옥죄었던 시절. 돌아보면 무지근한 시절이었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맘이 불쑥불쑥 샘솟는 건 무엇 때문일까. 과거 어느 때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나 오늘 우리의 삶이 질적으로 더 궁핍하다고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농의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는, 봄철엔 식구들 입에 들어갈 양식을 들판에서 봄나물 뜯는 것으로 해결했다. 논밭두렁으로 댕댕이바구니 들고 나가면 먹을 것이 흔하디흔하게 널려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 뒤를 따라가다가 물었다.

“엄마, 오늘은 뭘 뜯을 거예요.”

“응, 오늘은 냉이도 뜯고 씀바귀도 캐야지.”

“냉이만 뜯어가요. 씀바귀는 너무 써서 싫어요.”

그 무렵 나는 어머니가 뜯어다 자주 쑤어준 씀바귀 죽에 잔뜩 질린 터였다. 먹을거리가 궁한 시절이니 씀바귀 죽을 마지못해 먹긴 했지만, 나는 쓰지 않고 맛이 담백한 된장으로 끓인 냉이 죽을 더 좋아했다. 어머니는 씀바귀를 캐다가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알았어, 오늘 저녁엔 너 좋아하는 냉이국 끓여줄게. 그런데 너 토끼가 가장 좋아하는 풀이 뭔지 아니?”

“토끼풀이죠 뭐.”

어머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토끼풀도 좋아하지만 씀바귀를 더 좋아한단다. 씀바귀는 토끼의 쌀밥인 셈이지.”

“정말요?”

“그렇단다. 토끼는 새끼를 가지거나 병에 걸리면 씀바귀를 뜯어먹고 스스로 병을 치료하지. 우리는 토끼 같은 동물에게 배워야 한단다. 우리가 봄철에 씀바귀를 먹으면 뱃속이 따뜻해져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게 되지. 또 식중독에 걸리거나 배탈도 나지 않는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음식으로 가족의 병든 몸을 치유하는 의사였다. 우리 조상들은 병을 고치는 의사로 세 부류가 있다고 했다. 그 중의 으뜸은 마음을 다스려 병을 고치는 심의(心醫), 그 다음은 음식으로 병을 고치는 식의(食醫), 마지막으론 약으로 병을 고치는 약의(藥醫). 오늘날 사람들은 의사라고 하면 약의밖에 모르지만, 사실 약의는 식의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음식으로 병을 다스리는 ‘식의’였던 셈. 어머니는 봄철엔 주로 쓴나물을 부지런히 뜯어 음식을 만들어 식구들의 섭생을 도왔다. 내 어린 시절엔 씀바귀 외에도 고들빼기, 민들레, 머위 같은 쓴맛이 강한 식물들을 많이 먹었다.

씀바귀. 사진 픽사베이
씀바귀. 사진 픽사베이

어머니는 몇 년 전 99세를 일기로 딴세상 분이 되셨는데, 그렇게 무병장수하실 수 있었던 건 평생 쓴맛 나는 음식을 즐기신 덕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즈음은 사람들이 너무 단맛 나는 음식만 좋아한다. 쓰고 떫은 것은 거의 먹지 않고 달콤한 것만 즐겨 먹는다. 마약만 중독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단맛도 중독성이 있다. 달콤한 것을 많이 먹을수록 맛에 대한 감수성이 무디어져서 더 달콤한 것을 찾게 된다. 단맛 나는 음식만 먹으면 다른 맛을 느끼는 감각이 퇴화하니까. 곧 쓴맛이나 신맛, 짠맛, 떫은 맛을 느끼는 기능은 퇴화하고 오직 단맛만 잘 느끼도록 식감이 발달한다는 것. 요즘 사람들이 단맛에 열광하는 건 TV의 숱한 먹방 프로그램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셰프의 먹방을 보면 그가 만드는 요리에는 설탕을 쏟아붓는다 싶을 정도로 많이 넣는다. 이처럼 단맛에 중독되면 정신은 쇠락하고 육신은 병으로 고통받는다.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음식의 맛은 다섯 가지다. 달고 맵고 쓰고 시고 떫은 맛. 이 다섯 가지 맛을 골고루 섭취해야 우리 몸의 장부(臟腑)가 평형을 이룬다. 한 가지 맛의 음식에만 꽂혀 편식하면 몸의 균형이 깨어져 온갖 질병을 피할 수 없다. 쓴맛을 싫어하고 단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온갖 질병에 취약하다. 특히 암, 당뇨병, 고혈압, 비만은 단맛만 즐겨 섭취하는 데서 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균형을 잃어버린 우리의 먹거리에 대해 깊이 관심하면서 나는 현대인들이 기피하는 쓴맛 나는 식물 중에 씀바귀를 유심히 살피게 되었다.

씀바귀는 국화과에 딸린 여러해살이풀. 키는 30-50센티미터쯤 자라고 초여름에 노랑색 꽃을 피우고 가을에 씨앗이 여문다. 씀바귀와 닮은 식물인 고들빼기는 두해살이풀이지만 씀바귀는 수십 년을 살 수 있다. 뿌리가 옆으로 뻗어 나가면서 싹이 나서 번식하는데, 더러 수백 포기나 수천 포기가 빽빽하게 군락을 이루면서 자라기도 한다. 다년생 초본인 씀바귀는 땅속으로 뻗어 나가는 식물의 땅속줄기인 근경(根莖)이나 종자로 번식한다.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하며 산야에서 저절로 나서 자란다.

씀바귀는 종류가 많아서 세계적으로 100여 종이 넘고, 우리나라에도 갯씀바귀, 벋음씀바귀, 좀씀바귀, 흰씀바귀, 냇씀바귀, 꽃씀바귀, 노란씀바귀 등 10여 종류가 있다. 어느 종류나 뛰어난 약성이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뿌리가 얼기설기 길게 뻗어나가는 벋음씀바귀가 약효가 제일 좋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뜯었던 씀바귀의 종류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내가 사는 마을의 논두렁에서 많이 자라는 씀바귀는 주로 노랑색 꽃이 피는 벋음씀바귀다.

씀바귀는 지역에 따라 쌈배나물, 씀바기, 쓴귀물, 싸랑부리, 꽃씀바귀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특히 나귀채(那貴菜)라는 이름이 씀바귀의 생태적 특성을 잘 드러내는 것 같아 나는 이 이름을 좋아한다. 한자로 어찌 나(那)에 귀할 귀(貴), 나물 채(菜)로 쓴다. ‘어찌하여 이렇게 귀한 나물인가?’라는 뜻. 우리 조상들이 씀바귀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면 이런 이름을 붙였겠는가. 온 산과 들에 흔하게 널려 있는 데다가 쓴맛이 강해서 잘 먹지도 않는 씀바귀를 가장 귀한 나물이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씀바귀는 내 어린 시절처럼 끼니를 때울 수 있는 식재료로서도 가치가 있지만, 병을 치료하는 약성 또한 뛰어난 식물이다. 씀바귀의 대표적 효능을 하나 꼽으라면, 암 예방 및 치료에 관한 효능을 꼽을 수 있다. 암세포 증식과 관련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씀바귀는 암세포 증식률을 최소 60%에서 최대 87%까지 억제한다고 한다. 씀바귀는 여기에 더해 정상 세포는 최대한 보호하고, 암세포만을 억제해 더 높은 효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이는 씀바귀에 들어 있는 알리파틱이란 성분 때문인데, 이 성분은 면역력을 높이고 암세포의 증식을 억제하는 효능이 있다.

씀바귀무침. 사진 고진하
씀바귀무침. 사진 고진하

씀바귀는 숱한 염증성 질환에도 매우 좋은 치료약으로 쓰여왔다. 염증 치료약으로 씀바귀를 따라올 식물이 없다. 또 씀바귀에 들어 있는 쓴맛을 내는 물질은 위장의 기능을 튼튼하게 하고, 입맛을 좋게 하며, 식중독이나 급성 위염이나 급성 장염에 효과가 아주 좋다. 이 쓴맛이 나는 성분은 진정제 효과가 있어 마음을 침착하고 편안하게 하므로 불면증을 없애고 숙면에 들도록 해준다. 그러니까 쓴맛 나는 식물을 섭취하면 영성(靈性)의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씀바귀는 생명력과 면역력이 매우 강한 풀이다. 겨울철에도 죽지 않고 푸른 잎이 살아 있다.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고 벌레도 먹지 않으며 강한 생명력으로 오래 산다. 이처럼 수명이 긴 식물을 먹으면 사람도 장수한다. 추운 겨울에도 들길을 걷다 보면 씀바귀는 푸른 잎을 뽐내며 혹한을 이겨내는 걸 볼 수 있다. 이처럼 섭씨 영하 20도 이하의 매서운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는 식물은 대체로 성질이 따뜻하다. 민들레, 보리, 밀, 인동(忍冬)처럼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식물들은 모두 성질이 따뜻하다. 우리 몸에 이로운 약초를 알아내는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몸이 차가워져서 생긴 병을 고치려면 성질이 따뜻한 약초를 먹으면 된다. 그러니까 성질이 따뜻한 씀바귀를 먹으면 우리 몸도 따뜻해진다. 몸이 따뜻해지면 병에 대한 면역력도 활성화된다.

또 씀바귀는 노화 방지의 효능도 있다. 씀바귀에는 활성산소를 제거해주는 시나로사이드라는 성분이 들어 있는데, 이 성분은 피부의 노화를 억제하고 성인병 예방을 도와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처럼 소중한 약초가 천덕꾸러기 잡초로 취급되는 걸 보면 얼마나 안타까운지!

우리 집에서는 씀바귀가 어릴 때 뿌리까지 캐어 나물로 많이 먹는다. 날것으로 요리해 먹기도 하고 살짝 끓는 물에 데쳐서 고추장이나 된장으로 무쳐 먹기도 한다. 이른 봄에 돋아나는 어린 씀바귀는 별로 쓰지 않아 우려내지 않아도 먹을 수 있다. 씀바귀로 김치도 담아 먹는데, 쌉쌀한 맛과 독특한 풍미가 입맛을 돋운다. 씀바귀는 "외갓집 문지방이 높아야 잘 먹을 수 있다"는 속담이 전해져 올 만큼 우리 조상들이 귀하게 여긴 나물이다. 씀바귀의 뛰어난 약성에 매료된 우리는 봄철에 씀바귀를 뜯어다가 깨끗이 씻어 말려서 환을 만들어 두고 우리 식구들도 먹고 이웃의 아픈 이들에게도 나누어 준다. 해독력이 탁월한 쥐눈이콩 가루도 섞어서 환을 만드는데, 환의 약성을 더 높일 수 있다.

쓴맛이 강한 씀바귀로 만든 음식이나 환약을 먹다 보면, 중국의 『시경』에서 읽은 사자성어가 떠오른다. 근도여이(菫荼如飴). 이 네 글자의 의미는 쓴맛을 보고 나야 인생의 단맛을 알 수 있다는 것. 힘들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사람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의 아픔을 쓰디쓴 씀바귀에 빗댄 시구인데, 그런 여인의 아픔에 비하면 씀바귀는 오히려 달다는 것. 하여간 이 사자성어를 곱씹다 보면,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속담도 절로 포개진다. 단맛에 취해 입맛을 잃고 건강마저 잃어버린 이는 감미(甘味)를 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병든 몸을 살리고 영혼도 살리는 쌉싸름한 쓴맛의 부름에 기꺼이 응해보자. 댕댕이바구니 없으면 비닐봉지라도 하나 챙겨 들고 어슬렁어슬렁 봄의 들판으로 나가보자. 초등학교 때 부르던 ‘봄맞이 가자’는 동요를 흥얼거리며!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너도나도 바구니 옆에 끼고서

달래 냉이 씀바귀 나물 캐오자

종달이도 높이 떠 노래 부르네

글 고진하 목사 시인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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