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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왜 ‘아프리카돼지열병 북한기원설’을 주장하나?

등록 2020-06-04 10:47수정 2020-06-04 11:03

[애니멀피플] 기고-아프리카돼지열병 보고서의 문제점들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
“문제는 멧돼지고 녀석은 북한에서 왔다?
유전자형, 발병지역 말고 추정 근거 없어”
지난해 12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한 경기도 파주시의 한 양돈농장에 들어가는 길목 들머리에 방역 요원들이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지난해 12월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한 경기도 파주시의 한 양돈농장에 들어가는 길목 들머리에 방역 요원들이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코로나의 ‘코’자만 들어도 지겨운 것이 사람들의 심정이다. 바이러스 얘기도 지긋지긋하고. 하지만 듣기 싫다 해서 실상이 바뀌진 않는다. 오히려 그 실상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면 일어난 일에 대해서 제대로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태를 어떻게 인식하고, 거기서 얻은 교훈은 무엇인지 말이다. 즉, 한국은 물론 전 세계를 마비시키고 수많은 사망자를 낸 이번 팬데믹(대유행)을 우리 사회가 어떤 이야기로 기억하는지의 문제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모두 잊었거나 잊기로 한 것처럼 치부하는 또 하나의 바이러스 사태가 있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 얘기를 굳이 지금 꺼내는 이유는? 다름 아닌 ASF의 발생 원인과 전파 경로에 대한 역학보고서가 지난달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환경부 소속 국립환경과학원이 발표한 이번 보고서는 한 마디로 이 나라가 ASF 사태를 종합적으로 규명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총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결과가 충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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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증거의 스토리텔링

충격적인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한쪽 노선으로 사실관계를 정립하고 사건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도가 너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보고서가 발표되고 나자 언론은 일제히 ‘멧돼지 ASF가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북한을 통해 접경지역으로 유입’되었음을 앞다투어 보도하였다. 이로써 ASF 이야기의 큰 틀이 확정된 것이다. “문제는 멧돼지이고 녀석은 북한에서 왔다.” 이것이 정부가 지난해부터 주구장창 밀던 이야기의 구조, 즉 아프리카돼지열병에 관한 스토리텔링의 요체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역학조사의 핵심 결과는 한국 ASF의 유전형Ⅱ로서 러시아와 중국과 동일한 타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이러스의 정체성에 대한 정보일 뿐, 유입의 경로를 증명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각각 발병한 병의 유전자형이 같다는 사실은 동일성 외에 말해주는 것은 없다.

역학보고서 내에 스스로 묻고 답한 질의 응답에서 유입의 추정 근거로서 제시하는 것도 위의 단순사실 한 가지와 2019년 10월에 비무장지대와 남방한계선에서 처음으로 멧돼지 ASF가 발병했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퍼즐을 맞추어야 하는 상황에서 단 두 조각만 제시하는 건 무엇인가? 가령 국내 ASF 최초 발병은 9월16일 돼지 농가였다는 사실은 보기 좋게 빠져있다. 물론 당국은 멧돼지에 한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ASF의 국내 유입 과정을 재구성함에 있어서 멧돼지에 한정하는 것 자체가 조사의 공정성(impartiality)에 엄연히 위배된다.

또한 첫 멧돼지 발병이 접경지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ASF가 북한을 거쳐 유입되었다는 말은, 마치 시체가 문간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면 범인이 외부에서 왔다고 단정하는 꼴이다. 여기저기 다른 문과 창문이 훤하게 열려있는데도 말이다.

강원 철원군 평야에서 멧돼지 무리가 논둑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연합뉴스
강원 철원군 평야에서 멧돼지 무리가 논둑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연합뉴스

다른 문과 창문을 말하자면 물론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이다. 실제로 여행객에 의해 ASF 바이러스에 감염된 육류가 수차례 국내에 반입된 것은 학술지 ‘신종감염병’(Emerging Infectious Disease)의 2019년 논문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ASF가 냉장육에서 15주, 냉동육에서 최장 1000일까지 생존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경로는 무수하다.

국내 유입 추정 시점 전후로 해서 ASF 발병 국가에서 온 여행객과 축산물에 대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조사가 이뤄져야 함은 물론이고, 여기서 나오는 결과가 멧돼지 역학조사와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것도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양돈장에서 ASF가 발병한 지 8개월이 지났지만, 역학조사 결과는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축산업계에서조차 결과 공개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에 부담스러운 내용이 포함될 수도 있다는 ‘의혹설’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이다. 한마디로 사건이 일어났는데 흑인 조사 결과만 발표하고 백인에 대한 조사 결과는 숨기는 격이다.

_______
DMZ 넘어왔다면서, 왜 남쪽에 펜스를 치나?

이번 보고서를 자세히 보면 희한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바이러스가 ‘북한을 거쳤다’는 말 자체는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접경지역으로 유입’이라는 표현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언론과 사회는 이미 북한 유입을 사실처럼 받아들인 상황에서도 공식 문서가 이렇게 모호한 태도를 유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북한에서 비무장지대(DMZ)를 넘어왔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현재 진행 중인 펜스를 통한 관리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어떤 펜스도 DMZ의 펜스보다 좋을 수 없으며, 그렇다면 정부에서 진행하는 펜스 정책은 무의미하게 된다. 더욱이 DMZ의 멧돼지 밀도는 매우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매개 동물에 의해 퍼졌다는 증거도 전혀 없는 상황이다.

결국 유입 및 경로에 대한 증거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정부는 ASF를 멧돼지의 북한기원설을 주구장창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이 스토리를 국민의 뇌리에 박히도록 하겠다는 의도 외에는 본 역학조사 및 정부의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 고집의 의도는 자명하다. 정부의 방역도 축산의 체계도 본 사태에 책임이 없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말 못하는 동물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워, 우리 토착 산림 생태계의 엄연한 일원인 멧돼지에게 행한 야생적 살처분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무리 힘들어도 특정 집단을 매도하면 안 된다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다. 그 윤리는 모든 질병, 모든 생명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사실과 윤리에 기반하지 않은 스토리텔링은 당장 멈춰야 한다.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사무국장(동물행동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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