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바닥에 누워 독특한 곤충 썩는 냄새를 풍기는 그리스 고유종 쥐방울덩굴의 꽃 모양. 토마스 루프 외 (2021) ‘생태학과 진화 최전선’ 제공
식물이 꽃꿀과 꽃가루를 주면 그 대가로 곤충은 가루받이해 주는 식물과 곤충 사이의 오랜 공생이 늘 아름다운 건 아니다. 줄 것은 주지 않고 받을 것만 챙기는 속임수가 흔하다. 그런 식물이 꽃을 피우는 식물의 4∼6%나 된다.
난은 성적 속임수로 가루받이하는 대표적인 식물이다(▶
희귀 난의 ‘성적 기만’…성호르몬으로 하늘소 유혹해 생식). 그러나 난과 거리가 먼 다른 식물도 이런 전략을 편다.
세계 최대의 꽃을 피우는 동남아 열대우림의 라플레시아는 그런 유명한 예다. 최대 지름 1m 무게 10㎏에 이르는 이 기생식물의 꽃은 고기 썩는 냄새를 풍겨 파리를 불러모아 가루받이를 한다. 물론 고기를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포유류가 아닌 곤충이 죽어 풍기는 독특한 냄새로 곤충을 유혹하는 식물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썩은 고기 냄새를 풍겨 가루받이 매개곤충을 유인하는 세계 최대 꽃인 동남아의 라플레시아.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그리스에만 분포하는 쥐방울덩굴의 일종은 퀴퀴한 악취를 내 곤충을 유인한다. 이 식물의 꽃은 눈에 잘 띄지 않는 갈색일뿐더러 아주 특이한 자세로 핀다.
대부분의 쥐방울덩굴류는 꽃을 공중에 매단다. 그러나 이 식물의 꽃은 숲 바닥의 낙엽에 반쯤 묻혀있거나 돌 틈에 숨어 위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다. 꽃도 일반적인 수직 방향이 아닌 수평으로 누워있다.
토마스 루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대 식물생태학자 등 국제 연구진은 이 쥐방울덩굴 꽃이 왜 이런 독특한 형태를 하고 특이한 악취를 풍기게 됐는지 조사했다. 연구자들은 과학저널 ‘생태학 및 진화 최전선’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식물 가운데 처음으로 곤충 사체의 냄새를 화학적으로 흉내 낸 가루받이 전략을 이 식물이 채택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리스 고유종 쥐방울덩굴인 아리스토로키아 마크로스토마의 꽃은 땅바닥이나 낙엽에 반쯤 파묻히거나(A, B) 바위틈에 숨어(C) 돌을 들춰야 드러나기도 한다(D). 토마스 루프 외 (2021) ‘생태학과 진화 최전선’ 제공
교신저자인 스테판 되털 교수는 “이제까지는 꽃의 위치와 방향을 고려해 이 식물이 낙엽에 사는 개미 등에 의해 가루받이하는 것으로 알았다”며 “하지만 이번 연구로 매개동물이 벼룩파리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벼룩파리는 사체를 먹고 그곳에 알을 낳아 애벌레 먹이로 삼아 법의학에서 종종 주검이 있던 증거로 삼는 곤충이다.
그리스 쥐방울덩굴의 가루받이 곤충으로 밝혀진 벼룩파리의 일종. 찰스 레발렌, 위키미디어 코먼스 제공
쥐방울덩굴류에는 세계적으로 550종이 있는데 대부분 꽃의 형태가 색소폰 모양으로 독특하다. 이번에 곤충 사체 냄새를 풍기는 식물은 물론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쥐방울덩굴과 등칡도 그렇다.
매개곤충을 일시적으로 가두기 위한 정교한 얼개의 등칡 꽃. 우리나라의 쥐방울덩굴과 식물에는 쥐방울덩굴, 등칡, 족도리풀 등이 있다. 현진오, 국립생물자원관 제공
쥐방울덩굴류의 꽃이 복잡한 형태를 한 이유는 냄새에 이끌린 곤충을 일시적으로 가두어 가루받이를 강요하기 위해서이다. 꽃의 얼개는 곤충을 유인해 오래 잡아두다가 풀어놓을 수 있도록 정교하게 짜여있다.
밑으로 향한 꽃 들머리 벽에는 한 방향으로 털이 나 있어 곤충이 돌아 나올 수 없다. 작은 방에 도달하면 앞서 다른 꽃에서 딴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떨어뜨리게 된다. 곤충이 빠져나가려 애쓰는 사이 수술의 꽃가루가 방출되고 식물의 털이 시들어 곤충은 새 꽃가루를 묻힌 채 꽃을 탈출한다.
남미산 쥐방울덩굴 꽃의 구조. 일단 냄새에 이끌려 들어간 곤충은 가루받이를 모두 하고 나서야 탈출할 수 있는 얼개이다. 해럴드 수아레스-바론 외 (2015) ‘식물학 최전선’ 제공
연구자들이 이 식물의 악취를 정밀 분석한 결과 딱정벌레의 등껍질이 분해할 때 생기는 휘발성 물질을 확인했다. 이 물질은 척추동물의 사체나 배설물에는 없고 오직 죽은 딱정벌레에게서만 검출된다.
인용 논문:
Frontiers in Ecology and Evolution, DOI: 10.3389/fevo.2021.658441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