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경북 울진 산불 현장에서 구조된 개 ‘단비’. 마당개로 묶여 지내던 단비가 구조된 뒤 첫 봄을 맞았다.
‘단비’의 왼쪽 눈가에는 동그란 흉터가 있다. 얼핏 보면 귀여운 ‘바둑 무늬’ 같아 보이지만, 살짝 뭉개진 왼쪽 귀를 보면 단비에게 아픈 사연이 있음을 짐작게 한다.
단비는 지난해 3월 동해안을 휩쓴 대형산불 때 경북 울진에서 구조됐다. 당시 산불은 8박 9일간 강원 고성, 삼척, 강릉, 경북 울진에 일대의 산림 2만여㏊를 태웠고 이재민 181가구를 발생시켰다. 시설과 산림을 포함한 재산 피해액이 1천357억원에 달하는 재난이었다.
대형 재난에 삶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비인간동물도 마찬가지다. 사실은 더 참혹한 사정을 맞기도 한다. 울진에선 우사에서 탈출하지 못한 소가 갇혀 죽고, 수많은 벌이 연기에 질식해 죽고, 마당개로 살던 개들이 1m 목줄에 묶여 그 자리서 죽었다. 닭들은 불에 타 뼛조각만 남긴 채 발견됐다.
화재에 사망한 ‘작은 메리’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단비.
주민 4천여 명이 대피하고 있는 응급상황이었지만 단비도 튼튼한 쇠목줄에 묶여 도망가지 못하고 있었다. 열흘 넘게 이어진 산불에 카라 활동가들은 현장을 찾아 현장 지원 활동을 벌였다. 당시 보호자들은 단비를 ‘큰 메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단비 옆에는 ‘작은 메리’라고 불리던 개도 함께 묶여 있었다.
대피령이 떨어지자 보호자들은 집 안에서 기르던 푸들 종의 개는 함께 대피했지만 큰 메리와 작은 메리는 “옆집 흑염소를 물까 봐” 풀어주지 않았다. 작은 메리는 불길에 휩싸여 타죽었다. 단비는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을 나란히 묶여 살던 개가 죽는 과정을 온전히 지켜봐야 했다.
현장에서 단비와 만났을 때, 그 애는 눈이 불편한 듯 앞발로 연신 눈을 비비고 있었다. 화상도 문제였지만 이대로라면 2차 감염이 더 위험 상태였다. 활동가들은 보호자에게 개를 데려가 치료하고 좋은 집에 입양 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들은 아끼는 개라 안된다며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단비를 데리고 병원에 가거나 약을 타오지 않았다.
보호자들은 화상을 입은 단비를 병원에 데리고 가거나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다. 구조 전 잠깐의 산책길에 나선 단비.
활동가들이 어렵사리 “산책은 시켜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단비를 이끌고 산책길에 나섰다. 단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유롭게 냄새를 맡고 활동가와 눈을 맞추며 집 앞을 산책했다. 단비의 행동과 눈빛에선 영특함이 묻어났다.
불에 데면 뜨겁다. 연기를 들이켜면 숨쉬기 힘들다. 헤어짐은 슬프고, 죽음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우리에게 당연한 이 사실들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다르지 않다. 당연하게도 상처를 입은 개는 고통을 느끼고 친구의 죽음을 슬퍼한다.
산불 먼지에 까맣게 그을린 단비는 깨끗한 물을 주자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단비는 눈과 귀가 타 들어가는 화상을 입으며 죽어가는 작은 메리를 지켜봤을 것이다.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활동가에게 눈을 맞출 줄 아는 영리한 이 개는 목숨을 부지하고도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작은 메리의 사체 곁에 묶여 있었다.
활동가들은 단비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작은 메리의 장례를 치렀다. 작은 메리를 옭아맸던 나일론 목줄이 사체에 들러붙어 풀어줄 수 없었기에 우리는 목줄을 말뚝째 뽑아서 장례를 치러야 했다.
결과적으로 카라는 수많은 설득과 회유 끝에 단비의 소유권을 받아냈다. 산불이 난 땅에 단비가 내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또 단비의 삶에 반가운 봄비 같은 인연이 많이 깃들길 바라며 단비란 이름을 지었다. 단비의 화상은 구조 후 병원에 가서 털을 깎자 더 처참하게 드러났다.
화상으로 인해 살이 괴사되어 떨어졌고, 화재의 먼지가 뒤엉켜 어디가 상처고 어디가 때인지 구별하기 조차 쉽지 않았다. 진물을 닦아내고 소독하자 단비는 낑낑거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구조 뒤 화상을 입은 눈과 귀를 치료하기 위해 카라 동물병원으로 온 단비. 오랜기간 단비를 옭아맸던 목줄을 잘라줄 수 있었다.
단비가 구조된 지 꼬박 일 년이 지났다. 단비에겐 지울 수 없는 흉터가 남았지만 대형산불의 아픔과 공포는 모두 잊은 듯 정말 근사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단비를 보면 자연스럽게 작은 메리가 떠오른다. ‘마당개’라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짧은 줄에 묶여 죽어야 했던 개. 달리 말하자면 작은 메리는 푸들이 아니라서 죽었고, 믹스견이란 이유만으로 오해와 편견의 대상이 됐다.
다만 작은 메리의 죽음이 무지한 보호자들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동물의 생존을 오직 한 사람의 개인성에 기대야만 하는 상황, 누군가의 재산으로만 취급되며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되고 있는 이 불합리함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유난히 산불 소식이 잦은 봄이다. 4월 초 서울 인왕산 산불뿐 아니라 홍성과 대전, 함평에서도 화재가 이어졌다. 한편 얼마 전
강원도 강릉 난곡동 산불 현장에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전해졌다. 119 구조대원들이 묶인 개들의 목줄을 풀어주고, 주민들이 동물을 데리고 대피해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반려동물 재난 대응 매뉴얼이나 시민 대상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런 작은 변화들에서 희망을 본다.
어릴 때부터 짧은 목줄에 묶여 살아 가끔 친구들에게 신경질을 부리기도 하지만 보호소에서 다른 개와 잘 지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사람을 좋아하는 강아지’로 통하고 있는 3살 단비의 미소는 정말 근사하다.
재난은 동물들에게 더 고통스럽고 어려운 상황임을 알기에, 간절히 생존자 단비의 행복을 빌게 된다. 항상 신뢰할 수 있는 가족, 그 어떤 상황에서도 버리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유대를 맺을 존재가 생기길 기원한다. 작은 메리가 살아보지 못한 삶, 아직 단비도 살아보지 못한 반려견으로서의 삶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들로 가득할 것이다. 올봄에는 단비에게 입양의 행운이 깃들길, 세상의 모든 1m 시골개들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보호되며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빈다.
글 김나연 활동가, 사진 동물권행동 카라
◎ 단비 입양정보 더보기: https://ekara.org/kams/alliance/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