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탄 마차(Coal Cars)(1822),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유음입마도’의 작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가 사망한 지 채 30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 프랑스에서는 장차 말(馬)을 즐겨 그리게 될 어떤 이가 태어난다. 33살의 나이로 단명하고 마나,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화풍을 연 한 사람으로 평가될 운명이었던 화가. 루브르 박물관 필수 관람 목록에 속하는 작품인 ‘메두사의 뗏목’(The Raft of Medusa)(1819)을 남긴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가 바로 그 사람이다.
제리코가 탐구한 주제는 한 마디로 ‘난파(難破)’였다. 그가 보기에 18세기 말, 19세기 초반의 시대는 문명의 세계를 일궈온 인간이 최대 위기를 맞이한 시점이었다.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고, 그 다음에 어떤 세계가 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옛 것의 난파(The Wreck of the Ole 97)(1943), 토마스 벤튼(Thomas Hart Benton, 1889~1975)
미국 화가 토마스 벤튼(Thomas Hart Benton, 1889~1975)은 ‘옛 것의 난파’(The Wreck of the Ole 97)(1943)라는 작품에서 구세계를 마차로, 신세계를 기차로 상징했는데, 제리코는 ‘난파’라는 자신의 주제를 ‘놀란 말’ 또는 ‘흥분한 말’의 형상으로 이어갔다. ‘대홍수 장면(Scene of Deluge)’(1820)에서도 ‘물에 빠진 말’이 곤경을 웅변했고, ‘폭풍우 속의 말’(Horse in the Storm)(1821)에 등장하는 ‘근심에 휩싸인 말’도 새로운 시대에 처한 낭만주의자들 자신에 대한 은유였다.
대홍수 장면(Scene of Deluge)(1820),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제리코가 왜 이 동물에 유독 집착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좌우간 그는 말 습작을 반복했고 좋은 말 그림도 그 가운데서 나왔지만, 그렇다고 그가 카스틸리오네처럼 이 동물을 순수하게 예찬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제리코의 말 그림은 서구 미술사에서는 귀한데, 말 그림을 남긴 대부분의 서구 화가들의 눈에 잡힌 말이 대개는 멍에를 쓴 말이었던 탓이다.
폭풍우 속의 말(Horse in the Storm)(1821),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그러나 그건 일편, 당연지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대라고 일컫는 시기부터 말은 인류의 전진(그것이 전진이었다면!)과 늘 함께 해온 동물이어서, 인간과 말은 하나의 풍경으로 인지되기 쉬웠으니 말이다.
약 4000년 전부터, 말은 전차를 모는 일종의 전사로 전쟁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적토마와 관운장은, 마렝고(marengo)와 나폴레옹 1세는, 전장에서 전혀 구분될 수 없었다. 또한 니콜라스 오토(Nikolaus Otto)가 4행정 내연기관을, 카를 벤츠(Karl Benz)가 2행정 내연기관을 발명하기 전까지 마차(馬車)는 최고의 교통수단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상류계급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지만.
민중에게 이 동물은 교통수단이기 이전에 고된 노동을 도와준 일종의 노동자였다. 싣고 옮기고, 갈고 끄는 데 마력(馬力)만 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인간과 말 사이에는 ‘교감’ 이전에 ‘채찍’이 있었다. 수 천 년 지속된 말의 수난. 말의 무저항. 그 묵묵함의 심연을, 나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해변의 어선(Fishing boat on the beach)(1882), 안톤 모브(Anthonij [Anton] Rudolf Mauve, 1838~1888)
네덜란드 화가 안톤 모브(Anthonij [Anton] Rudolf Mauve, 1838~1888)의 작품들은 이 심연을 묵상해보라고 우리에게 주문하는 듯하다. 빈센트 반 고흐의 친척이었고, 실제로 고흐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생각되는 이 목가풍의 화가는 제리코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다고, 여전히 옛날식으로(농경과 목축으로) 살아가는 시골 촌부를 담은 그림을 그려 보여주며, 우리에게 역설한다.
아니, 안톤 모브는 실은 근대라는 신세계에 아예 눈을 감은 인물이었다. ‘해변의 어선’(Fishing boat on the beach)(1882), ‘해변의 말과 수레’(Horse and cart on the beach)(1880)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노동할 뿐 표정이 없는 말의 침묵은, 근대에 등을 돌린 모브 자신의 침묵이 아니던가.
해변의 말과 수레(Horse and cart on the beach), 안톤 모브(Anthonij [Anton] Rudolf Mauve, 1838~1888)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감정이 전혀 없고 시대 또한 모르는, 그저 죽은 듯 사는 모브의 말보다는, 힘들어하고 걱정하고 놀라며, 근대라는 시대를 온 몸으로 살아내는, 살아 있는 것처럼 사는 제리코의 말에 훨씬 더 매료된다.
엡솜에서의 더비(Derby at Epsom)(1821),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제리코의 ‘석탄 마차’(Coal Cars)(1822)에 등장하는 석탄을 옮기는 말들, 그리고 ‘엡솜에서의 더비’(Derby at Epsom)(1821)에 나오는 경주하는 말들은, 화가 나 있거나 흥분해 있다. 한마디로 피가 끓고 있는 것이다. 일어나면 안 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고, 세상과 인간의 광기에 주목했던 이 영민한 프랑스 화가는 그 피 끓는 말들을 빌러 경고했던 것이다.
만일 제리코가 우리 시대의 화가였다면, 불과 며칠 전에 경마장을 누비던, 그러나 지금은 접시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말의 몸도, 필시 화폭에 옮겼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모브의 정신보다는 제리코의 정신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고, 우리 시대의 제리코를 나는 만나고 싶다.
우석영 <동물 미술관>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