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기획 이후 즐거운 채식 식당 탐방이 시작됐다. 왼쪽부터 ‘부토’의 비트 사시미, ‘베이스이즈나이스’의 옥수수밥과 우엉·참나물국, ‘소식’의 버섯 요리.
애피의 ‘저탄소 비건 식당’으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2020년 1월 하루 동안 서울 해방촌에서 아주 특별한 비건 식당이 열립니다.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실천하는 비거니즘을 위해, 여러 비건들이 모여 이야기하고 체험하는 식당입니다.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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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대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편하게 허기를 때우고 최소한의 영향소만 섭취하면 된다는 쪽과 한 끼라도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화가 나는 쪽. 나는 후자다. 비건을 시작하며 들었던 걱정 중 하나는 갈 수 있는 식당의 선택지가 줄어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비거니즘은 식탐이 있는 자에게도 열린 세계였다. 아니, 새로운 세계였달까. 그동안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선택지가 등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비건이 식도락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비건은 사실 엄청난 음식 애호가야!” 비건 레스토랑 ‘소식’을 운영하는 안백린 셰프의 책 <고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에 쓴 말인데, 나는 여기에 마음 깊이 공감한다.
기획을 시작한 이후 회사 동료들과 함께 일터와 가까운 마포, 이태원 등지의 비건 레스토랑을 두루 섭렵했다. 일반 식당에서는 주인공 취급을 받지 못했던 재료들인 우엉, 연근, 당근, 참나물 따위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기획 초반이었던 10월21일 이태원의 ‘부토’라는 식당에서 신선한 경험을 했다. 누군가 이 식당의 핵심 메뉴가 ‘베지테리언 사시미’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비트를 참치회처럼 요리했다는 메뉴를 시켰다. 김, 와사비, 아보카도, 그리고 참치 뱃살인지 비트인지 구분하기 힘든 붉은 조각들이 나왔다. 참치회를 먹듯, 김 위에 비트를 한 조각 얹고 간장에 찍어먹었다.
자리에 앉은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동안 우리는 속아왔던 거야?” 익숙했던 참치회 맛의 8할이 김과 와사비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비트를 씹으며 분개했다. 물론 참치 본연의 감칠맛이 거기에 다 녹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은 2할을, 깊은 바다에 사는 그 크고 멋진 물고기를, 수많은 노동력을 투입해 잔혹하게 사냥해서 채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월29일 점심, 회사 동료와 함께 한 식사에서 또 한번 눈을 동그랗게 뜰 일이 생겼다. 마포역 인근의 채식 식당 ‘베이스이즈나이스’에서 내어준 맑은 국 한 그릇 때문이었다. 식당 주인은 “우엉을 우려낸 국물에 참나물로 향을 더한 국”이라고 설명했다. 별 생각 없이 국물을 한 입 떠 넣은 우리는 동시에 같은 말을 외쳤다. “우엉을 우려내 이 맛이 난다고요?!”
그리고 11월13일, 해방촌 ‘소식’에서 취재원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어릴 적 탐독했던 <미스터 초밥왕>에서 최고의 맛을 본 심사위원들이 머릿 속에서 폭죽을 터트리는 게 이런 기분이었을까. 작두콩, 호랑이콩, 능이버섯, 배추, 당근, 연근 같은 채소들이 이토록 다양한 맛을 낼 수 있다니! 진짜 버터보다 고소한 견과류로 만든 비건 버터는 어떤가. 죄책감이 들 정도로 감칠맛이 느껴지는 대체육 요리는 또 뭐란 말인가.
비건 가운데 자연에 좀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자연식물식, 생채식 등을 하기도 한다. 제철 재료를 최대한 가공하지 않고 섭취하는 방식이다. 나의 비건 미식 기행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하지만 땅에서 난 재료만으로 이렇게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책 ‘아무튼 비건’을 쓴 김한민 작가는 비건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여러 부류에 대해 썼다. 그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있다. “논리는 알겠는데, 어쨌든 육식이 맛있어서 못 관둬.” 나도 이쪽에 가까웠다.
동물뉴스팀에서 일하며, 그리고 비건 기획을 하며 덩어리 고기를 만지거나 생선 머리를 치는 일은 마음 깊이 꺼려졌다. 하지만 불판 위에서 고소하게 익어가는 고기 앞에서는 그 감각을 잊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기를 대신할,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선택지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알면,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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