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15. 반구대 암각화, 오스왈드 브리엘리, 일본과 고래
15. 반구대 암각화, 오스왈드 브리엘리, 일본과 고래
고래잡이를 그린 19세기 일본화. 작자 미상
경북 울진에서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 탁본
탐욕과 무지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고래잡이 1982년 이전까지는 지구인의 대부분이 이 동물에 대해 새카맣게 무지했고, 이 동물에 대한 적대행위를 그치지 않았다. 고래잡이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언제부터’인지는 알고 있다. 고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한국 경상북도의 어떤 강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국보 제 285호로 지정된 울진 반구대 암각화의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바위그림이 발견되자 전 세계가 놀랐다. 최소 7500년 전에는 인류가 고래잡이를 하고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해졌으니까. 그러니까 포경은 어느 섬나라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풍속이기도 했다. 정약전과 이청의 공동저작인 <자산어보>(1822)에 고래(경어鯨魚) 항목이 있다는 점을 봐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자산어보>에는 우리의 눈을 의심케 하는 문장이 등장한다. 저자들은 고래의 눈으로 잔을, 수염으로는 자를, 뼈로는 절구를 만든다고 쓰고 있다. 19세기에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포경을 산업화하면서 (식용만이 아니라) 다목적으로 고래가 활용되었다고 배웠지만, 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먼 동방의 어느 유생사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게다. 확실히 19세기는 고래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세기였다. 지난 3천만 년의 고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잔혹했던 백년이었다. 이전까지 고래는 잡아먹기 위해 잡는 동물이었지만, 이제는 그 기름으로 도시의 가로등을 밝혔다. 고래 기름은 윤활제, 비누, 마가린의 원재료로 쓰였다. 20세기 들어 플라스틱으로 만든 각종 재화를 당시엔 고래 뼈로 만들었다. 기름과 뼈가 필요하면 할수록, 포경선은 자주 출항했다. 수요의 증가는 생산의 증가로, (포경선의) 모험과 죽임의 증가를 낳았다. 19세기의 어느 골짜기에서, 허먼 멜빌이 <모비딕 또는 고래>(1851)를 쓰게 된 배경이다.
오스왈드 브리엘리(Oswald Brierly), ‘뉴싸우즈웨일즈, 투폴드 베이 근처의 고래잡이 어부’(Whalers off Twofold Bay, New South Wales,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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