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애니멀피플 농장동물

‘채식할 권리’는 내 몫이고, 내 탓인가요?

등록 2019-12-16 13:40수정 2019-12-16 16:36

[애니멀피플] 혼자가 아니야: 나, 우리, 지구 그리고 비건 ⑪
육식이 지구를 위협하는 상황…영화감독 황윤이 말하는 ‘채식 급식권’
독립영화 감독이자 작가, 한 아이의 엄마인 황 감독은 지구 환경을 회복하고 인권, 동물권을 지키기 위해 채식 급식 선택권이 필수라 주장한다.
독립영화 감독이자 작가, 한 아이의 엄마인 황 감독은 지구 환경을 회복하고 인권, 동물권을 지키기 위해 채식 급식 선택권이 필수라 주장한다.

애피의 ‘저탄소 비건 식당’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2020년 1월16일 하루 동안 서울 해방촌에서 아주 특별한 비건 식당이 열립니다.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실천하는 비거니즘을 위해, 여러 비건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체험하는 식당입니다.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 텀블벅 펀딩 바로가기: https://tumblbug.com/animalpeople_vegan

11월21일 전북 지역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황윤 감독은 며칠째 쓰던 긴 편지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전국 각지로 달려가는 강연 일정과 인터뷰, 신문 칼럼 마감, 영화 작업 사이에 점심도 거른 채 쓴 편지였다. “교육감님께”로 시작하는 편지의 수신처는 아들 도영이가 다니는 학교의 관할 교육청 교육감이다. 장장 13장의 편지에서 그는 구구절절 채식 급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_______
망해가는 지구를 구할 골든타임

황 감독은 그동안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2015)와 책 ‘사랑할까 먹을까’(2019) 등에서 꾸준히 육식주의의 문제와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짚어왔다. 그는 “엄마로서, 영화감독이며 작가로서, 그리고 지구가 망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시민으로서, (채식 급식 선택권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무턱대고 보낸 편지는 아니었다.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채식단체연대와 함께 전국 진보 교육감 후보들에게 ‘주 1회 채식 급식 제도화 및 채식 급식 선택권’을 골자로 질의서를 보냈다. 긍정적 답변을 받았다. 선거가 끝나고 다시 교육청을 찾아가 채식 급식과 관련한 정책 제안을 했다. 여러 계절을 기다렸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었다.

황윤 감독과 아들 도영은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촬영을 위해 돼지농장을 취재하며 “단절된 세계와 연결됐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황윤 감독과 아들 도영은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 촬영을 위해 돼지농장을 취재하며 “단절된 세계와 연결됐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올여름, 교육감과 직접 소통해야겠다는 생각에 공장식 축산으로 인한 동물권 파괴와 기후 위기 문제를 다룬 자신의 책 ‘사랑할까 먹을까’를 보냈다. 지난 10월엔 교육감을 직접 찾아갔다. 그동안 학교에서 ‘밥 먹을 권리’를 존중받지 못했던 도영이도 내심 기대하며 학교까지 조퇴하고 따라나섰다. 하지만 현실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다. 절망스러웠다. 그날 황 감독이 쓰고 있던 편지는 마지막으로 부여잡을 풀 한 포기 같은 것이었다.

“교육감님, 공장식 축산으로 인한 막대한 환경오염과 동물착취, 기후재앙을 막기 위해 채식을 선택하는 청소년들이 늘고 있는데 학교 급식에서 육식을 강요 받고 이들의 신념과 행동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 시간이 없습니다. 기후재앙으로부터 우리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_______
매일 육식 급식, 이대로 괜찮은가요?

8년. 황 감독이 도영이의 도시락을 싼 시간이다. 도영이는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부터 초등학교에 다니는 지금까지, 매일 아침 도시락을 가지고 집을 나선다. 황 감독은 2010년 구제역 파동 이후, 공장식 축산의 진실을 들여다본 영화 ‘잡식가족의 딜레마’를 찍으며 공장식 축산 농장과 동물 복지 농장을 취재했다.

아들 도영은 때때로 동물 복지 농장 취재에 동행했다. 도영이는 당시 강원도 산골의 한 농장에서 만난 돼지 ‘돈수’를 여전히 기억한다. 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다가와 도영이가 건네는 볏짚과 야생초를 맛있게 씹어먹던 돈수와의 추억은 황 감독에게도, 도영에게도 삶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마트 육류 진열대에 단정하게 포장되어 놓여 있는 살코기 조각들이 사실은 농장에서 눈을 맞추고 쓰다듬던 돼지의 일부라는 걸 알게 됐다. 심지어 시중에 유통되는 고기의 대부분은 돈수가 살던 동물복지 농장 같은 곳이 아닌, 강제로 꼬리가 잘리고 어미 돼지는 감금틀에 갇히고 분변이 질퍽 되는 ‘공장’에서 길러진 돼지를 도축한 것이다. 아이는 그토록 좋아하던 돈가스를 마음으로부터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무튼 비건’의 김한민 작가가 말하듯 “단절됐던 세계가 연결된 것”이다.

동물권에 대한 관심에서 채식을 시작한 도영이에게 최근엔 채식의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도영이는 앞으로 자신이 살아갈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며 비건 지향을 하고 있다. 미래 세대인 어린이, 청소년에게 기후 위기는 생존이 걸린 다급한 문제다. (관련 기사▶▶ “지금 청소년은 ‘멸종위기 세대’…어른들은 뭐하는 거죠?”)

스웨덴 한 학교의 채식 급식 밥상. 위키미디어커먼스
스웨덴 한 학교의 채식 급식 밥상. 위키미디어커먼스
하지만 신념과 확신을 갖고 하는 행동임에도 부딪히는 현실의 벽은 너무 많고도 높다. “너는 왜 도시락 따로 싸와?” 같은 질문에는 수십번 같은 대답을 해야 한다. “고기 먹으면 죽어?” 같은 폭력적인 질문은 가시처럼 가슴에 박힌다. 급식실에서 매일 흘끔대는 눈길도 견뎌야 한다. 황 감독은 “악의나 비아냥이 아닌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한 질문과 눈빛이겠지만 그걸 감당해야 하는 아이는 벅찰 것”이라며 마음 아파했다.

채식 급식 선택권이 없는 도영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급식 식단표를 보면 꽁치구이, 새우낙지탕, 크림스파게티 등 우유, 육류, 생선, 계란 등 재료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포함돼 있다.

_______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황 감독은 아이의 선택을 지지하기 위해 아침마다 전쟁을 치른다. 타 지역에 출장을 다녀올 때면 시외버스에서 몸을 내려 새벽 1~2시에 자리에 누웠다 4~5시간 자고 일어나 부랴부랴 도시락을 싸곤 한다. 황 감독은 “다양한 음식을 먹이고 싶지만 채소볶음이나 두부, 버섯 볶음이 단골 반찬이다. 튀기거나 구운 건 먹을 때 눅눅해져 있을 테니 싸주지도 못하고, 어떤 음식은 여름에 상할 염려도 있어서 제한이 많다”며 한숨을 쉬었다.

“채식 요리는 채소 자체의 단맛과 고유의 맛을 살려 하면 정말 맛있다. 요리를 즐기는 편인데도 이게 매일 해야 하는 의무가 되고, 부당한 제도 때문에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저에게도 스트레스가 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인권문제로서의 채식 급식 선택권 △기후 위기와 아이들의 생존권 △사람의 건강과 환경에 미치는 육식 산업의 폐해 등을 꼽는다.

개인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실천은 채식 위주의 식단과 음식쓰레기 줄이기이다. 박미향 기자
개인이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실천은 채식 위주의 식단과 음식쓰레기 줄이기이다. 박미향 기자
세계인권의 날(12월10일)을 하루 앞둔 지난 9일(현지 시각),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 최고대표는 “기후 위기가 2차대전 이래 인권에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지난 4월 유엔이 발표한 ‘안전한 기후’ 보고서는 “지난 2005년~2015년 사이에는 기상 이변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70만 명이 사망하고, 140만 명이 다쳤으며 2300만 명이 집이나 재산을 잃었다”고 보고했다.

전문가들은 기후 위기 문제가 폭발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예측한다. 11월5일 전 세계 153개국 1만1258명의 과학자는 기후 비상 상태를 선언하며 긴급 행동을 촉구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하면, 우리가 지금처럼 탄소를 많이 배출하며 살다가는 해수면이 상승해 해안 도시가 물에 잠기고, 갯벌이 사라지고, 해양 생태계의 먹이 사슬이 무너질 것이라고 한다.

_______
육식의 폐해는 왜 가르치지 않는가

이는 호주 국립기후보건센터가 최근 예측한 “기후 변화로 인한 2050년 기후 난민 10억 명”에서 어느 누가 특별히 비켜나긴 어려울 것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난 10일(현지 시각)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기후행동네트워크 등이 발표한 ‘기후위기대응지수(CCPI) 2020’에 따르면 한국은 61개 국가 가운데 58위다. OECD 국가 가운데는 미국(61위)에 이은 최하위다.

기상청이 2012년 발표한 ‘한반도 기후 전망 보고서’도 기후 위기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2050년에 한국은 아열대 기후에 가깝게 변화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황 감독은 개인의 실천만으로는 앞으로 닥칠 파국을 막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한다. 거대 자본에 의해 굴러가는 공장식 축산 시스템을 중단시키기 어려운 것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게임 중독과 스마트폰 중독의 위험성에 대한 교육, 탄산음료나 가공식품의 유해성에 대해 교육은 하는데 육식의 폐해는 왜 아무도 가르치지 않냐”며 “어린이와 청소년의 신체, 정신 건강에 위협적인 요인들에 대해 학교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에서는 이미 단체 급식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프랑스는 11월1일부터 전국 모든 공립 유치원과 학교에서 주 1회 채식을 의무화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채식 기반 급식을 강화하는 법안을 만들었다. 미국 뉴욕의 모든 공립학교에서는 올가을부터 ‘고기 없는 월요일’을 시작했다. 뉴욕시 정부는 지난해 봄 브루클린 지역 15개 학교에서 이를 시범 운영한 뒤 반응이 좋아 시 전체로 확대했다고 밝혔다.

포르투갈에선 2017년 9월부터 공립학교를 넘어 대학, 병원, 수감시설 등 단체 급식이 이뤄지는 공공기관 식당에서 최소 하루 한 가지 이상의 채식 메뉴 제공을 법적으로 정했다. 독일은 군내 내 식단에 채식 선택이 포함되어 있다.

_______
‘1인1닭’하던 청년, 군대 채식 급식권 주장하는 이유

이에 따라 국내에서도 행동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11월12일에는 내년 초 입대를 앞둔 정태현씨 등 진정인 4명과 3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국내 내 채식 급식 선택권을 보장하라며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하고 기자 회견을 열었다. 태현씨를 비롯한 진정인 4명은 동물권, 건강, 환경 문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비건을 실천한다.

기자 회견에 앞선 지난 10월25일 애피와 만난 정태현씨는 “원래는 저도 ‘1인1닭’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농장동물이 어떻게 사육되고 도살되는지, 우유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알게 되면서 비건이 됐다”고 말했다.

한 초등학교의 12월 급식 식단표. 형광색은 육류 및 가금류가 포함된 것, 파란색은 생선, 연두색은 계란과 유제품이 포함된 음식이다.
한 초등학교의 12월 급식 식단표. 형광색은 육류 및 가금류가 포함된 것, 파란색은 생선, 연두색은 계란과 유제품이 포함된 음식이다.
2014년 한 강연에서 농장동물에 대한 진실을 들은 뒤, 그는 놀라운 심정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동안 믿어왔던, 돼지가 농장에서 행복하게 뛰어놀거나 젖소가 자연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우유를 나눠준다는 식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그의 마음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젖소가 우유를 생산하려면 인간이 강제로 임신시키고, 새끼 낳으면 바로 뺏고 그러는 걸 알게 된 거죠. 소젖은 송아지 것인데 인간은 무슨 권리로 그것을 약탈하는 거죠?” 이제껏 믿어온 세계 대신 괴로운 물음표가 그의 마음을 채웠다.

그는 비건을 실천하며 동물권 외에도 개인의 건강, 지구 환경 문제까지 관심이 확장되고 신념도 확고해졌지만 한편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 같았던, 쓸쓸하고 힘든”면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몇 달 전 입대 통지서를 받고는, 주어지는 것만 먹고 살아야 할 환경에서 생존권 자체가 걱정됐다.

한 군인이 훈련소 식단을 복기해 적어놓은 것을 토대로 먹을 수 있는 것과 아닌 것을 따져봤다. 그는 “28일간의 식단 가운데 1.6일은 굶어야 하고, 이틀은 반찬 한가지만, 13.6일은 쌀밥만, 8.6일은 쌀밥과 반찬 한 가지만 먹을 수 있겠더라”고 말했다.

_______
세상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황 감독은 정태현씨를 보며 자꾸만 앞으로 10년 후의 도영을 생각하게 되더라고 말했다. “지금이 (비건 도시락을 싼지) 8년째인데 유치원 3년,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만약 대학을 간다면 대학 4년, 그리고 군대… 이러면 20년이 넘는다. 20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기본권이 박탈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전문가들이 경고하는 앞으로 30년 후 기후 변화로 인한 재앙을 맞닥뜨리지 않길 간절한 마음으로 바란다. “기후 위기 때문에 청소년과 어린이는 어른이 망친 이 세계에서 멸종위기에 처해 있어요. 이번 세기 안에 파국이 올 텐데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한다고요? 아무것도 안 한다고요? 이건 아니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죠.”

이런 마음이 모인 덕분인지 세상이 꼼짝없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취재를 마친지 얼마 되지 않아 황윤 감독이 달뜬 목소리를 소식을 전해왔다. 도영이가 다니는 지역의 교육청에서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전북 교육청은 혁신학교부터 우선적으로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는 방안을 확인하고, 단위 학교들이 채식 선택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도록 권고하겠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2020년 1월부터 채식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내 식당의 식단을 개비하고, 영양교사, 영양사,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으는 절차를 이행할 계획이다.

애피의 ‘저탄소 비건 식당’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2020년 1월16일 하루 동안 서울 해방촌에서 아주 특별한 비건 식당이 열립니다.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실천하는 비거니즘을 위해, 여러 비건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체험하는 식당입니다.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 텀블벅 펀딩 바로가기: https://tumblbug.com/animalpeople_vegan

▶▶혼자가 아니야: 나, 우리, 지구 그리고 비건

신소윤 김지숙 기자 yoon@hani.co.kr

황윤 감독이 비건 메뉴로 저녁 식사를 마련하고 있다.
황윤 감독이 비건 메뉴로 저녁 식사를 마련하고 있다.
오마이갓, 쑥갓의 재발견_신소윤의 비거니즘 일기

황윤 감독과 인터뷰를 했던 11월21일. 계절이 겨울을 향해 본격적으로 달려가던 터라 해가 매일같이 짧아지고 있었다. 점심쯤 시작한 황 감독과의 인터뷰를 마치니 하늘은 온통 컴컴했다. 일을 마쳤단 생각이 들어서인지 갑작스레 허기가 졌다. 당시 비건 지향 한달 차, 비건 ‘쪼렙’(초보 레벨)인 나는 배가 무척 자주 고팠다. 고기보다 소화가 잘되는 채소와 곡류를 주식으로 하는데 뱃고래는 늘지 않아서인지 금세 허기가 졌다.

“서울 도착하면 한밤중일 텐데 저녁 먹고 가세요.” 황윤 감독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던 이유다. 괜찮다, 아니다 실랑이도 없이 홀린 듯 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비건 버거 어때요? 쌀가스를 얹어서…. 저도 쌀가스 버거는 처음 해보는데, 맛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황 감독이 냉장고에서 채소, 빵, 캐슈너트 따위를 주섬주섬 꺼냈다.

처음 하는 요리라길래 나도 옆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보조 역할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좀 도울...” 황 감독이 손을 휘저었다. “그냥 가만히 앉아 계세요.”

곧이곧대로 멀뚱히 앉아 있다 황 감독의 아들 도영이가 반려견 해리를 산책시키러 나간다길래 냉큼 따라나섰다. “한 15분만 산책하고 오세요.” 채소가 품 안에 가득한데 15분 만에 요리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니 황 감독이 눈치를 챈 듯 얘기했다. “후다닥하는 게 일상이어서요.”

산책을 나서기 전 흘끔 본 황 감독은 마치 주방을 장악한 셰프 같았다. 믹서기에 오일과 소금, 캐슈너트를 넣고 후루룩 갈아 샐러드드레싱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채소를 다듬고, 쌀가스를 튀기고 빵을 굽는 일을 동시에 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믿을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장작불 난로에 올려 데운 두툼한 바게트 위에 샐러드와 쌀가스, 케일, 쑥갓, 비건 치즈, 구운 버섯과 양파 등을 얹고 캐슈너트 소스를 뿌렸다. 빵을 버거처럼 겹치려니 너무 두꺼워서 우리는 오픈 샌드위치처럼 만들어 야무지게 베어먹었다. 아삭거리는 채소와 쌀가스의 바삭하고 쫄깃함, 캐슈너트 소스의 고소함과 샐러드의 새콤한 맛까지… 식감이며 맛 모두 풍성하고 조화로웠다.

고기가 없어도 풍성했던 밥상.
고기가 없어도 풍성했던 밥상.
체면 차릴 틈 없이 부지런히 빵을 깔고 채소와 소스를 얹어 먹었다. 허기가 채워지고 식탐이 잦아들었을 무렵 ‘아, 이 채소는 뭐지? 뭔가 익숙하긴 한데 왜 이렇게 미묘하고 특별한 맛을 내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은 쑥갓이었다. 매운탕에나 들어가는 줄 알았던 쑥갓은 고소하고 부드러운 캐슈너트 소스를 만나자 한층 고급스러운 맛을 냈다. 루콜라나 바질 같은, 알량하게 포장해 비싸게 파는 허브만큼이나 이날 메뉴에 매우 잘 어울렸다. 그날은 내가 태어나 생쑥갓을 가장 많이 먹은 날이었던 것 같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애니멀피플] 핫클릭

[웹툰] 내 반려견 냇길아, 너 집 지킬 줄은 아니? 1.

[웹툰] 내 반려견 냇길아, 너 집 지킬 줄은 아니?

이글캠으로 여과 없이 본다…흰머리수리 ‘부부의 세계’ 2.

이글캠으로 여과 없이 본다…흰머리수리 ‘부부의 세계’

사람 약 만드는데 왜 토끼를 쓰나요…“동물실험, 이미 대체 가능” 3.

사람 약 만드는데 왜 토끼를 쓰나요…“동물실험, 이미 대체 가능”

눈만 오면 펄쩍펄쩍 ‘개신나는’ 강아지들, 이유가 뭔가요? 4.

눈만 오면 펄쩍펄쩍 ‘개신나는’ 강아지들, 이유가 뭔가요?

뱀도 클리토리스 있다는 사실, 왜 이렇게 늦게 발견됐을까 5.

뱀도 클리토리스 있다는 사실, 왜 이렇게 늦게 발견됐을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