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루가는 내 영혼의 동물이야.’
누군가가 툭 던진 그 말이 내 안에 뿌리내리고 싹을 틔워, 마침내 내 영혼도 그 하얀 고래에게 잠식당했을 때. 나는 벨루가(흰고래)를 찾아 떠났다. 유리 속에 갇힌 안타까운 한국 벨루가들을 뒤로하고, 자유롭게 헤엄치는 흰 꼬리를 좇아 나선 그 길은 캐나다 북쪽 바다로 이어졌다.
북극에도 여름이 찾아온 7월의 어느 날. 허드슨 만과 처칠 강은 이미 흰 고래로 가득 차 있었다.
새하얀 북극 고래, 벨루가
북극해, 베링해, 그린란드와 캐나다, 러시아에 걸친 추운 바다에서 사는 하얀 고래. 북극 동물답게 온몸이 흰색이다. 북극 포식자들 - 북극곰과 범고래 - 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리라. 차가운 극지방에 특화된 지방층이 무려 체중의 40~50%에 달하고, 덕분에 오동통 귀여운 체형을 자랑한다. 툭 튀어나온 이마와 웃고 있는 듯한 얼굴은 벨루가의 트레이드마크다. 암컷이 약 4m, 수컷이 평균 약 5m로 고래치곤 중간 크기지만 결코 작은 몸집은 아니다. 실제 벨루가를 본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생각보다 크다!’니까. (다들 귀여운 얼굴에 속았다.)
호흡하러 수면 위로 올라온 벨루가. 피부 빛은 연한 회색을 띤다. 다니엘 라이티 제공
갓 태어났을 땐 다른 고래들처럼 짙은 회색빛을 띠다가, 자라면서 점점 흰색으로 변한다. 아무리 커도 회색이면 아직 열 살도 안 된 청소년인 것이다. 가끔 어른 벨루가도 연한 회색이나 노란빛을 띠는데, 탈피를 하면 다시 하얘진다. 매년 여름마다 강바닥 자갈에 몸을 문질러 도로 뽀얗게 단장하는 것이다.
매년 여름, 강을 찾는 벨루가
서식지와 특성에 따라 벨루가도 여러 개체군으로 나뉘지만, 여름이 오면 근처의 따뜻한 강어귀를 찾아가는 건 모든 벨루가의 공통적인 습성이다. 처칠 강에도 매년 여름이면 허드슨 베이 군의 수천 마리 벨루가가 모여들어 ‘물 반 고래 반’의 진풍경을 연출한다. 보통 10마리 내외의 소규모 집단을 꾸리는 벨루가들이 이 시기엔 사돈에 팔촌까지 전부 모여 잔치를 여는 것이다.
수심이 얕고 따뜻한 강어귀는 출산과 육아에 최적의 환경이다. 먹이도 많고, 포식자 범고래를 경계하기도 용이하다. ‘벨루가의 요람이자 유치원’쯤 될까? 그래서 처칠 강 안쪽은 여름마다 어미와 새끼 벨루가로 만실이다. 보통 2~3년에 한 마리를 낳고, 12~14개월의 임신 기간 후엔 2년 가까이 모유 수유를 한다.
꽁꽁 얼었던 허드슨 만이 녹는 6월이면, 둥둥 떠다니는 바다얼음들 사이로 하얀 물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7월에서 8월 말에는 무려 수천 마리 벨루가가 처칠 근처로 모여든다. 북극곰 시즌이 아닌데도 관광객들이 처칠을 찾는 이유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여름잠을 즐기는 북극곰도 해안가에 어슬렁대기 시작하니, 운이 좋으면 벨루가와 북극곰을 모두 볼 수 있다.
‘바다의 카나리아’ 벨루가와 노는 법
벨루가를 만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 큰 배 혹은 작은 배(조디악)를 타고 벨루가를 관찰하는 보트 투어, 벨루가 사이를 직접 누비는 카야킹과 패들 보딩, 아예 함께 수영하는 스노클링. 모두 장단점이 있다. 카약이나 스노클링은 벨루가와 함께 놀 수 있지만, 북극곰을 보러 접근할 수는 없다. 보트 투어를 하면 벨루가를 가까이 만나기 어려운 대신, 저 멀리 바위에서 쉬거나 수영하는 북극곰도 함께 볼 수 있다.
드디어 고대하던 첫 카약을 타던 날. ‘영혼의 동물’을 만나러 간다고 흥분한 내가 멋대로 움직이는 페달과 씨름하고 있을 때, 나란히 출발한 ‘잭’ 아저씨가 난데없이 플루트를 불기 시작했다. ‘바다의 카나리아’를 향한 초대였다.
벨루가는 청각이 고도로 발달했다. 다양한 소리를 활용해 정교한 의사소통과 사냥을 하는데, 새들의 지저귐 같기도 하고 외계인의 신호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성대가 아닌 비강(코안)에서 난다. 특이하게 볼록한 벨루가의 이마가 바로 이 음파를 내고 해석하는데 특화된 기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벨루가의 관심을 끌려고 온갖 소리를 낸다. 보트를 문질러 뽁뽁 소리를 내고, 휘파람을 불고, 플루트를 부는데, 과연 그 연주가 까다로운 벨루가의 귀에 만족스러워서 놀러와주는 건지, 화가 나서 쫓아오는 건지는 미지수다.
이 똑똑한 고래는 북극의 사교왕이다. 나무, 죽은 물고기 같은 소품이나 거품을 갖고 노는 건 물론이고, 사람과 노는 것도 좋아한다. 보트가 지나가면 보글대는 모터 거품을 쫓아오고, 카약이나 패들 보드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주변을 맴돈다. 수면 가까이 둥둥 떠서 고개만 쓱 돌려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보고 있자면, 대체 누가 누굴 구경하는 건지!
“나랑 놀자!”
심지어 머리로 카약을 쿵쿵 들이받거나, 일부러 물을 뿜어대거나, 갑자기 솟구쳐서 사람들이 놀라는 걸 즐기는 녀석들도 있다. 내가 본 최고 악동은, 미꾸라지처럼 카약 잘 타는 친구를 졸졸 쫓아오다 갑자기 튀어 올라 냅다 꼬리로 뺨을 후려친 녀석이었다. 귀신한테 맞은 듯한 조쉬의 그 표정이란!
장난치고 사라지는 벨루가 꼬리. 다니엘 라이티 제공
‘벨루가’는 처칠의 여름을 상징한다.
긴 겨울이 가고 고래가 찾아오면 관광객들도 찾아오고, 마을에는 활기가 돈다. 여러 투어 상품들은 벨루가와 야생 생태계를 보존하는 전제로 운영된다. 처칠 사람들은 국제적 멸종위기종인 벨루가, 북극곰을 포함한 북극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고 그 안에서 공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자연을 살리는 게 인간 또한 사는 길이라는 걸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지난해 4월, 제2 롯데월드에 있던 벨루가 한 마리가 죽었다.
저 먼 러시아 바다에서 잡혀 와 채 청소년이 되기도 전에 죽은 벨로. 심해 잠수 챔피언인 벨루가가 다이빙 한 번 마음 놓고 못 하는 수조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았을까. ‘바다의 카나리아’라는 소개 글이 붙은 수족관에선 과연 내가 처칠에서 들은 노래와 같은 소리가 울렸을까? 부디 한국에 있는 벨루가들도 진정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한다.
이태리 북극곰 마을 거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