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김성호 한국성서대학교 교수가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에서 구조한 ‘래미’와 함께 음악을 듣고 있다.
“인간은 지구의 많은 것을 멸종시킵니다. 영화 ‘플래툰’에 나오는 살육의 현장이 일상과 뭐가 다를까 생각해봅니다. 음악을 들으며 성찰하고 반성할 수 있길 바랍니다.”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를 소개하며 김이곤 음악감독은 말했다. 이 곡은 영화 ‘플래툰’ 마지막 장면에 삽입된 곡이다. 그랜드 피아노와 첼로, 비올라가 그리는 선율이 서울시 노원구 중계동 104번지, 백사마을 전역에 울려 퍼졌다. 마을 어딘가에, 또는 산속 어딘가에 사는 누군가를 위한 음악이었다.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며 40여명의 관객은 고요히 음악에 빠져들었다.
영화를 찍다가…
지난 16일 늦은 오후, 가파른 비탈길 위에 서니 계단처럼 지어진 낮은 집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백사마을은 겨울이면 정치인, 연예인들이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와 봉사활동을 하고 간다.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다.
클래식 음악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서 ‘개와 고양이를 위한 104 콘서트’가 열렸다. 음악회를 떠올린 건 임진평 감독이다. 임 감독은 지난해 6월부터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집에서 묶어 기르는 개, 버려진 개, 길고양이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개와 고양이를 위한 시간’을 찍었다. 영화를 찍다가 개·고양이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서 클래식 음악회를 추진했다. 임 감독의 제안에 김이곤 음악감독, 안형수 기타리스트, 방기수 피아니스트, 구희령 첼리스트, 고형경 비올리스트가 뜻을 모았다. 영화는 내년 3월 개봉 예정이다.
“뭘 해줄까 생각을 했어요. 그러던 중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는데 이 마을에서 클래식 공연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개와 고양이들에게 위로가 됐을지는 잘 모르지만….”(임진평)
임 감독을 이곳으로 안내한 이는 김성호 한국성서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다. 김 교수는 동물보호단체 ‘카라’와 서울시 반려동물중성화센터사업단과 함께 지난해 5월 29일부터 6월 2일까지 백사마을 곳곳을 돌며 반려견 중성화수술 신청을 받았다. 재개발로 이주하는 주민들이 개를 버리고 가지 않도록 알리는 ‘들개 예방 프로젝트’였다. 개 42마리, 고양이 4마리가 중성화수술을 하고 동물등록을 했다.
슈돌이는 사람을 좋아한다. 봉사자들은 슈돌이가 사람에게서 버려졌기 때문에 사람 품을 더 그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였지만 관객들의 집중도는 높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람이 살기 힘든 마을에서 동물은 권리를 말할 수 없었다. 도시의 다른 개들처럼 귀한 사료를 먹이고 따뜻한 방을 내어주는 반려문화는 찾을 수 없다. 마을에 사는 개 대부분이 쇠사슬 목줄에 묶인 채 집 마당을 지키고 있는 경비견 역할을 했다. 좁은 공간만 밟고, 계속 새끼를 낳고, 남은 음식물을 먹으며 산다. 식용견으로 팔려가기도 한다.
900여 가구 중에 빈집이 절반인데, 사람이 떠나고 남은 집에 목줄을 한 채 버려져 굶고 있는 개들도 있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마을에 ‘동행 104’라는 쉼터를 만들고 마을 개와 길고양이를 돌보고 있다. 입양도 보낸다.
“사회가 책임져야죠. 버려졌다고, 막 키운다고 불쌍하게만 보지 말고 같은 생명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김성호)
“개는 사람과 같이 살 때 행복해하는 동물이라는 걸 알았어요.” (임진평)
사람 곁이 행복한 개들
이날 공연에는 ‘동행 104’에 사는 ‘슈돌이’와 ‘래미’, 관객들의 반려견들도 참석했다. 슈돌이는 지난해 마을을 떠돌다가 제 발로 쉼터로 왔다. 병원에 데려가니 왼쪽 뒷다리 인대가 끊어졌다고 했다. 그래도 잘 걷는다. 사람과 살았던 적이 있는지 사람 품을 그리워하는 순한 아이였다.
“떠도는 동안 사람에게 많이 당했겠지요. 여기가 안전한지 알고 찾아온 거예요.” (‘동행 104’ 운영·김현주(54)씨)
래미는 어느 집 연탄창고에서 구조됐다. 새까맣게 재를 뒤집어쓴 모습에 사람들은 래미가 검둥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씻겨보니 검정 점이 박힌 흰색 강아지였다. 래미는 쉼터에 와서 새끼도 낳았고, 곧 입양을 간다. 슈돌이와 래미는 공연 내내 한 번도 짖지 않았다.
“음악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모든 생명을 위로”하는 힘이 있다. 이날 공연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의 마음 속 동물을 떠올렸다.
“사람들이 개나 고양이를 특별하다고 의식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를 인정해주면 좋겠어요.” (안형수)
“기르던 고양이(마리)가 죽었어요. 밤에 창밖을 보는 걸 좋아했는데, 마리가 들으면 좋아할 것 같아 드뷔시의 ‘달빛’을 연주했어요. (중략) 창작곡은 마리를 위해 써둔 거예요. 백사마을의 풍경과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방기수)
“2004년 곰팡이가 든 사료를 먹고 반려견 2마리가 죽었어요. 공연 내내 아이들이 생각났어요.” (교사 김현진(43)씨)
슈돌이와 래미가 음악을 듣는 동안 공연장 주변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찾아왔다. 마을에 사는 개·고양이, 주민들도 음악을 들었을까.
글·사진/최우리 기자
ecowoori@hani.co.kr
동행 104에서 구조한 개들. 입양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