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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인간과동물

인간과 범, 서로 닮은 두 존재의 만남

등록 2019-05-15 09:56수정 2019-11-11 12:46

[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10. 무치파창, 가노 모토노부, 가츠 쿄쿠슈, 유숙, 범
‘심곡쌍호(深谷雙虎)’(19세기)
‘심곡쌍호(深谷雙虎)’(19세기)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범의 출중함을 이렇게 묘사했다. “착하고도 성스럽고, 문채롭고도 싸움 잘하고, 인자롭고도 효성스럽고, 슬기롭고도 어질고, 엉큼스럽고도 날래고, 세차고도 사납기가 그야말로 천하에 대적할 자 없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모둠인 인간,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라 하면 위의 묘사에 능히 들어맞고도 남음이 있지 않을까. 범과 인간은 지구 동물사, 적어도 지구 포유동물사에 출현한, 자연의 위대한 두 작품들이었다. 바로 그렇기에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이 둘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인간은 범을 알아봤고, 범도 인간을 알아봤다.

무치파창의 호도(虎圖)
무치파창의 호도(虎圖)

범을 알아본 인간은 범을 화폭에 담아 인간 자신의 이상을 범의 형상에 투사했는데, 13세기 중국의 돌올한 승려 화가 무치파창(牧谿法常, 목계법상, Muqi Fachang, 1210?~1269?)의 범 그림(虎圖)들도 그런 그림에 속한다.

무치의 범 그림들은 로버트 베이트먼의 범 그림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그림들인데, 그림의 주인공이 실은 범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혜조 선사가 지리산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 살던 범들이 나와 인도를 했다는 기록(고운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에 나온다)을 잠시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범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높은 경지를 그려내는 데 곧잘 동원된 하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무치의 그림에 범과 대나무가 함께 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무치파창의 호도(虎圖)
무치파창의 호도(虎圖)

범과 인간의 만남이 필연이었다면, 둘의 충돌 또한 필연이었을까? 우리 조상들은 범을 ‘산군’이라 하여 높이 사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범을 모시고 살았던 건 아니다.

특히 조선시대에 이르러 사태가 돌변했다. 국가에서 농지 개간 정책을 실시하면서 범의 영토를 대대적으로 침범한 것이다. 하천을 막아 수리시설을 설치하는 식(천방, 川防)으로, 숲에 불을 질러 밭을 만드는 식(화전, 火田)으로 농지를 넓혀 나갔는데, 이런 농지 확대 과정 자체가 범의 수염 뿌리를 건드리는 과정이었다.

무치파창의 호도(虎圖)
무치파창의 호도(虎圖)

제 영토에 마구잡이로 들어와 습지대와 숲을 훼손하고, 자신이나 가족에게 상해를 입힌 인간들을, 산군이 가만 둘리 없었다. 이른바 호환(虎患, 범으로 인한 환란)은 그렇게 대거 발생했다.

하지만 호환은 인간의 언어일 뿐, 범의 입장에서 보면 인환(人患, 인간으로 인한 환란)이 초래한 당연지사였다. 농지확장은 호환을 확대했고, 빈번해진 호환은 더 빈번해진 포호(捕虎, 범을 포획함) 활동을 낳았다. 복수혈전(復讐血戰). 피의 포지티브 피드백(positive feedback) 원운동이 가동한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18세기 초에 이르면, 한반도에서 범의 개체 수는 급감한다. 1724년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호피 공납제를 폐지했는데, 포획 가능한 범의 개채수가 감소했음을 국가에서 공인한 것이다.(자세한 사항은 김동진, <조선의 생태환경사>를 참조)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고려 범(아무르 범에 속함)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해는 1924년이지만, 이들의 씨가 한반도에서 마른 건 고려 범에 눈이 벌개 진 일본 관군의 무자비한 포호 정책 때문이 아니었다. 1910년 이전에, 어쩌면 1724년 이전에 일부 고려 범들은, 조선 왕실의 등살에 밀려 다른 살 자리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을 것이다.

물론 제 나라 안에서는 범을 전혀 볼 수 없었던 일본인들에게는, 고려 범으로 상징되는 대륙의 범에 대한 모종의 판타지가 있었다. 이것이 일제 강점기 한반도에서 진행된 포호활동의 심리적 배경이었고 말이다.

가노 모토노부의 호도(虎圖)
가노 모토노부의 호도(虎圖)

사실 일인들에게 범은 상상 동물이나 매한가지였다. 눈에 보이지는 않고 사신들의 이야기로밖에는 접할 수밖에 없으니, 상상할 도리밖에. 가노 모토노부(狩野 元信, Kano Motonobu, 1477~1559), 가노 산라쿠(狩野 山i}, Kano Sanraku, 1559~1635), 가노 단유(狩野 探幽, Kano Tanyu, 1602~1674), 기요하라 유키노부(Kiyohara Yukinobu, 1643~1682) 등이 그린 범 그림들 일체가 현실감이 떨어지는 건, 바로 이런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앉아 있는 범’(1786)
‘앉아 있는 범’(1786)

일본인들의 범 그림은 그래서 대체로 보잘 것이 없지만, 18세기 작가 가츠 교쿠슈(Katsu Gyokushu, 1724~1789)의 작품 ‘앉아 있는 범’(1786)은 사뭇 결이 다르다. 앞발, 꼬리, 귀 같은 부위가 다소 엉성하게 처리되었지만, 범의 기상만은 잡아내겠다는 가상한 뜻은 보이니까.

가츠 교쿠슈가 ‘앉아 있는 범’을 그리던 시절(조선의 왕은 영조), 고려 반도에 살던 고려 범들은 대대적 생존 위기를 감지하고 북상을 감행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영·정조 이후에 활동한 조선 화가 유숙(劉淑, 1827~1873)의 작품 ‘심곡쌍호(深谷雙虎)’(19세기)는, 작가가 그런 의도로 그린 것은 아니겠지만, 어쩐지 내 눈에는 이러한 새로운 곤경에 처한 범의 처지를 그린 것으로만 여겨진다. 오갈 곳 없어진 범, 영토 잃은 범, 쫓기는 범.

가츠 교쿠슈(Katsu Gyokushu
가츠 교쿠슈(Katsu Gyokushu

조선인의, 일본인의 등살에 못 이겨 북으로, 북으로 이동해야 했던 고려 범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이들이 새로 찾은 거주지는 동북아 유일의 원시림인 시호테 알린(Sikhote-Alin)산맥 안의 산림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범의 후손들은 주로 이곳 그리고 중·러 국경 지대에 서식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서울대 이항 교수의 말이 맞다면, 이 지역에 사는 아무르 범 400~500마리가 고려 범의 후손이거나 고려 범과 동일한 아종의 범일 것이다.

시호테 알린(Sikhote-Alin)산맥
시호테 알린(Sikhote-Alin)산맥

하기야, 이 땅도 본디 발해의 땅이었으니, 여전히 고려 범들은 대(大) 고려의 품 안에서 잘 살고 있다고 안위하면 그만인 걸까? 그보다는 이렇게 구슬피 읊조려야 하지 않을까? 산천도 더는 의구(依舊)하지 않건만, 호걸(虎傑)마저 간 데 없구나.

우석영 <동물 미술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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