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아의 어머니상과 아테네 대기근 말라비틀어져 앙상한 다리를 드러낸 채 누워 있는 어머니의 젖을 문 아기의 조각상. 말라버린 젖무덤에서 더는 젖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아기는 엉금엉금 기어가 젖을 물고 있다. 앞에 놓인 국화 송이는 이 어머니를 위한 헌화인가.
그리스 아테네 제1국립묘지 정문에 들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닥에 이 조각상이 보인다. 국립묘지 정문은 소박하다. 정문 옆에는 한 노인이 국화를 팔고 있었다. 국립묘지 직원에게 물어보니 ‘기아의 어머니상’이라고 한다. 오죽하면 국립묘지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곳에 이 굶주리는 어머니와 아기상을 설치했을까. 그만큼 ‘기아’가 그리스 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독일 점령 시기 그리스의 기근은 상상을 초월했다. 1941~42년의 ‘대기근’은 점령이 빚은 그리스의 가장 어두운 유산 가운데 하나이며, 추축국에 맞서 일어난 대규모 저항운동의 기폭제 구실을 했다.
독일은 그리스를 점령하자마자 모든 농업생산물을 징발했다. 독일의 약탈은 그리스에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군 병사들은 식량을 고향으로 보내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식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비싼 값에 되팔았다. 교통수단과 연료의 징발은 운송수단의 부족을 가져왔고, 도로 사정의 악화는 식량수송 체계를 마비시켰다. 이 때문에 곡창지대인 북부지방에서 들어와야 할 밀 등 시민들의 생존에 필요한 식량이 아테네에 들어오지 못했다.
아테네 제1국립묘지 정문은 소박하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아테네에서는 점령 이전의 빵 배급량이 하루 300g에서 점령 첫해 11월 중순에는 하루 100g 이하로 3주만 배급됐다. 테살로니키에서는 시민들이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한 상태’에 빠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서 생존을 위해 구걸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수프를 배급하는 수프보급소가 프랑스 수녀들에 의해 테살로니키에 세워졌지만, 굶주리는 그리스인들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10만명 이상이 그리스 전역에서 굶어죽었다. 특히 아테네 대기근은 심각했다. 아테네의 길거리에서 깡마른 주검들을 보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굶주림 끝에 죽은 주검들이 길거리 곳곳에서 나뒹굴고, 매일 아침 수거차량들이 주검들을 치웠다고 하지 않는가. 1941년 12월 아테네에서만 하루 300여명이 기아로 희생됐다. 청소차량들은 아테네의 거리에서 주검을 치우는 게 일상이었다. 가족들은 죽은 친지들의 식량배급증을 유지하기 위해 주검을 야간에 공동묘지에 몰래 버렸다. 그리스의 대기근으로 1941년 10월1일부터 1942년 9월30일까지의 도시 지역 사망률은 1940~41년 같은 기간에 견줘 3배를 넘었다. 애처로운 모양의 어머니와 아기의 모습에서 당시의 그리스 사회가 겹쳐진다.
■ 아테네 국립묘지의 인물들 국립묘지에는 한 시대 국가를 이끌던 인물들이 묻힌다. 이 국립묘지에도 그리스 사회의 한가운데에 섰던 수많은 인물들이 묻혀 있다. 절대권력을 휘두르던 메탁사스의 묘도 있고, 군부독재 타도운동에 앞장섰던 멜리나 메르쿠르의 묘도 있다.
배우이자 정치가였던 멜리나 메르쿠리(Melina Mercuri·1920~94)의 대리석 묘도 있다. 대리석 묘 앞에는 양팔을 활짝 벌려 웃는 그녀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1967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대령들의 정권’이 들어선 뒤 기피인물로 지목됐다.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됐던 그녀는 군사정권이 끝난 1974년 귀국해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망명생활 중에도 군사독재 타도운동을 벌이며 줄기차게 그리스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1981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문화부 장관에 취임해 영국이 강탈한 파르테논 신전의 ‘엘긴 마블’ 반환운동을 전개해 많은 그리스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배우이자 정치인이다.
인근에는 1981년 10월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 대표로 총리에 올라 그리스 내전을 화해의 길로 물꼬를 텄던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의 묘도 있다. 그는 내전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화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의 지위를 인정했다.
아테네 국립묘지는 조각품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예술조각품 전시장 같은 국립묘지를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묘지마다 갖가지 조각품이 놓여 있다.
■ 절대권력의 무상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한시대를 풍미했던 독재자들의 말로는 언제나 권력의 덧없음을 떠올리게 한다. 1930년대 그리스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이오안니스 메탁사스(Ioannis Mextaxs·1871~1941)의 묘를 보고 싶었다. 아테네 국립묘지를 방문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메탁사스는 1936년 4월 총리에 취임했다. 그해 총선에서 자유당과 인민당이 각각 143석과 142석으로 거의 동수의 의석을 차지하고 공산당이 15석을 얻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게 되자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려 한다며 국왕을 설득해 국회를 해산시켰다.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총파업을 분쇄했다.
그는 총파업 직전 국왕 게오르게 2세를 설득해 헌정을 중단하고, ‘공산혁명’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1936년 8월4일 계엄령을 선포해 이른바 ‘8·4정권’을 수립했다. 절대권력의 독재정권이었다. 메탁사스 정권 수호를 위한 국가기구는 일반보안대와 특수보안대로 구성된 경찰과 헌병 등 보안기관이었다. 그는 이들 기구를 총동원해 검열과 비밀경찰, 재판 없는 투옥으로 극우독재권력을 공고히 했다.
메탁사스는 1936년 9월 베니젤로스 정부 때 제정된 특별법을 고쳐 비상법 제117호를 선포했다. 일종의 국가보안법이다. 이 법은 “글이나 말로 또는 무엇이든지 어떤 방법으로든지간에, 직간접적으로, 기존 사회체제를 전복하려는 경향을 가진 이론, 사상, 사회적·경제적·종교적 제도의 개발이나 이행, 확산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3개월의 징역형과 6개월~2년의 유형에 처하게 하는 제도였다.
1930년대 그리스의 절대권력자 메탁사스의 묘에는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국립묘지 한켠에 있는 그의 묘지는 쓸쓸하게 보인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1938년 2월에는 참회 선언, 강제수용소 설치, 충성증명서 발급 등 3대 보안수단을 도입했다. 참회 선언은 형기의 3분의 1을 채운 수감자가 문서나 구두로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앞으로 법규정을 지키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충성증명서는 개인의 사회적 신념과 관련된 공안장관의 증명서로 공무원이 되려면 이를 제출해야 했다.
그리스는 군부독재정권이 붕괴된 1974년까지 수십년 동안 이를 국가 통제의 기본 도구로 활용했다. 국가공무원 시험은 물론 언론사와 변호사시험 등에도 충성증명서가 있어야 했다. 메탁사스 정권 4년 동안 4만5천여명이 참회 선언을 했는데, 당시 그리스 공산당 조직원 1만5천~1만7천여명을 훨씬 넘는 숫자였다.
수많은 그리스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나 정치범으로 둔갑돼 섬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의 집권 시절 공권력의 남용은 정당한 이유 없이 체포되거나 투옥됐던 그리스인들을 좌파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원히 절대권력을 잡을 것 같았던 그도 1941년 1월29일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아테네의 숱한 박물관에 베니젤로스의 흉상이나 초상화, 사진 등이 전시된 것과는 달리 메탁사스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국립묘지 직원에게 그의 묘를 물어 찾는 것도 어려웠다. 어렵게 만난 그의 묘는 여러 묘가 서 있는 곳 한켠에 있었다.
국왕을 넘어선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던 그의 죽음도 모든 절대권력자들의 죽음처럼 허망했다. 국립묘지에서 만난 그의 묘에는 천사의 조각상이 있었다. 화려한 조각품들에 둘러싸인 다른 묘들에 비해 먼지와 낙엽에 둘러싸인 그의 묘를 보면서 절대권력의 과거와 미래를 보았다.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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