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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전국일반

자식같은 놈들 파묻고…지척에 고향두고도…‘먹먹한 설’

등록 2011-02-01 20:00수정 2011-02-03 14:31

지난달 31일 오전 경북 군위군 군위읍 군위나들목에 설치된 구제역 방역초소에서 초소 비상근무를 하는 군위군 직원들이 소독액 자동분사기에 얼어붙은 소독액 덩어리를 떼어내 삽으로 치우고 있다.
지난달 31일 오전 경북 군위군 군위읍 군위나들목에 설치된 구제역 방역초소에서 초소 비상근무를 하는 군위군 직원들이 소독액 자동분사기에 얼어붙은 소독액 덩어리를 떼어내 삽으로 치우고 있다.
살처분지역 출입 제한…“손주들마저 볼수 없다니…”
구제역 재앙이 바꾼 설 풍경

두 달 넘게 전국 8개 시·도 65개 시·군·구를 휩쓴 사상 최악의 구제역 재앙으로, 2011년 민족 대명절 설을 맞는 모습이 예년과는 사뭇 다르다. 농민들은 소·돼지 300만마리를 땅에 파묻고 예방약(백신)을 접종하고도 감염될까봐 마음을 졸인다. 고향집 부모들은 자녀들의 귀성을 말리고, 자녀들은 부모를 찾지 못해 무거워진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공무원 등은 설 연휴도 반납하고 전국 2400여곳 방역초소를 지키고 있고, 재래시장 상인들은 풀 죽은 대목 경기에 한숨만 쉬고 있다. 설을 앞두고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봤다.

김해 ‘바리케이드’ 안 농가

“올해 설에는 우리 식구끼리 밥 한 그릇 정성껏 떠놓고 차례를 지낼 수밖에요. 제수음식거리를 장만하러 시장에 갈 수도, 그렇다고 친척들이 찾아올 수도 없는데 어쩌겠어요.”

구제역 발생지역 주민들은 살처분이 완료되고 14일 동안 이동이 제한된다. 집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쳐서, 주민들은 바깥으로 나갈 수 없고 외부인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지난달 23~30일 구제역이 발생한 경남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에도 1일 현재 15가구 71명이 갇힌 채 지내고 있다. 살처분이 끝나지 않아 이들은 일러야 이달 중순에나 이동제한에서 풀려날 것으로 예상된다. 생활필수품은 주촌면사무소에 전화로 요청하면, 면 직원이 사다가 바리케이드 앞에 놔두고 간다. 도시에 나간 자녀가 설을 쇠러 와도 마을에서 500m 바깥 통제초소까지만 접근할 수 있다. 거기에선 부모 얼굴은 물론 고향집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설이라고 ‘정상적인’ 차례상을 차리는 것은 아예 꿈도 꿀 수 없다.


부산에 집과 가족을 두고, 2005년부터 이곳에서 직원 4명과 함께 돼지농장을 운영해온 권상오(50)씨는 구제역 때문에 돼지 4000여마리를 땅에 파묻었다. 권씨와 직원들은 이번 설에 텅 빈 농장에서 합동차례를 지낼 생각이다. 권씨는 “돼지가 눈에 어른거리는 지금 심정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겠다”며 “가족들이라도 보고 싶은데, 그마저 할 수 없으니 답답할 뿐”이라고 말했다.

돼지 800여마리를 키우던 심송덕(88), 김은하(84)씨 부부는 ‘경남 첫 구제역 발생 농가’라는 점 때문에 이웃에 미안한 마음이 앞서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는 말도 꺼내지 못한다. 차례는 이웃에 사는 큰집에서 지내는데, 올해는 찾아가는 것이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김씨는 “죽지 못해 사는 것이지, 지금 내가 설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겠느냐”며 “미안하다”는 말만 거듭했다.

김해/최상원 기자 csw@hani.co.kr


성남 모란장 상인들
구제역에 한파까지 뒤숭숭…“설 대목이 다 뭬야”

붐볐다. 여전히 넉넉했다. 하지만 어딘가 허전한 표정의 사람들이 더 많은 듯 보였다.

설을 앞둔 마지막 대목인 지난달 29일 오후 수도권 최대의 민속 5일장이 선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모란장’. 어김없이 장은 섰고 흥정도 벌어졌다. “이 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냐?”라는 상투적 말을 내뱉는 손님에게, “에라~ 망하기밖에 더 하겠어?”라며 익살스럽게 물건을 덥석 집어주는 상인. 닷새마다 벌어지는 풍경이지만, 이날은 장날다운 이런 쏠쏠한 재미는 없었다.

좌판에서 옷가지를 팔던 이용순(66·여)씨는 “구제역에다 날씨가 영하 15도를 넘나들어서 그런지 대목이 대목 같지 않다”며 “올해는 한국 사람들보다 장구경을 하며 싼값에 물건을 사려는 중국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추위 탓에 이마에 팬 굵은 주름이 더 깊어 보이는 이씨는 “아무리 세찬 겨울 칼바람에도 장터를 지켜왔는데, 요즘에는 뒤숭숭한 동물 전염병 때문에 사람이 더 모이지 않는 것 같다”고 착잡해했다.


설 연휴을 앞둔 대목인 지난달 29일 수도권 최대 민속 5일장인 경기도 성남시 모란장이 섰지만, 칼바람과 구제역 등의 여파로 제수용품을 파는 노점마저 손님들의 발길이 평소보다 훨씬 뜸했다.
설 연휴을 앞둔 대목인 지난달 29일 수도권 최대 민속 5일장인 경기도 성남시 모란장이 섰지만, 칼바람과 구제역 등의 여파로 제수용품을 파는 노점마저 손님들의 발길이 평소보다 훨씬 뜸했다.
밤과 곶감 등 제수용품을 파는 상인 박아무개씨 처지는 더 좋지 않았다. “물건도 많고 값도 싼데도 날씨가 추우니까 장터로 나오던 손님들이 뚝 끊겼다”며 “손님들을 대형마트 같은 실내 매장으로 빼앗겨 평소보다 물건을 적게 가져왔는데도 도무지 줄지 않는다”고 울상을 지었다.

고향을 찾지 못하게 된 도시민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고향이 충남 당진이라는 문인성(50·성남시 분당구 정자동)씨는 “구제역 때문에 열린 고향 마을 회의에서 ‘설날에 자식들을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자는 결정이 났다’는 어머님의 전화를 받았다”며 “무시하고 고향에 갔다 구제역이라도 돌면 시골 부모님들까지 원망을 들을까봐 귀성을 접었다”고 말했다.

성남/글·사진 김기성 기자 player009@hani.co.kr


‘미발병’ 군위 방역공무원
연휴 잊고 초소 비상근무…“매몰 더는 없어야죠”

소독액 자동분사기 벽면에 허연 얼음덩어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삽으로 힘껏 긁어내기를 거듭하자 얼음이 겨우 뚝 떨어졌다. 칼바람이 부는데도 오기윤(43·경북 군위군 기획감사실 직원)씨의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지난달 31일 오전 군위군 군위읍 중앙고속도로 군위나들목에 설치된 구제역 방역초소에는 소독액 자동분사기에서 얼음을 떼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오씨는 구제역 비상근무조로 편성돼 설날 아침에도 초소를 지켜야 한다. 맏아들인 같은 부서 동료가 차례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사정 얘기를 듣고, 둘째 아들인 자신이 근무를 자청한 것이다.

오씨는 “설 아침에 가족들과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하지만, 누군가는 초소 근무를 해야 하니 할 수 없지 않으냐”며 웃었다.

군위군에는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 발병이 확인된 이튿날부터 방역초소 5곳이 세워졌다. 군 직원 460여명이 두 달 넘게 하루 3교대로 방역초소 근무를 이어왔다. 강추위에 견디려고 옷차림부터 단단히 준비한다. 내복 2벌은 기본이고, 따뜻한 윗도리에 방한복, 방역복까지 대여섯벌은 껴입는다. 근무자들은 초소를 지켜 서 있기만 하는 게 아니다. 도로가 얼어붙지 않게 하려고 때때로 모래와 생석회를 뿌린다. 차가 드문 새벽에는 소독액 분사 노즐이 얼기 일쑤다. 주전자에 물을 끓여 기계를 녹여줘야 한다.

초소 근무가 끝나도 일상 업무는 그대로다. 낮에 초소에서 몸을 떨다가 군청으로 돌아와 쌓인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다. 이들 덕분인지 군위군은 지금까지 구제역을 잘 막아내 ‘청정 군위’라는 말을 듣고 있다. 오씨는 “애초 매몰팀에 편성돼 있었는데, 매몰작업까지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방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설 연휴에도 공무원 2만3600여명이 전국 방역초소 2500여곳을 지킬 예정이다.

군위/글·사진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장수 고향집 못가는 아들
시골집서 귀향말라 당부…“명절 차례 놓친건 처음”


김종철(33·기획관리실 균형발전 담당 사무관)씨
김종철(33·기획관리실 균형발전 담당 사무관)씨
전북도 공무원 김종철(33·사진·기획관리실 균형발전 담당 사무관)씨는 이번 설에 고향을 찾지 못한다. 전북 전주시에서 부모가 사는 전북 장수군으로 귀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척에 살면서도 고향 방문을 접은 것은 전국을 휩쓸고 있는 구제역 때문이다. 그는 군대 시절만 빼고 지금까지 명절 때 차례를 놓친 적이 없다.

아버지 김귀곤(60)씨는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에서 한우 50여마리를 키우고 사과나무 1600그루를 재배한다. 시골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단둘이 산다.

고향에선 아버지처럼 여러 이웃들이 한우를 많이 키운다. 그런데 회의를 열어 올해 설에는 자식들이 귀성을 자제하도록 할 것을 결정했다. 전북은 아직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은 청정지대로 남아 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고향 방문 자제 소식을 좀 일찍 들었더라면, 외국여행을 떠올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내 “명절에 고향을 두고 외국까지 가는 게 꺼림칙해서 아마 포기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부모님이 무척 아쉬워하더라고 했다. “전날 밤 들러 설 아침 일찍 차례만 지내고 가면 어떻겠느냐”고 여쭸더니, 부모님은 ‘동네의 결정이니 따라야 한다’며 극구 말렸다고 했다. “그래서 설 당일 전화만 드리기로 했지요.” 3남1녀 가운데 차남인 그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주/박임근 기자 pik007@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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