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털갯지렁이의 사냥 모습. 깊은 굴속에 매복해 먹이를 노린다. 이번에 발견된 흔적은 왕털갯지렁이의 조상뻘 포식자가 낸 것으로 추정된다. 추티넌 모라 제공.
2000만년 전 남중국해 얕은 바다 밑에 살던 거대 바다 벌레의 집 흔적화석이 발견됐다. 길이 2m의 이 포식자는 대형 갯지렁이 형태로 바닥에 구멍을 뚫고 매복하다 지나가던 물고기를 날카로운 턱으로 사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팬 유옌 대만국립대 지질학자 등 국제 연구진은 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츠’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2000만년 된 바다 밑 매복 포식자의 집을 발견해 화석으로는 알 수 없던 고생태계를 파악했다”며 “매복 포식 절지동물의 생흔화석으로는 처음 발견된 것”이라고 밝혔다.
화석이 발견된 곳은 대만 북동부 해안의 예류 지질공원으로 깊이 2m, 폭 2∼3㎝의 굴 319개가 신생대 마이오세 2000만∼2200만년 전 사암층에 뚫려 있었다. 굴은 중간에 구부러진 ‘엘’ 자 형태였다.
왕털갯지렁이와 신생대 거대 바다 벌레의 사냥 과정. 엘 자로 굽은 굴에 매복해 먹이를 기다린다(a). 날카로운 턱으로 먹이를 사냥한다(b). 먹이를 굴속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굴 들머리가 훼손되고 점액으로 이를 수리하는 과정에서 주변 토양의 화학 조성이 바뀐다(c). 팬 외 (2021) ‘사이언티픽 리포츠’ 제공.
연구자들은 구멍의 형태와 주변 퇴적층의 화학 조성 등을 분석한 끝에 이 굴이 대서양 등에 서식하는 현생 왕털갯지렁이의 조상뻘인 포식자가 낸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갯지렁이는 최대 3m까지 자라며 바다 밑에 구멍을 파고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물고기나 조개를 강력한 턱으로 공격해 구멍 속에 끌어들여 잡아먹는다.
해저 포식자인 왕털갯지렁이가 머리를 내민 모습. 위 더듬이로 먹이를 감지하면 양쪽으로 벌린 아래 큰 턱으로 재빨리 움켜쥐고 굴속으로 끌어들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연구자들은 “굴 들머리에 깃털 모양의 자국이 남아있는데 이는 먹이가 포식자에 끌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남은 흔적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흥미롭게도 이 과정에서 손상된 굴을 수선했던 흔적도 발견됐다.
화석을 화학 분석했더니 굴 들머리 주변의 암석에서 다른 곳보다 철 함량이 높았다. 연구자들은 “포식자가 망가진 굴을 수선하기 위해 유기물이 풍부한 점액을 굴 표면에 발랐고, 이를 먹기 위해 이끌린 황 환원 미생물이 황화철을 퇴적시킨 결과”라고 해석했다.
사암층에 남은 왕털갯지렁이의 조상뻘인 거대 바다 벌레의 집 흔적화석. 그라나다 대 제공.
연구자들은 “몸이 부드러운 동물 자체의 화석은 남기 힘들다”며 “이 흔적화석은 포식자와 먹이 사이의 목숨을 건 투쟁의 기록을 담은 것으로 화석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옛 생태계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논문에 적었다.
인용 논문:
Scientific Reports, DOI: 10.1038/s41598-020-79311-0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