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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승자들에 가려진 저항의 기록…귀퉁이에 동그마니

등록 2013-03-03 16:18수정 2013-03-03 18:12

국제적십자사 직원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그리스의 어린이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있다. 전쟁박물관 소장
국제적십자사 직원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그리스의 어린이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있다. 전쟁박물관 소장
[그리스에서 제주를 보다]
⑧ 전쟁기념관과 쓰여지지 않는 역사

▷ 관련기사 (제목을 누르면 기사로 이동합니다)
① 신타그마 광장에서 제주 3·1사건을 생각한다
② 칼라브리타 학살과 북촌리 학살
③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와 ‘4·3’ 수형인들
④ 신화의 나라, 저항의 나라

⑤ 저항과 비극의 서사, 스코페프티리오
⑥ 그리스의 홀로코스트 ‘유대인 절멸’
⑦ 기아의 어머니와 절대권력의 무상
⑧ 전쟁기념관과 쓰여지지 않는 역사
⑨ 그리스의 위기…문화와 경제

그리스 전쟁기념관은 세계사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학교 시절 배운 많은 전쟁을 만난다. 신타그마광장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그리스 전쟁기념관의 첫 전시관은 기원전 6500~5800년 토기부터 신석기 후기와 청동기시대 요새 위치와 유적 발굴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세계사 책에 나오는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와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을 비롯해 테르모필레 전투(기원전 480년), 그리고 그리스 독립전쟁과 관련한 전시물들이 있다.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물 모형들도 모조품으로 전시돼 있고, 그리스인 병사들의 투구도 시대에 따라 비교할 수 있게 전시돼 있다. 고대의 범선과 각종 병장기의 모형도 관람객들의 눈길을 잡았다.

그러나 전쟁박물관은 외국인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다. 전시물 설명은 대부분 그리스어로만 돼 있다. 각 관별로 설명해주는 내용이나 관람동선도 표시되지 않았다. 펠로폰네스와 섬에서 일어났던 독립전쟁의 처절했던 모습들이 각종 그림과 병장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초상화와 친필 문서들도 전시돼 있다. 점령 시기 그리스인들의 저항운동에 관한 설명과 자료는 짧게 지나간다. 저항운동 자체가 좌익 민족해방전선과 민족인민해방군이 주도했기 때문인지 이들에 관한 설명자료는 지극히 일부분만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 승리자의 기록 1940년 10월28일 이탈리아의 공격으로 시작된 그리스-이탈리아 전쟁에서 그리스군의 승리를 환호하는 시민들의 사진과 언론보도도 전시됐다. 이날 새벽 아테네 주재 이탈리아 대사 그라치가 그리스의 전략지역 장악을 요구하면서 메탁사스에게 최후통첩을 건넸다. 그러나 메탁사스는 즉각 이를 거부했다.

박물관에 전시된 1940년 11월22일치 신문 <아시르마토스>(Asyrmatos)는 ‘그리스의 깃발이 코리차에 휘날린다. 우리의 군대가 시내로 진군한다’, 같은 신문 12월9일치에는 ‘아르기르카스트로(알바니아 남부)가 그리스에 함락됐다. 돌격하는 우리 군대는 이탈리아 특수부대를 격파하고 있다’는 기사가 전시돼 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의 강고한 방어에 부딪혀 침략에 실패했다. 이를 계기로 절대권력자 메탁사스는 절대적인 권위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나갔고, 이탈리아군의 침략을 저지했다.

전시관에는 벨레스-네스토스(메탁사스 라인)에 설치된 요새와 이에 대한 독일군 주력부대의 공격 모습이 담긴 사진과 그림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도 견강부회식 해석이다.

설명문에는 “독일군은 그리스군의 용맹성에 감탄했다. 그들은 포로를 잡지 않았고, 그리스기를 남겨두고 군부대를 해체할 것이라고 밝혔다. 팔루로네스 요새가 함락되자 독일군은 그리스 병사들에게 경례했다”고 돼 있다. 그리스가 독일군에 점령됐지만, 독일군이 그리스 병사들의 용맹성과 불타는 애국심에 경의를 표했다는 얘기다.

설명문은 더 이어졌다. “1941년 5월4일 제3제국 의회에서 히틀러는 다음과 선언했다. ‘역사적 정의를 위해, 나는 우리의 모든 적들, 그리스 병사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굴의 투지로 용감하게 싸웠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국의 전쟁사를 다룬 전쟁기념관은 철저히 자국 중심의 역사로 기록되는 듯해 씁쓸했다.

메타삭스 라인의 요새는 대단히 견고했던 것 같다. 요새의 토치카 진지는 일제 강점기 일본군이 한라산 어승생악에 설치한 토치카 진지와 모양이 흡사했다. 요새의 지하부도 조선인들을 동원해 건설했던 제주도 모슬포 갱도진지와 많은 부분이 닮았다.

요새 건설은 비밀리에 이뤄졌다. 남부 지방의 노동자들이 암피폴리스(Amphipolis)로 배를 타고 온 뒤 그곳에서 기차와 차량을 이용해 목적지도 모른 채 야간에 현장에 도착했다. 요새는 지하갱도로 연결된 지하부와 지상부로 구성됐다. 각종 시설이 갖춰져 외부의 지원 없이 열흘 동안은 견딜 수 있게 돼 있다. 독가스에도 버틸 수 있도록 완벽한 소독시설을 갖췄다고 한다.

1942년 11월 파괴된 고르고포타모스 육교의 전경. 영국군의 주도 아래 그리스 저항단체들의 공동으로 독일군의 병참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고르고포타모스 육교 파괴작전은 전국적으로 그리스의 저항운동을 고무시켰다. 전쟁박물관 소장
1942년 11월 파괴된 고르고포타모스 육교의 전경. 영국군의 주도 아래 그리스 저항단체들의 공동으로 독일군의 병참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고르고포타모스 육교 파괴작전은 전국적으로 그리스의 저항운동을 고무시켰다. 전쟁박물관 소장

게르마노스(Germanos)가 1821년 아기아 라브라 사원에서 그리스 독립전쟁 깃발을 들고 있다. 전쟁박물관 소장
게르마노스(Germanos)가 1821년 아기아 라브라 사원에서 그리스 독립전쟁 깃발을 들고 있다. 전쟁박물관 소장

독일군이 그리스를 침공할 때 가장 저항이 강경했던 곳은 크레타섬이다. 그리스군대와 영국군의 저항으로 독일군은 곤경에 처했다.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크레타 전투’ 부분은 수많은 독일군 공수부대원들의 낙하모습과 전투모습 등이 사진과 당시 장비로 채워졌다.

사보타지를 할 경우 그리스인(16~60살)들을 보복처형할 것이라는 독일군 당국의 포고문, 주택징발 고시문, 이에 맞선 저항단체의 포고문도 있다. 관람하던 그리스인에게 민족인민해방군의 포고문이 어떤 내용인지 물었다. “벽이 피로 칠해진 코르노보의 적들을 보복하겠다.” 민족인민전선과 민족인민해방군은 불굴의 용기로 독일군에 맞섰다. 이곳에는 민족인민해방군과 적대적 관계였던 민족민주그리스연맹 지도자 나폴레온 제르바스(Napoleon Zervas)의 흉상과 사진, 그가 썼던 서류, 타자기 등도 전시돼 있다.

■ 내전의 기록은 어디에 그리스 전쟁박물관은 독일을 대표로 하는 추축국 점령 당시 저항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저항단체에 대한 부분은 지극히 적은 부분만을 할애했다. 오히려 아테네에서 크레타로 후퇴한 뒤 이집트로 망명한 망명정부가 창설한 군대에 대해서는 긴 설명과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이들이 그리스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던 것처럼 보일 정도다.

정부가 독일군의 침략에 도망가고, 영국의 지원으로 살아갈 때 그리스 본토에서 점령군을 상대로 처절하게 저항운동을 벌였던 저항운동의 중심은 민족해방전선·민족인민해방군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이들을 중심으로 뭉쳤고,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그런데 박물관에는 ‘신성중대’(또는 ‘신성대대’)의 각종 사진들이 전시돼 저항운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듯하다. 이 부대는 사실 추데로스(Tsuderos) 망명정부의 부총리 카넬로풀로스(Kanellopoulos)의 승인에 따라 1942년 9월 팔레스타인 카프리오나에서 창설됐고, 같은 달 이집트 메디에서 공식적으로 이름이 붙여졌다. 민족인민해방군 소속으로 점령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군사 지휘관들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리스 전쟁박물관 건물 앞의 조형물.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그리스 전쟁박물관 건물 앞의 조형물.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1942년 11월25일 영국군 특수전 요원들의 지도 아래 민족인민해방군과 민족민주그리스연맹이 공동으로 파괴한 고르모포타모스 육교 파괴 사진도 전시됐으나, 설명은 ‘1942년 11월 25일. 민족저항운동의 상징’이라고 적힌 것이 전부다. 이 육교 파괴 작전은 전국의 그리스인들을 고무시켰고 점령 시기 최대의 작전이었지만, 전쟁박물관의 설명은 많은 내용이 생략돼 있다. 민족인민해방군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스테파노스 사라피스(Stefanos Sarafis) 장군은 덜렁 사진 한 장이다.

아테네 대기근의 사진들은 관람객들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굶주림에 지친 발가벗은 아이들의 피골이 상접한 모습, 기근으로 숨진 사람들을 손수레로 치우는 장면, 어린이들에게 식량이나 과자를 나눠주는 모습 앞에서는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전쟁박물관이라는 성격 때문인지 해방 이후 그리스 내전에 관한 전시자료는 거의 없다. 그리스 내전은 국내적으로는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희생됐으며, 국제적으로는 냉전체제를 공식화한 트루먼 독트린을 만든 계기가 된 사건이었지만 그에 대한 설명이나 자료 전시는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리스 정부가 1989년 화해법을 만들어 점령 시기 ‘게릴라’들을 일컫는 ‘비적’, ‘도적’을 ‘저항의 전사’로 바꿨는데도 전쟁기념관의 내전의 기록은 인색하다.

해방의 기쁨과 파판드레우(Papandreou) 망명정부 총리가 귀국해 아크로폴리스에서 국기를 게양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는 곧바로 한국전쟁으로 이어진다. 한국전쟁은 전쟁박물관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이들의 한국 파병과 한국에서의 전투모습이 사진으로 전시돼 있다.

2000년 1월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작성됐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국가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세력들은 제주 4·3을 여전히 ‘폭동’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각종 소송을 제기해 유족들의 상처를 덧나게 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4·3 문제의 완전 해결’을 공약한 박근혜 정부는 어떤 입장을 내놓을수 있을까? 아테네/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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