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단백질=힘’이라는 편견들이 하나씩 깨지고 있다. 그 최전선이 스포츠 영역이다.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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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씨는 운동인들의 선생님이다. 그의 수업에는 전문 운동지도사들이 참석한다. 헬스장 트레이너, 필라테스 강사, 요가 강사, 재활전문 물리치료사들이 그의 제자다. 물리치료와 한방재활의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재활치료사지만, 여러 운동을 즐기는 운동인이기도 하다.
해군 장교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해양경찰특공대, 해양경찰학교에서 전술 체력 자문을 맡아 가르쳤다. 누군가를 교육하기 위해 본인도 여러 운동을 익혀야 했다. 중국 고유 전통 무술인 우슈, 역도와 체조 동작이 접목된 운동인 크로스핏, 관절 꺾기나 조르기로 상대를 제압하는 무술 주짓수 등이 그가 했던 운동이다. 요가와 필라테스를 가르치는 강사이기도 하다. 지금은 근골격계 질환 운동치료와 재활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몸마음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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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인 식단’을 포기한 이유?
11월12일 경기도 용인시 몸마음연구소에서 만난 이재준 대표는 한눈에 보기에도 건장했다. 이 대표는 스스로를 “채식에 편견이 있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육식을 너무 즐겨 부모님이 걱정할 정도였다. “3년 전에는 고기만 먹는 식단을 했었어요.” 몸과 운동, 건강에 관심이 많은 만큼 그도 여러 식단을 시도했었다.
2017년 8월 서울시 송파구 한 체육관 초청 강연에서 운동 자세를 선보이고 있는 이재준 대표. 몸마음연구소 제공
당시 그가 했던 팔레오 식단(Paleo Diet)은 흔히 ‘구석기인의 식단’이라 불린다. 대표적인 저탄수화물 고지방 식이요법이다. 동물성단백질의 섭취를 강조하는 반면, 곡물류 탄수화물 섭취를 제한한다. 가공된 식품을 피하고, 자연상태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는 것이 핵심이다.
유기농 채소, 방목해 키운 동물의 고기, 동물성 불포화 지방을 주로 먹고, 가공 유제품이나 감자, 콩, 현미 등 식물성 단백질과 탄수화물은 먹지 않는다. 암, 당뇨병, 심장질환 등 현대인이 겪는 질환이 없었던 구석기 시대 수렵채집인처럼 먹자는 게 이 식이요법의 주장이다.
단기간 효과는 있었다. 살은 빠졌다. 그러나 유지를 할 수 없었다. “이가 너무 아파요. 원래 치아가 약한데 고기 씹느라 잇몸이 아팠어요. 그 식단에서는 쌀을 먹으면 큰일 나는 것처럼 말하는데, 밥을 못 먹으니까 너무 괴롭더라고요.” 이 대표는 결국 팔레오 식단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후 ‘요요 현상’까지 겪었다. 85kg였던 몸무게가 94kg까지 불어났다.
이재준 대표는 “비건이 이렇게 맛있다는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족 모두 비건 지향을 하고 있는 이 대표는 집에서도 자연식물식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외식 때도 맛있는 비건 식당을 찾는다. 이재준 대표 제공
비건(vegan·완전 채식)도 처음엔 식이요법으로 접근했다. “건강과 운동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사람인데 식단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 자연식물식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자연식물식은 과일, 채소, 통곡물 등 자연에서 가져온 것들을 주식으로 하는 식사법이다. 동물성 식품은 전혀 섭취하지 않기 때문에 채식 가운데서도 비건에 속한다.
여러 해외 논문을 찾아 읽고, 국내 관련 강연을 쫓아다니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책 ‘맥두걸 박사의 자연식물식-살 안 찌고 사는 법’을 쓴 존 맥두걸 박사의 주장처럼 ‘많이 먹고 살 빼는 것’이 가능한지 궁금했다.
“저는 진짜 실험을 해보고 싶었던 거에요. 많이 잘 먹고 운동하면서, 지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는가? 그런데 정말 유지가 되더라구요.” 지난해 10월부터 비건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12kg이 빠졌다. 이후 몸무게는 큰 변동 없이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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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백질은 채소에도 충분하다
그래도 힘을 쓰려면 고기를 먹어야 하는 게 아닐까? 고기를 먹지 않으면 단백질을 어디서 얻느냐고 물었다. 그는 우리에게 되물었다. “우리가 먹는 동물들은 애초에 단백질을 어디서 얻었을까요?”
단백질은 애초 식물에서 왔다는 것이다. 코끼리, 하마, 황소, 기린 등 대형 초식동물들이 식물을 먹어 덩치를 유지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럴 법한 대답이었다. 이 대표는 “식물성 단백질로도 건강하게 근육을 성장 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맥두걸 박사의 다른 책 ‘어느 채식의사의 고백’은 고농도 동물성 단백질과 식물성 단백질에 대한 지난한 논란을 소개한다.
2017년 8월 서울시 송파구 한 체육관 초청 강연에서 운동 자세를 선보이고 있는 이재준 대표. 몸마음연구소 제공
‘고기를 먹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흔히 거론되는 것이 필수아미노산이다. 단백질은 서로 다른 아미노산 20개로 만들어진다. 이 가운데 8가지는 인간의 신체가 스스로 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으로 섭취해야 하며, 이를 필수아미노산이라고 한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필수아미노산 8가지는 동물성 단백질에만 있다고 믿어왔지만, 맥두걸 박사는 쌀과 채소를 통해서도 사람들은 매일 40~60g의 단백질을 얻을 수 있고, 식물성 단백질에도 필수아미노산이 모두 들어있다고 이야기 한다.
단백질 일일 섭취량도 오래된 논쟁 주제다. 고기와 유제품을 섭취하는 잡식을 하면 하루에 100~160g 정도의 단백질을 섭취한다. 채식에서 얻는 단백질량의 2~3배에 해당하는 양이다.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려면 하루에 얼마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할까.
2009년 95살로 세상을 떠난 그레이시 주짓수의 주창자 엘리오 그레이시(가운데)는 69년 동안 채식인이었다. BJJ Eastern Europe 갈무리
1904년 예일대 생리화학과 교수였던 러셀 헨리 치턴튼은 이 주제로 실험을 진행한다. 세 그룹으로 나눈 실험군은 6개월 동안 하루 평균 60g의 단백질을 섭취했다. 예일대 직원인 성인 남성 5명, 미 육군의무단 지원자 13명, 예일대 운동선수 8명이 실험대상이었다.
실험이 끝난 뒤 세 그룹의 건강은 모두 양호했다. 예일대 운동선수들은 심지어 운동 수행능력이 38%나 개선된 수치를 보이기도 했다. 고기 단백질을 포함한 잡식 때의 절반 이하에 불과한 단백질을 섭취해도 건강은 유지되거나 더 좋아진다는 뜻이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있다. 영화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캐머런이 제작에 참여한 ‘더 게임 체인저스’다. 다큐는 로마 검투사들 대다수가 채식주의자였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당시 엘리트 스포츠 선수였던 이들을 일컫던 말 ‘호르데아리’(Hordearii)는 콩과 보리를 먹는 사람이란 뜻이다.
다큐는 복서, 육상선수, 미식축구 선수, 역도선수 등 미국 내 비건 프로선수들을 인터뷰한다. 이들이 완전 채식을 택한 뒤 훨씬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모습은 ‘고기=단백질=힘’이란 선입견을 깨버린다.
400m와 800m가 주종목인 호주의 육상 선수 모건 미첼은 비건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게임체인져스>의 한 장면
주짓수를 수련했던 이재준 대표는 유에프시(UFC·종합격투기 대회) 파이터들을 예로 들었다. 유에프시는 미국에 브라질리언 주짓수(BJJ)를 전파한 그레이시 가문이 주짓수의 우수함을 알리기 위해 만든 대회다. ‘그레이시 주짓수’의 주창자 엘리오 그레이시는 채식주의자였다. 2009년 95살로 세상을 떠난 그는 약 70여년의 세월 동안 어떠한 육식도 하지 않았고, 그만의 철학과 비법을 ‘그레이시 다이어트’(Gracie Diet)로 후대에 남겼다.
“파이터들은 그레이시 가문이 채식한다는 걸 잘 알아요. 완전 채식은 아니지만, 자연식물식처럼 통곡물, 과일, 채소의 섭취를 강조하고 예외적으로 생선을 가끔 먹죠.”
실제로 그레이시 가문 사람들을 만났던 이 대표는 그들이 “거의 비건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450전 무패의 전설 힉슨 그레이시(엘리오의 아들)와 그의 아들 크론 그레이시도 채식인으로, 단계로 보자면 페스코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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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은 시너지…만능일 순 없어
그렇다고 이 대표가 ‘채식 만능주의’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이재준 대표는 주(主)와 부(副)를 헷갈리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근골격계 질환이 있는 사람에게 자꾸 마음의 문제라고 그러고, 내장 질환이 온 사람에게 운동으로 고치라고 하는 건 말이 안되잖아요.” 몸과 마음의 활력을 결정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다.
2016년 3월 비건 UFC 파이터 네이트 디아즈(오른쪽)는 UFC196에서 당시 웰터급 챔피언인 코너 맥그레거를 상대로 싸워 서브미션 KO승을 거뒀다. 유튜브 갈무리
그가 꼽은 라이프스타일의 3대 축은 운동, 심리, 영양이었다. 그는 비건식을 ‘시너지’라고 표현했다. 운동, 심리의 조절과 함께 해야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재활중이라면 비건을 통해 회복을 앞당길 수 있고, 스포츠 선수라면 채식을 통해 소화 부담을 줄일 수 있고, 내장기 질환 환자라면 비건식으로 혈액순환을 돕는다”고 그는 말했다.
애피 기자들도 은근히 그런 효과를 기대했다. 아침에는 커피로 머리를 깨우고, 점심엔 소화 시키느라 식곤증에 시달리고, 오후 서너시만 되면 있던 활력도 바닥나는 상황이었다. 비건 생활의 ‘효과’를 기대하는 마음이 무르익었다. 취재 과정에서 듣게 된 누군가의 이야기도 우리를 매혹시켰다. “4시간만 자고도 에너지가 치솟는다.” 더이상 20대가 아닌 우리로서는 솔깃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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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채식을 경험해야한다
뽀빠이가 시금치 챙겨 먹듯 열심히 챙겨먹었다. 밖에서 먹을 땐 비건 맛집과 비건 술집을 검색하고, 팀원들과 비건 도시락을 먹을 땐 식재료 공동구매에 열을 올렸다. 동물성 식품을 먹으면 그동안 공들여 온 ‘비건 효과’가 사라지는 것처럼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가공식품이더라도 채식이면 괜찮겠지란 생각에 콩까스, 채식만두, 채식라면을 마음껏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극적인 효과는 아직 없다. 체력이 치솟는 경험은 아직 4명의 기자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대표는 비건식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로 ‘보상 지연’을 꼽았다. 비건식에 따른 변화가 즉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식습관을 바꾼다고 해서 당장 혈압이 떨어지거나, 몸짱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신 그가 제안하는 ‘보상’은 따로 있었다.
“아주 맛있는 채식 식당에 가서 기쁜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해요. ‘이렇게 맛있는 거라면 나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겠죠. 내가 요리를 못 해서 형편없이 먹었을 뿐이지, 채식 자체가 맛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마음 속에 자리잡을 겁니다. 이런 생각 자체가 즉각적인 보상이죠. 이게 제가 쓰는 테크닉입니다.”
그런 종류의 즉각적 보상이라면 애피 기자들도 조금씩 경험하고 있다. 드라마틱하지는 않지만 소소한 만족을 주는 변화가 생겼다. 채식을 먹은 날 오후엔 덜 졸렸다. 잠자리가 편해져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조금 더 쉬워졌다. 앉아있는 시간이 대부분인데, 소화가 안 돼 더부룩한 느낌도 덜 해졌다. 화장실 가는 일이 더 뿌듯(?)해지는 경험을 한 기자도 생겨났다.
애피의 ‘저탄소 비건 식당’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2020년 1월 하루 동안 서울 해방촌에서 아주 특별한 비건 식당이 열립니다.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실천하는 비거니즘을 위해, 여러 비건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체험하는 식당입니다.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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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니야: 나, 우리, 지구 그리고 비건
김지숙 신소윤 기자 suoop@hani.co.kr
#4회에서는 비건 요리사 강하라-심채윤 부부가 전하는 맛있고 힙하고 ‘주체적’인 비건 생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물론 종종 술을 한잔씩 하기는 했다. 가장 최근의 혼술 안주는 비건 마라샹궈.
살 빠진 건 금주 때문이었나?!_김지숙의 비거니즘 일기
처음엔 비건생활이 그저 그랬다. 솔직히 숙제 같았다. 집에 가스레인지 불을 켜지 않은 지 어언 6개월째였다. 요리 안 하고 비건하기란, 새벽배송 앱에 의존한 ‘정크 비건’의 길이었다. 불량 비건 식생활이 확 뒤집힌 계기가 찾아왔다. 다큐멘터리 <더 게임 체인저스>였다.
10월22일 밤 ‘또’ 숙제하듯 넷플릭스를 켰다. 샌드백을 치는 근육질 복서, 트랙을 힘차게 달려나가는 육상선수, 산과 평야를 누비는 트레일러너의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동병상련의 제임스 윌크스가 이 영화의 내레이터였다. 그는 전방십자인대 파열로 인한 무릎 재활의 목적으로 비건이란 주제에 접근한다.
지난해 오른쪽 무릎에 같은 부상을 입은 나로서는 무척이나 궁금한 이야기였다. 과연 비건과 무릎 재활은 연관성이 있을까? 비건이 체내 염증 수치를 내리는 효과가 있다던데? 채식을 통해 다시 달릴 수만 있다면, 하루 여섯끼라도 먹을 수 있다!
그때부터 냉장고의 야채칸이 붐비기 시작했다. 쌈 채소와 애호박, 각종 버섯과 두부, 과일과 아보카도로 냉장고를 채웠다. 워낙 마시고 먹는 것을 좋아하는 팀 동료들의 비건 식생활에도 가속도가 붙으면서 덩달아 메뉴도 다양해졌다.
정확히 비건 지향 한 달이 되던 11월7일 내 몸무게는 -2kg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늘상 뻐근하던 무릎의 통증도 의식을 못 하고 있었다. 무게가 줄어드니 무릎에 가던 하중도 줄어든 것일까.
“살 좀 빠졌지?” 동료도 나의 변화를 눈치챈 것 같았다. 건강 때문에 시작한 비건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건강은 큰 관심사였다. 팀원들에게 나의 ‘성과’를 공유하며 뿌듯해하던 찰나, 박현철 팀장의 한마디에 확신이 흔들렸다. “채식하면서 술 좀 덜 먹는 것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 음주가 줄었다. 사실 술과 고기는 절친이다. 안주라는 놈들은 거의가 동물성이다. 그동안 나는 안주 먹으려고 술을 먹어왔었다.
반주를 즐기던 박 팀장뿐 아니라 신소윤 기자도 술을 먹는 횟수가 줄었다고 했다. 가설은 어느덧 정설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 중요했다. 몸무게가 줄었건, 술을 덜 마시게 됐건 나의 ‘게임’을 바꿀 계기가 된다면 비건은 충분히 지속해볼 만 한 생활 방식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