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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피플 인간과동물

습지, 물과 숲이 만든 ‘잘 돌아가는 세계’

등록 2020-01-15 10:30수정 2020-01-31 09:53

[애니멀피플] 우석영의 동물+지구 미술관
26. 브루노 릴리예포슈, 습지와 물새와 여우
물가에 두루미가 있는 풍경, 1924, 브루노 릴리예포슈.
물가에 두루미가 있는 풍경, 1924, 브루노 릴리예포슈.
캐나다 화가 론 킹스우드(Ron Kingswood, 1959~)가 ‘습지의 신’이라 부른 동물인 두루미(학)가 야생의 땅에 신처럼 서 있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같은데, 그(녀)의 짝인 듯한 두루미가 저편에서 이편으로 날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화면의 중심부엔 강인지 호수인지 유유히 출렁이는 물이 보이고, 우리의 주인공은 그 주변에 미동도 없이 서 있다.

동아시아에서 두루미는 신적인 지위를 누렸다. 동양화 속 두루미는 언제나 ‘장수’나 ‘고고함’에 관한 알레고리였는데, 예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1920년대 유럽에서 그려진 이 그림에서 두루미는 그런 알레고리가 전혀 아니다. 고고해서가 아니라 짝짓기 시즌이기에 잠시 무리생활을 접고 외따로 지내고 있는 철새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동양화가 아니라 이런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왜 이 동물을 그리도 높이 샀던가를 처음으로 생각해볼 여유를 가지게 된다.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어느 강변일 것이다. 스웨덴의 자연을 많이 그렸던 스웨덴 작가의 작품이니 말이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어느 강변 습지대를 그린 것이라고 멋대로 생각해도 될 만큼 우리에게 낯익은 풍경이 아닌가. 작품 속 재두루미는 겨울이 오면, 중국의 양쯔강변에도, 한반도 비무장지대 인근 임진강변에도 찾아온다. 2019년 1월, 임진강변에 600마리가 넘는 두루미들이 월동하는 것으로 관측되었다.

이 그림(‘물가에 두루미가 있는 풍경’, 1924년 작)을 그린 화가 브루노 릴리예포슈(Bruno Liljefors, 1860~1939)는 두루미나 습지에 천착했던 화가는 아니다. 대신 그는 스웨덴의 대자연과 야생동물들을 눈에 잡히는 대로 두루 그려냈다. 그로서는 이보다 더 쉬운 작업이 없었는데, 대학에서 동물화를 전공했던 데다 스웨덴 국토의 97%가 인간이 살지 않는 야생지대이기 때문이다.

브루노의 작품은 자연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창(窓)이 되어준다. 들고양이, 여우, 오소리, 산토끼, 족제비, 사슴, 수리부엉이, 큰들꿩, 오리, 기러기, 두루미 등 그는 숱한 야생동물의 초상을 그렸지만, 미국 조류학자 존 제임스 오듀본(John James Audubon)처럼 연구용 자료로 그린 건 아니다.

대신 브루노의 그림 속에 나오는 동물들은 언제나 장소성을 거느리고 있다. 때로는 자기의 서식지에, 때로는 영토에, 때로는 사냥터에 있지만, 이들은 언제나 어떤 장소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땅을 박차고 오르는 오리들, 1908, 브루노 릴리예포슈
땅을 박차고 오르는 오리들, 1908, 브루노 릴리예포슈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이 대목은 실은 의미심장하다. 야생동물에 대한 이해에는 그들의 생활 장소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는 중요한 점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이다. 동물은 살아가는 ‘전략’의 존재이며, 이 전략이 잘 먹히는 생활 장소에서만 살아간다.

이를테면 비무장지대 인근 임진강변에 두루미들이 많이 모여 월동하는 이유는 인근에 율무밭이 많고, 강의 여울이 잘 얼지 않는 데다, 무엇보다도 호모 사피엔스의 수가 적기 때문이다. ‘물가에 두루미가 있는 풍경’ 속 재두루미에게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므로, 우리의 시선은 이들의 생활 장소에도 오래 머물러야 한다.

브루노의 또 다른 작품 ‘땅을 박차고 오르는 오리들’(1908)에서도 우리는 오리를 이들의 전략 행동 장소인 습지와 연결해 생각해보라는 초대를 받는다. 화가의 시선 오른쪽이나 뒤쪽으로 분명 강의 지류가 있어 화폭 왼편의 강과 만나고 있는데, 이렇듯 습지는 물의 당도를 의미한다.

이른 봄, 1887, 브루노 릴리예포슈
이른 봄, 1887, 브루노 릴리예포슈
강은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움푹 파인 고랑으로 이어진 길을 굽이쳐 내려오다가 저지대의 평지에 이르러 불현듯 긴장을 늦추며 넓게 퍼 늘어지는데, 만일 물의 양이 충분하다면, 그곳은 이 그림 속에 나오는 것 같은 습지가 될 것이다.

오리들이 이런 곳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곳에 식량원이 풍족하기 때문이다. 강물을 타고 떠내려 온 유기물이 습지대에서 한꺼번에 뒤엉키면, 이것을 먹이 삼는 미생물이 급속히 증식한다. 이 기본 세팅이 일단 갖추어지면, 생태적 파동은 이제 시간문제다. 조류와 식물이 증식하고, 이어 곤충과 지렁이들, 갑각류들이, 뒤이어 물고기들, 개구리 같은 녀석들이 모여든다.

여우와 오리, 브루노 릴리예포슈
여우와 오리, 브루노 릴리예포슈
이처럼 이곳은 ‘강의 산란지’다. 먼 곳을 달려온 강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풀어놓고 생명의 교향악을 지휘한다. 아니면, 존재의 모태인 네트워킹이 활달해지면, 존재는 자연스레 꽃을 피운다고 해도 좋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은 우리의 눈에는 이 습지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의미한 땅일 뿐이다. 육안에서만 해방되면 나타나는 경이로운 습지의 세계를 이제는 알아채라고 우리를 채근하는 듯, 어떤 동물이 뒤이어, 마침내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오리 같은 물새들이다. 브루노 릴리예포슈는 습지의 대변자 격인 물새를 많이 그렸다.

하지만 물새들은 습지의 최상위 포식자는 아니다. 이들은 노리는 녀석이 곧이어 무대에 나타난다. 적어도 스웨덴은 그런 모양이어서, 브루노의 다른 작품 ‘이른 봄’(1887)에 등장하는 여우가 그 녀석이다. ‘이른 봄’에서 추격자일 뿐인 이 녀석은 ‘여우와 오리’에서는 기어코 먹잇감을 입에 문 포식자의 위용을 드러낸다.

사냥꾼과 사냥개 그리고 여우, 1924, 브루노 릴리예포슈
사냥꾼과 사냥개 그리고 여우, 1924, 브루노 릴리예포슈
그러나 아뿔싸! 이 여우는 최종적으로 ‘사냥꾼과 사냥개 그리고 여우’(1924)에서 보이듯, 화가 자신의 먹잇감 신세가 된다. 브루노는 실제로 평생 사냥을 즐기며 살았고, 그런 자기의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습지주의자’의 저자 김산하라면, 이런 습지 일원의 세계를 ‘잘 돌아가는 세계’라고 부를 것이다. 무엇이 잘 돌아가냐면, 바로 양분이다. 이 양분의 선순환이라는 현상의 토대에는 강의 산란과 물의 선순환이 있고, 그 토대에는 방해받지 않고 자기 몫의 생태적 노동을 묵묵히 수행하는 지구의 거물들인 울밀한 숲들이 있다.

우석영 환경철학 연구자·<동물 미술관> 저자

알레만스랴튼(알레만스레텐) 알아두기

잘 돌아가는 세계’가 스웨덴에서 가능한 한 가지 이유는 야생에 관한 기초 교육이 잘 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교육은 스웨덴의 관습법인 ‘알레만스랴튼(알레만스라텐, Allemansrätten)’과 관련이 깊다. 스웨덴 어로 알레만스랴튼은 ‘만인의 권리’를 뜻하는데, 정확히는 대자연을 즐길 만인의 권리를 뜻한다.

관습법이라지만 스웨덴 헌법에서도 보장되고 있는 권리다. 외부인 그 누구도 이 권리를 지녀서, 스웨덴의 야생지대에서 여행하거나 캠핑하거나 자연물을 감상하거나 채취할 수 있고, 낚시나 사냥 등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출입금지’ 표시판을 함부로 설치했다가는 알레만스랴튼을 위반하는 셈이 된다.(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출입금지’니 ‘주차금지’니 하는 ‘금지’의 표시판을 너무나도 많이 본지라 아직도 이곳을 ‘금지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다. 영어가 허락된다면 ‘인클로저enclosure의 나라’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알레만스랴튼은 성숙한 행동에 관한 ‘느슨한 합의’에 기초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인이 자연에 접근하고 자연을 사용할 권리를 뜻하지만, 자연을 함부로 다룰 권리를 뜻하지는 않는다. 자연에 대한 책임 있는 행동이 이 권리의 전제로 이해되고 실천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자연보호구역과 같은 보호구역에는 알레만스랴튼이 적용되지 않는다.

더욱이, 야생지대에 들어가는 개인은 야생지대에서 얼마나 자기 이익을 취할지 보다는 어떻게 자신을 보호할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자유롭게 이용해도 좋지만, 자신을 지킬 줄 알아야 하며, 동시에 자연을 ‘적정 수준’ 이상으로 훼손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렇기에 알레만스랴튼은 기묘한 인권이다. 또는 인간다운 인간만을 전제로 한 인권이다. 자연과 시민 자신에 관한 기초 교육이 바탕에 탄탄히 깔려 있지 않고서야, 이 교육에 관한 자신감이 두둑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나.

브루노 릴리예포슈라는 사람은 스웨덴의 대자연이 키워냈지만, 스웨덴 국립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알레만스랴튼이라는 미풍(美風) 속에서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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