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를 인간에게 전파한 ‘죄’가 크니, 무해하든 아니든 박쥐라는 이유로 박멸해야 하는 걸까? 마치 인간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처럼. 게티이미지뱅크
거리 두기 2단계. 사실상 3단계 조치.
또다시 거리가 텅 비었고, 거리에 사람들이 오가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의 주머니도 휑하니 비어만 간다.
대체 왜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거지? 문득,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면 그리고 질문하는 사람이 호기심이 왕성한 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도 해볼 수 있지 싶다. 도대체 코로나바이러스는, 박쥐 따위는 왜 지구에 있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거지?
코로나바이러스는, 박쥐 따위는 왜 지구에 있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걸까. 게티이미지뱅크
생뚱맞은 질문이기도 하지만, 이해 못 할 질문도 아니다. 하지만 이 질문 앞에서 어떤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 걸까? 어느 바이러스, 어느 포유동물의 존재 이유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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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가 먼저 지구에 살고 있었다
‘BC(Before Corona) 시대’의 어느 해, 정확히는 2005년 봄, 시드니의 로얄 보태닉 가든(Royal Botanic Garden)을 거닐다가 나무 위에 줄지어 매달려 있는 박쥐 한 무리를 만난 적이 있다. 처음엔 십여 마리나 될까 싶었다. 그러나 곧이어 거의 백 마리에 육박하는 박쥐들이 키 큰 나무 한 그루를 온통 점령하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닥에는 그들의 똥이 즐비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로얄 보태닉 가든에 매달린 박쥐들. 게티이미지뱅크
시드니의 보태닉 가든은 오페라하우스와 인접한 곳으로, 다운타운과 거주지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박쥐들이 이렇게 인간의 거주지 가까이에 있어도 되나? 그 당시에는 하지 못했던 질문을, 코로나 시대에 나는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질문은 ‘박쥐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라는 우리의 질문에 한 걸음 더 다가서게 한다. 인간과 가까이 살아도 문제가 없는 박쥐가 있고, 그렇지 않은 박쥐가 있는 걸까?
우선, 박쥐는 전체 포유동물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그 수가 많다는 것부터 확인하고 가자. 이들은 종(species) 수도 어마어마해서 최소 1200종을 넘는데, 포유동물 가운데에서는 설치류를 제외하면 종 다양성 수준이 가장 높은 동물이기도 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쥐목 동물은 포유동물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목(order)에 속한다. 원숭이가 생기기 이전에, 호모 하빌리스가 출현하기 이전에, 박쥐가 먼저 지구에 살고 있었다. 박쥐의 지구에 인간이 뒤늦게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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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는 ‘비행 동물’
이것 말고도, 박쥐의 유별난 점이 세 가지 더 있다. 첫째, 이들이 ‘비행 동물’이라는 점이다. 날다람쥐 같은 동물도 날지 않느냐는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비행에 관한 한, 날다람쥐와 박쥐의 차이는 보행을 기준으로 본 침팬지와 인간의 차이와도 같다. 우리가 간헐적 직립보행 동물이 아니듯, 박쥐 역시 간헐적 비행 동물이 아니다. 박쥐들은 하룻밤에 수십 킬로미터를 이동하기도 하고, ‘이사’를 하느라 수백 킬로미터, 때로는 천 킬로미터 이상 장거리 비행을 감행하기도 한다.
박쥐는 ‘비행 동물’이다. 하룻밤에 수십킬로미터를 이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천킬로미터 이상 장거리 비행을 하기도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당연한 사태이지만, 박쥐들의 이동 행위는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들의 이합(離合)과 집산(集散)이 일어나는 생태적 무대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병원체들은 박쥐의 몸에 올라타기만 하면 아주 손쉽게 공간 이동을 할 수 있고, 그렇다는 것은 그만큼 다른 지역에 사는 다른 동물들의 몸속으로 옮겨갈 수 있는 여지가 커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박쥐는 소셜 네트워킹을 즐기는 동물이다. 펭귄처럼, 꿀벌이나 흰개미처럼, 가창오리나 민물도요처럼, 이들은 무리 지어 사는 삶을 선호한다. 한마디로 이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싫어한다. ‘사회적 가까이하기’에 능숙한 이들은 때로는 수백만 마리가 한 서식처에 밀식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시드니의 보태닉 가든에서 필자가 목격한 박쥐 무리는 상당히 규모가 작았던 셈이다. 종이 다른 녀석들도 한 자리에서 서로 어울리며 각자의 몸에 있는 병원체들을 교환한다고 한다.
첫 번째 특징과 두 번째 특징에서 이미 암시된 것이지만, 세 번째로 거론할 만한 박쥐의 특징은, 바로 이들이 바이러스가 가장 선호하는 숙주 동물이라는 것이다. 바이러스 입장에서 보면, 박쥐들이란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자기복제(번식)하기 쉬운 최적의 플랫폼인 셈이니, 어찌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진즉에 우리가 눈치챘어야 했지만, 이번 새천년은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동물인 박쥐와 함께 우리에게 왔다. 중국 광둥성의 한 동굴에 서식하는 동물인 관박쥐(horseshoe bat)의 몸속에서 살던 코로나바이러스인 ‘사스(SARS)’가 사향고양이의 몸을 타고 이동해 사람의 몸으로 이동한 것은 2003년 초의 일이었다.
2015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메르스(MERS)’ 코로나바이러스 역시 그 발원지는 박쥐였다. 이들은 박쥐에서 낙타로 서식지를 옮겼다가 다시 인체로 이동했다. 그리고 4년 뒤, 다른 지역에서 신종(이들은 계속 신종을 만들어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인체에 올라탔는데, 이들은 비행 능력 면에서 박쥐보다 인간이 월등히 더 뛰어나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인체와 함께 지구 곳곳으로 이동하는 쾌락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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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를 박멸하면 되는 걸까?
이렇듯, 코로나바이러스와 박쥐는 공동운명체이다. 그렇다면, 코로나 방역 대전을 치르고 있는 우리는 ‘적군의 기지’ 자체를, 즉 박쥐를 박멸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코로나19 발발 이후, 박쥐류를 박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이것은 필연의 결론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황은 그처럼 간단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최소 3000종이 넘는 코로나바이러스 중 일부만이 사람에게 감염병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최소 1200종의 박쥐 중에서 일부 종만이 우리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짐작컨대, 2005년 시드니의 한 공원에서 필자가 만났던 박쥐들 역시 사람에게는 전혀 무해한 녀석들이었을 것이다.
무해하든 아니든, 그들 역시 위험천만한 ‘박쥐 분자’이므로 박멸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감염병 전문가들은 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왔다. 이들에 따르면, 해결책은 박쥐와 인간 간의 생태적 완충지대를 마련하고 그 지대를 건드리지 않는 것, 그리고 박쥐의 서식지(주로는 숲)를 보호하고 그 안의 생물다양성을 풍요롭게 함으로써 바이러스의 개체 수나 행동 양식이 돌발적이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숲의 복원’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처럼 낭만적인 행동이 전혀 아니다. 숲을 훼손하는 자본의 운동에 제동을 걸고, 숲의 파괴로 인해 가능했던 우리의 소비양식을 바꾸는 어려운 일이다.)
박쥐. 브램의 동물의 삶(Brehm's Life of animals) 1895.
돌발적이었던 박쥐 공부의 결론.
박쥐는 <드라큘라>(1897년 브램 스토커 Bram Stoker가 쓴 소설)의 주인공일 수도 있지만, <배트맨>(1939년 밥 케인 Bob Kane과 빌 핑거 Bill Finger가 만든 만화책에 처음 등장)의 주인공일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 아티스트 마이크 벨(Mike Bell)이 그린 드라큘라와 배트맨을 우리는 모두(!) 사랑할 수 있다. 코로나를 탑재한 무시무시한 드라큘라라 하더라도, ‘거리 두기’만 잘 한다면 모두가 잘 살 수 있다! 우리의 적은, 진짜 드라큘라는 따로 있다. 박쥐들이 살던 대로 살지 못하도록 그들의 서식지를 계속 파괴했던 일부 인간들 말이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