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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그리스의 홀로코스트

등록 2013-03-01 14:13수정 2013-03-03 18:09

그리스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 전통, 일상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유대인박물관은 박물관 천국 아테네의 니키스거리에 있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그리스 유대인의 역사와 문화, 전통, 일상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유대인박물관은 박물관 천국 아테네의 니키스거리에 있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그리스에서 제주를 보다]
⑥ 그리스의 홀로코스트 ‘유대인 절멸’

▷ 관련기사 (제목을 누르면 기사로 이동합니다)
① 신타그마 광장에서 제주 3·1사건을 생각한다
② 칼라브리타 학살과 북촌리 학살
③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4·3’ 수형인들
④ 신화의 나라, 저항의 나라

⑤ 저항과 비극의 서사, 스코페프티리오
⑥ 그리스의 홀로코스트 ‘유대인 절멸’
⑦ 기아의 어머니와 절대권력의 무상
⑧ 전쟁기념관과 쓰여지지 않는 역사
⑨ 그리스의 위기…문화와 경제

■ 기억,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여기 잠시 멈춰 서서 눈을 감고 기억을 떠올려보라/ 이곳 저곳에서 평화와 신뢰 속에 모여살던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체포돼 굴욕을 당하고, 영원히 우리의 문명을 수치스럽게 할 수용소로 추방돼 학살된 날들을 기억하라/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600만 유대인들이 자유롭고 행복할 권리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웃고 기도할 권리도, 마침내 살아갈 권리도 거부됐느니

그들을 기억하라. 그들의 분노와 죽음을 기억하라. 공포로 뒷걸음질치지 말라.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비인도의 행위로 절망에 빠지지 말라/ 그저 기억하라. 기억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죽음을 기리는 것이리라. 망각 속에서, 그들을 다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이리니.”

그리스 유대인박물관의 마지막 전시관 앞에 걸린 노벨평화상 수상자 엘리 위젤의 ‘추모’라는 글이다. 그는 유대인 홀로코스트에서 극적으로 살아나 나치의 만행을 세계인에게 알려왔다. 그리스의 홀로코스트. 나치가 유럽 여러 나라에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했지만, 나라별로 보면 그리스에서 일어난 홀로코스트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유대인박물관은 니키스거리에 있다. 뒷골목쯤 된다. 좁은 일방통행 도로 양 옆에는 승용차와 오토바이들이 주차돼 있다. 에르무거리에서 니키스거리로 들어서서 20여분쯤 지나자 자그마한 간판에 유대인박물관이라고 써 있는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변 도로가에는 싱싱하게 보이는 바나나와 청포도를 실은 노점상들이 있고, 청소차량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콧수염을 양 옆으로 보기좋게 기른 노인들은 작은 식당 앞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문과 매표소가 보이지 않아 잠깐 서성거렸다. 마침 옆에 있는 작은 철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이곳이 입구가 맞아요?” “그럼요. 먼저 들어가세요.” 입구가 소박한 박물관이다.

유대인박물관은 1977년 그리스 유대인의 역사에 대한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하고 연구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박물관 팸플릿에는 수세기에 걸친 유대인들의 생활과 문화의 생생한 사진을 보여주는 것이 주목적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전시물의 많은 부분은 나치 점령 시기 그리스 유대인 박해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 그리스 유대인 절멸 유대인의 그리스 정착을 보여주는 전시관들을 둘러보고,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전시관에 들어서니 엄숙하고 비장한 선율이 흐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입었던 의복과 사진들, 서류와 신문자료들은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보여주었다. ‘죽음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해방돼 그리스로 돌아오는 모습도 전시돼 있다. 마지막 전시관은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구성돼 있다. 박물관은 그리스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기증한 자료들도 전시돼 있다.

그리스의 유대인 역사는 230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나치 독일은 1941년 4월6일 그리스를 침공해 4월9일 테살로니키(살로니카)를, 4월27일에는 아테네를 점령했다. 당시 그리스에는 7만5000여명의 유대인들이 살았다. 그리스 최대의 유대인 공동체로 5만여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은 그리스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에 거주했다. 반유대주의 정책은 1942년 여름부터 시작됐다. 반유대주의를 선동하는 출판물이 발간되고 차별정책이 시행됐다. 1943년 3~8월 모진 박해 끝에 테살로니키 거주 유대인 4만8674명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 이송됐다. 이들 가운데 살아서 돌아온 유대인은 195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테살로니키 지역 유대인의 97%가 학살된 것이다. 박물관 전시물에는 그리스내 유대인들의 추방지역과 추방경로가 자세하게 소개돼 있다.

1942년 7월11일 토요일, 독일군은 테살로니키의 유대인 남성들에게 자유광장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1만여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은 뙤약볕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서 있도록 강요받았고, 오후 8시부터 새벽 2시30분까지 기괴한 운동을 하도록 강요받고, 폭행당했다. 몇몇은 죽었고, 나머지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유대인박물관 소장
1942년 7월11일 토요일, 독일군은 테살로니키의 유대인 남성들에게 자유광장에 모이도록 명령했다. 1만여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은 뙤약볕에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서 있도록 강요받았고, 오후 8시부터 새벽 2시30분까지 기괴한 운동을 하도록 강요받고, 폭행당했다. 몇몇은 죽었고, 나머지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유대인박물관 소장
1943년 3월 동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의 불가리아 점령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다뉴브강의 롬 항구로 추방돼 독일군에 넘겨졌다. 그들은 트레블링카 수용소로 강제 이송됐다. 전쟁이 끝나자 이 지역 4200여명의 유대인 가운데 200여명만이 생존했다. 그리스내 이탈리아 점령지역에 살던 1만2500여명의 유대인들은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무조건 항복한 이후 독일군의 통치 아래로 들어갔다. 1944년 3월부터 이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와 추방이 시작됐다. 나치 독일이 철수했을 때 그리스 유대인의 87%에 이르는 6만5000여명이 학살됐다. 그들의 재산과 사업은 압류됐고, 예술품과 도서관들은 압수되거나 파괴됐다.

전시관에는 1944년 6월9일 코르푸섬의 유대인 추방과 재산 압류를 담은 코르푸섬에서의 반유대주의 포고령, 1943년 10월3일 아테네 주둔 독일군 사령관 슈트룹(Stroop) 장군이 발행한 거주지 등록 및 제한 법률과 독일 점령 지역 유대인에 대한 명령, 점령 시기 살로니카에서 발행한 강제노동자격에 관한 지시, 1943년 3월 그리스내 유력인사 30명 서명대표로 나치의 그리스 유대인 박해와 추방에 항의했던 다마스키노스 대주교의 항의문 등도 전시돼 있다.

전시관의 설명문을 읽다보면 숨이 막힌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자료 하나 하나가 모두 절망과 체념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 사제들의 유대인 구출 노력 나치 독일의 그리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강화될수록 많은 그리스정교회 신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보호하는 데 애썼다. 정교회 사원들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유대인들, 특히 어린이들을 받아들이려고 문을 개방했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숨겼다.

테살로니키의 주교 겐나디오스(Gennadios)는 독일군이 ‘다윗의 별’(유대인을 구분하는 별 모양 표시)을 유대인들에게 부착하게 하자 사제들을 통해 신자들에게 유대인을 차별하거나 경멸하는 일이 없도록 호소했다. 그는 또 테살로니키의 유대인 추방을 중지하도록 독일군 지도부에 호소하기도 했다. 볼로스의 주교 이오아킴(Ioakim)은 신자들에게 피신처를 조직하고 유대인들에게는 탈출하도록 촉구했다. 박물관에는 이들 사제들의 유대인 구출을 헌신적 노력이 담겨 있다.

그리스 유대인들은 독일군의 박해를 피해 저항활동에 참가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민족인민해방군 제2사단에 소속된 살바토르 바콜라스(오른쪽에서 두번째)도 그러한 유대인 가운데 한명으로 여러 차례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유대인박물관 소장
그리스 유대인들은 독일군의 박해를 피해 저항활동에 참가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민족인민해방군 제2사단에 소속된 살바토르 바콜라스(오른쪽에서 두번째)도 그러한 유대인 가운데 한명으로 여러 차례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유대인박물관 소장
그리스정교회 수장인 다마스키노스 대주교는 공식적으로 독일 점령 당국에 그리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를 중단하라고 요구한 유일한 유럽 교회의 대표였다. 그는 1943년 3월23일 그리스의 괴뢰정부 총리 로고테토풀로스(Logothetopoulos)에게 그리스인의 이름으로 점령 당국에 유대인 박해를 중지하도록 개입할 것을 요청하는 비망록을 전달했다. 다음날에는 그리스 주재 독일 전권대사 알텐부르크를 직접 만나 같은 내용의 비망록을 건넸다. 성직자들과 저항운동단체, 아테네 경찰 책임자 앙겔로스 에베르트(Angelos Evert)와 그 지휘 아래 일부 경찰관들은 그의 탄원에 동조했다. 많은 그리스정교회 신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구했다. 에베르트는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정교회 신자들의 이름을 유대인들에게 제공했다. 다마스키노스, 이오아킴 등의 그리스정교회 사제들의 사진을 보며 이들의 활동을 기억한다. 박물관 한 쪽에는 당시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데 헌신적으로 기여한 인물을 기리는 그리스의 ‘의인’(義人) 명단이 적혀 그들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 유대인들의 민족해방투쟁 마지막 전시관에는 나치 점령 시기를 겪은 유대인들의 증언이 사진자료와 함께 전시돼 있다. 이곳에 소개된 많은 이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그리스의 민족해방투쟁에 활발하게 참가했다. 이들은 1943년 초부터 민족인민해방군 등 저항단체에 가담해 독일군과의 전투에 참가했다. 저항단체와 함께 활동한 유대인은 9000여명으로 추정된다. 650여명의 유대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친지들에 대한 박해에 복수하고 그리스를 해방시키기 위해 싸웠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유대인들은 영국과 저항단체간의 연락책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내전 시기에는 민족인민해방군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저항활동을 인정받기는커녕 보안기구와 극우단체로부터 고통을 겪었고, 일부는 투옥되거나 유형에 처해지는 고통을 겪었다.

유대인박물관에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던 유대인들이 입었던 의복과 ‘다윗의 별’ 등이 전시됐다. 유대인박물관 소장
유대인박물관에는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던 유대인들이 입었던 의복과 ‘다윗의 별’ 등이 전시됐다. 유대인박물관 소장
전시관을 둘러보는 4시간 남짓 동안 다른 방문자는 없었다. 의아했다. 사리타라는 박물관 여직원 한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몇 명이나 관람해요? 방문자들은 주로 어떤 사람이 많아요?” 사리타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요즘은 하루 10여명 정도 오지요. 주로 유대인들이죠. 그리스인들은 별로 오지 않아요.” 되레 내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이요.” 놀라는 눈치다. 세계의 관광객들이 연중 찾는 아테네. 그곳에는 그리스 유대인들의 아픔이 서려 있었다. 이곳을 찾는 이가 드물다는 건, 홀로코스트가 점점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인가.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2010년 5월 조성된 아테네 홀로코스트공원은 티시오역 부근에 있다. 부서진 ‘다윗의 별’을 상징으로 한 이 홀로코스트 기념물은 6개의 부서진 삼각형 조형물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지역을 가리킨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2010년 5월 조성된 아테네 홀로코스트공원은 티시오역 부근에 있다. 부서진 ‘다윗의 별’을 상징으로 한 이 홀로코스트 기념물은 6개의 부서진 삼각형 조형물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지역을 가리킨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어렵게 찾은 홀로코스트 공원엔 부서진 ‘다윗의 별’이…

2010년 5월 조성된 아테네의 홀로코스트 공원(Holocaust Memorial)은 그리스내 유대인들의 박해를 추모하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그곳을 방문하기 위해 시민 몇몇에게 장소를 물어봐도 “모르겠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관광지도에도 홀로코스트 공원은 표시돼 있지 않았다.

한나절 남짓 찾아헤맨 끝에 아테네의 티시오역 근처에서 어렵게 찾은 홀로코스트 공원은 초라하게 보였다. 공원이 조성된 곳은 멜리도니거리의 유대교 회당인 시나고그 부근에 있다. 이곳은 나치가 식량을 나눠준다고 해놓고 유대인들을 구금했던 장소다.

공원에는 부서진 ‘다윗의 별’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 홀로코스트 공원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듯 조형물은 낙서로 더렵혀지기도 했다. 다윗의 별 형태로 만들어진 이 작품에서 6개의 별 조각들은 유대인들이 추방된 그리스 전역의 도시와 마을을 가리키고 있다. 또 가운데의 6각형 조형물은 재환희와 생존을 의미한다.

‘다윗의 별’이 들어선 공원은 허브가 심어져 치유의 효과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허브는 관리되지 않았고 수십여그루에 지나지 않았다.

2010년 5월9일치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넷판에 소개된 홀로코스트 공원 조성의 의의는 자못 크다. “이제 70년이 지났다. 그러나 내일 아테네에 해가 지면 그리스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아테네는 나치의 손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념하는 마지막 유럽연합의 수도”라고 의미를 새겼다. 아테네 유대인협회 대표인 벤야민 알바랄스는 “우리는 잊지 않았고,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서진 별 조각물에 테살로니키, 카발라, 드라마, 세레스, 산티, 라리사, 베로이아, 볼로스, 칼키다 등의 지역이 새겨져 있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부서진 별 조각물에 테살로니키, 카발라, 드라마, 세레스, 산티, 라리사, 베로이아, 볼로스, 칼키다 등의 지역이 새겨져 있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점령 시기 유대인 공동체가 완전 파괴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던 그리스의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홀로코스트를 기리기 위한 기념물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2009년 아테네시가 터를 내놓으면서 급진전됐다고 기사는 전한다.

유대인협회는 ‘단순성’과 ‘독창성’을 높게 평가해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한다. 협회 관계자는 “유대인들의 전통에 맞춰 이 작품은 죽음과 죽음의 기억을 조용하고도 냉정한 방법으로 상징화했다”고 말했다. 작품을 설계한 그리스계 미국인 예술가 데아나 마가니아스는 “허브정원은 치유와 고요함의 상징이다. 별의 방향은 희생자들이 추방된 도시들을 가리키고, 허브 향기는 기억의 촉매제로 역할한다”고 말했다. 그리스의 기념물 전문가 미칼리두는 “설치 장소가 심미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제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홀로코스트 기념물 가운데 하나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징성을 담기에는 주변의 환경과 관리가 필요하게 느껴졌다. 그리스인들의 뇌리에서 홀로코스트가 점차 사라지듯이 홀로코스트 공원도 조성된지 3년이 채 안됐지만 벌써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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