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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벗님글방

식물도 말귀를 다 알아듣는다

등록 2021-03-05 10:49수정 2021-03-05 10:50

불편당 일기 19: 우슬(牛膝)

사진 픽사베이
사진 픽사베이

추수가 막바지이지만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댄다고 한가한 틈이 별로 없다. 콩 타작을 끝낸 나는 배낭 하나 둘러메고 산으로 향했다. 해마다 하는 일이지만 이맘때면 서둘러 약초를 캐야 한다. 때를 놓쳐 한파가 몰아닥치면 땅이 얼어붙어 약초를 캘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을 둘레길을 걸어 올라가다가 개울을 건너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불이 난 듯 붉게 타오르던 산자락의 단풍잎도 거의 떨어졌다. 참나무 군락을 지나는데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산뽕나무, 옻나무, 가래나무 등 활엽수들을 지나 평평한 산길로 접어드는데, 나무들이 없는 밋밋한 산자락에 내가 캐려는 약초가 눈에 들어왔다. 잎은 다 떨어지고 붉은 줄기만 남은 우슬(牛膝)들.

나는 배낭을 벗어놓고 괭이와 호미를 이용해 우슬 뿌리를 캐기 시작했다. 가을 가뭄이 심했지만 축축한 습지라 땅은 괭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잔뿌리가 잘려나가지 않도록 괭이로 겉흙을 긁어낸 후 호미로 속흙을 살살 걷어내며 우슬 뿌리를 뽑아 올렸다. 그렇게 한참을 캐고 있는데, 누가 휘파람을 불며 산길을 내려왔다.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니 우리 뒷집에 사는 마을의 이장. 어깨에는 바지랑대라도 하려는 듯 생나무 장대를 메고 있었다. 이장은 날 보더니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성님, 무얼 캐구 계시유?”

나보다 몇 살 아래인 이장은 나를 성님이라 부른다. 마을 토박이인 이장은 내가 귀농인으로 마을에 정착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내가 뽑은 우슬 뿌리 하나를 들고 보여주자 그가 다시 물었다.

“이게 무슨 뿌리여유?”

“허허 참, 시골에 살면서 이것두 모른단 말인가? 아우네 돌담 밑에두 있던데....”

“그래유? 이게 약촌가유?”

“무릎 병에 아주 잘 듣는 약초지. 우슬이라 부르는데 순 우리 말로 쇠무릎이라고도 해.”

우슬
우슬

무릎 병에 좋은 약초라고 하자 이장은 솔깃한지 내가 캔 뿌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우리 집사람두 무릎이 아파 병원에 다니는데…”

“아, 그래? 꾸득꾸득 마르면 좀 나눠줄게.“

”그런에 이걸 어떻게 약으로 써유?“

내가 우슬을 약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한참 설명해주자 이장은 고맙다며 먼저 산길을 내려갔다. 사실 우슬은 우리 집 뒤란에도, 마을의 논두렁 가에도 많이 자생한다. 하지만 야생에서 자란 우슬이 약성이 더 좋다. 전문 약초꾼들이 왜 길도 없는 산속을 헤매며 사람의 자취가 드문 산에서 약초를 캐겠는가. 산삼이나 지치, 산더덕 같은 귀한 약초도 그렇지만 흔한 약초도 사람의 소리, 사람의 냄새, 사람의 기운, 사람이 만든 문명과 절연된 야생에서 자란 것일수록 약효가 더 좋기 때문이다.

식물들은 인가 가까이 있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아니,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그렇다. 흔히 사람들은 식물을 무생물처럼 취급하기 때문에 식물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알지 못한다. 식물은 사람보다 스트레스에 더 민감하다. 특히 인위적인 소리를 아주 싫어한다. 기계 소리, 짐승들 우는 소리, 사람들이 모여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는 식물의 성장에 해롭다.

채소를 키우는 비닐하우스나 과수농장에 음악을 들려주면 수확량이 좋아진다는 말이 있긴 하다. 그래서 식물을 빨리 자라게 하려고 예전에는 논밭에 가서 꽹과리를 치고 징을 울리기도 했고, 요즘에는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는 농부들도 있다. 그러나 식물이 그런 인공적이고 시끄러운 소리를 좋아할 리가 있겠는가. 음악을 들려주면 식물이 빨리 자라는 것은 틀림없다. 그 이유는 음악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하여 식물 세포가 빨리 분열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포가 서둘러 분열해 죽기 전에 식물이 자손을 남기는 것.

우슬무침
우슬무침

그렇다면 농부들이 밭에 뿌리는 비료와 농약은 어떨까. 식물들은 당연히 비료와 농약을 좋아하지 않는다. 억지로 빨리 자라게 하니 그것 또한 식물들에겐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지 않겠는가. 식물들이 받는 스트레스와 공포는 그대로 식물의 몸에 축적되어 무서운 독이 된다. 이처럼 독이 쌓인 식물은 사람 몸에 이로운 먹거리가 될 수 없고, 약초로서의 가치도 떨어지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10년 넘게 야생의 풀들을 뜯어 먹으면서 사람 손길에 길들여지지 않은 식물이 좋은 약이 된다는 걸 겨우 터득했다.

오늘 산에서 뜯어온 우슬은 잘 씻어 말려두었다가 약으로 쓰려고 한다. 한자명인 우슬(牛膝)을 우리 말로 풀면 쇠무릎인데, 이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줄기의 마디에 있는 형상이 소의 무릎과 아주 흡사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우슬은 비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 식물. 이 식물은 다소 습기가 있는 곳에서 잘 자란다. 동아시아 일대에서 자생하고, 한국에서는 중부 이남의 산과 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데, 마을의 논밭가나 야산 자락에 많이 자란다. 우슬의 키 높이는 대략 50∼100cm이다. 줄기는 사각 기둥 모양으로 단단하고, 마디는 소의 무릎과 같이 타원형으로 둥글게 뭉쳐 있다. 잎은 마주나고 타원형 또는 달걀을 거꾸로 세운 듯한 모양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양끝이 좁고 털이 약간 있으며 잎자루가 있다.

8~9월경에 줄기 끝이나 잎겨드랑이에서 긴 수상꽃차례가 나오는데, 거기에 녹색의 작은 꽃들이 달린다. 꽃덮이조각과 수술은 5개씩이며, 수술대는 아랫부분이 합쳐져 있고, 각 수술대 사이에는 돌기가 도드라져 있다. 열매는 긴 타원형인데 도깨비바늘처럼 바짓가랑이 같은 데 잘 달라붙으며, 열매 속엔 씨가 1개씩 들어 있다. 우슬 뿌리 부위는 지름이 1㎝ 미만이나 길이는 40~100㎝에 이르고, 겉은 황회색 또는 회갈색을 띤다. 이 뿌리를 약으로 쓰려면 긴 잔뿌리가 잘려나가지 않도록 공들여 채취해야 한다.

우슬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잡초일 뿐이지만 한약재로도 쓰인다. 주로 뿌리를 말려서 쓴다. 앞서 우슬이란 명칭이 줄기의 형상이 소의 무릎을 닮아서 그렇게 붙였다고 했는데, 소의 무릎 형상을 지닌 식물이 특히 사람의 무릎 질환에 효능이 있다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식물의 형태를 잘 살피면 그 식물이 어떤 쓰임새를 지녔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조물주의 배려가 참 알뜰살뜰하지 않은가.

실제로 우슬 뿌리는 사포닌과 칼슘 같은 성분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관절염이나 류머티스성관절염, 타박으로 인한 염증을 치료하는 데 그 효과가 인정되고 있다. 또 허리와 다리가 무겁고 통증을 느끼며 때로 근육경련이 있을 때도 많이 활용된다.

우슬닭죽
우슬닭죽

신장이 좋지 않아 소변을 잘 보지 못하고 통증으로 시달리거나 피가 섞인 소변을 볼 때에도 우슬 뿌리를 쓴다. 고혈압에 두통, 어지러움 등의 증상이 있을 때도 우슬 뿌리를 이용하면 혈압을 하강시키면서 뇌혈관의 경련을 이완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면 우슬 뿌리를 음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까. 겨울이 되어 날씨가 춥고 무릎이 시리면 우리 집에서는 찹쌀에 닭다리와 우슬 뿌리를 넣고 닭죽을 끓여 먹는다. 또 소의 무릎 연골을 사다가 우슬 뿌리를 넣고 우슬도가니탕을 끓여 먹기도 한다. 이 음식은 칼슘이 많아 어린이와 임산부, 노인들에게도 권장할 만한 좋은 요리이다.

우슬 뿌리를 넣어 만드는 요리로 ‘우슬•새삼 식혜’도 있다. 이 요리는 전라북도 지역에서 많이 해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슬은 관절을 튼튼하게 하고 새삼이란 식물은 뼈를 튼튼하게 한다. 우슬만 가지고 담아도 되지만 뼈에 좋은 새삼을 더하면 약효가 상승된다. 잘 말린 우슬과 새삼에 물을 붓고 불린 후 엿기름을 넣고 끓인 다음 일반 식혜를 만들 때의 방식으로 하면 된다.

또 우슬이 어릴 때 연한 잎을 뜯어서 무침 요리를 할 수도 있다. 일명 ‘우슬 무침.’ 본래 맛이 좀 쓰고 시지만 어린잎에 된장을 넣어 요리하면 먹는 데 부담이 없다. 우슬은 오메가-3 지방산이 많기 때문에 이 요리는 혈관이나 심장을 튼튼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하여간 우슬은 잎이나 뿌리나 약성이 뛰어난데, 요리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야생초 요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흔한 우슬로 새로운 요리법을 개발해 널리 공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산에서 우슬을 채취해 온 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오전의 볕이 좋아 돌담 옆에서 우슬 뿌리를 멍석에 펴 널고 있었다. 그 순간 돌담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허리를 펴고 일어나 보니, 뒷집 이장 부인이 까치발을 한 채 돌담 너머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펴 널고 계신 게 우슬인가유?”

“요전에 산에서 캐 온 우슬 뿌리에요. 필요하시면 좀 드릴게요.”

“힘들게 캐셨을 텐데…”

“좀 넉넉히 캤어요. 필요한 분들이 있으면 나눌려구요.”

나눌려고 넉넉히 캤다는 말에 이장 부인의 얼굴이 달덩이처럼 환해졌다. 나는 곧 멍석에 있던 우슬 뿌리를 종이 박스에 담아 이장 부인에게 건네줬다.

“지금 당장 약으로 쓰실 수도 있지만, 급하시지 않으면 조금 더 말려서 쓰세요.”

“네, 약초 선생님 말씀대로 할게유.”

“선생은요? 아직 약초학교 초등생인 걸요.”

초등생이란 내 말이 우스웠던지 이장 부인이 한참 깔깔대고 웃었다. 약초를 건네주고 나니 마음이 흐뭇했다. 지구별에서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늘이 선물로 준 약초, 구하기 어렵지 않은 약초인데 몸이 아픈 이들과 공유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우슬 군락에서 그 뿌리를 캐오던 날, 나는 우슬들에게 으밀아밀 속삭였었다.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이!

“미안해. 필요한 만큼만 캐 갈게. 혼자 욕심부리지 않고 이웃에 아픈 이들 있으면 즐겁게 나눌 거야.”

어떤 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으리라. 그렇게 말하면 식물이 알아듣느냐고? 그렇다. 나는 알아듣는다고 믿는다. 아니, 이젠 안다. 식물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오랜 학습을 통해 터득한 지식이다. 이런 생태지식과 생명사랑은 본래 모든 인간이 지닌 천부적인 능력인데, 우리가 문명의 편리에 휘둘리며 대자연을 멀리한 결과 그런 천부적 능력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글 고진하 목사 시인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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