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농부 윤명옥씨가 지난 4일 오후 자신의 고추밭에 선 고춧대를 예취기로 자르고 있다. 오윤주 기자
지난 4일 오후에 찾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3천㎡(900여평) 규모의 한 고추밭. 요란한 예취기 소리에 족히 3천 그루는 돼 보이는 고춧대가 모조리 잘려나갔다. 밭주인 윤명옥(73)씨가 입을 열었다.
“혹시 비 그치면 괜찮아질까 했는데 태풍까지…. 이젠 희망이 없어. 자꾸 미련이 생겨서 안 되겠어. 아예 잘라놓고 고춧대 마르면 치워야지.”
고추 종묘사 모자를 눌러쓴 윤씨는 연신 ‘후, 후’ 한숨을 토해냈고,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윤씨가 발을 옮길 때마다 땅에 떨어져 있던 병든 고추가 밟혀 터졌다. 지난달 이미 옆 밭 1천㎡(300여평)를 갈아엎고 들깨를 심었다는 윤씨는 “열일곱부터 농사지었는데 이런 난리는 처음이야”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추농사 1200평 지은, 명색이 50년 농사꾼이 돈 주고 고추 샀다면 말 다 했지. 농사는 지어 뭐 해. 이제 접어야겠어.”
괴산 농부 윤명옥씨가 탄저병 등이 확산된 고추를 가리키고 있다. 오윤주 기자
멀찍이서 반찬용 애동고추(풋고추)를 따던 아내 김영숙(70)씨가 “엊그제 아들딸 주려고 장에 가서 한근에 2만원씩 주고 난생처음 고추 60근을 샀어. 눈물이 핑 돌았지만 나보다 더 속상할 남편 걱정에 참았지. 요새 자꾸 술을 마셔 걱정이야”라고 귀띔했다.
이웃 문광면의 신은철(61)씨 사정도 비슷했다. 그는 3300㎡(1천평)에 고추를 심었지만 지난 7, 8월 2차례 400근을 따고 밭을 갈았다. “비가 너무 내려 탄저병이 돌더니 고추가 무르고 빠져 바닥에 떨어진 게 더 많아. 배추라도 심으려고 밭을 갈았는데 집중호우, 태풍 때문에 시기를 놓쳐버렸다니까.”
괴산읍 고추 방앗간에서 만난 김길홍(75·괴산군 사리면)씨는 “이런 장마에 고추가 매달려 있는 것만 해도 용하다. 하늘이 농사꾼들에게 너무 가혹하다”고 했다.
전체 면적 78%가 임야인 괴산은 밭농사가 많다. 해발 250m 안팎의 고랭지, 큰 일교차 등 이점을 살린 ‘청결고추’는 지역 특산물이다. 올해 1258농가가 484㏊에 고추를 심었다. 지난해 513㏊에서 1540t을 수확했지만 올핸 크게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일 괴산 농협 하나로마트 옆에 선 미니 고추시장에서 시민들이 고추를 고르고 있다. 오윤주 기자
괴산은 지난 4~6일 20회 ‘괴산 청결고추축제’를 계획했지만, 코로나19 감염 우려에 온라인으로 열었다. 지난해 축제에선 10근(6㎏)짜리 6800포대를 팔았지만, 올핸 서울 양재동, 충북 청주, 괴산 등의 농협하나로마트와 온라인매장 등을 통해 2754포대를 파는 데 그쳤다. 지난 4일 오후 괴산 농협하나로마트에서 만난 한 소비자는 “해마다 괴산 고추축제 때 고추를 샀다. 올핸 작년보다 값이 많이 올랐지만 김장 때는 더 오를까 봐 미리 샀다”고 말했다. 김웅태 괴산군 농식품유통과 주무관은 “올핸 장마, 병해충 등이 겹치면서 수확도, 판매도, 수익도 크게 줄 것으로 보인다. 농가·자치단체 모두 걱정이 크다”고 말했다.
괴산과 ‘청결고추’ 상표를 함께 쓰는 이웃 음성도 비슷하다. 음성군 금왕읍에서 고추 5천㎡(1500여평)를 재배한 조남정(68)씨는 “고추는 7월 말부터 9월까지 3~5차례 정도 순차적으로 수확하는데 올핸 1~2번 따고 접은 농가가 수두룩하다. 장마·태풍 때문에 병해충이 많고, 일조량 등이 적어 과육이 쭈글거리는 등 상품성도 좋지 않다. 공급이 적어 값은 올랐지만 수확이 워낙 안 좋아 올해 고추농사는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괴산 농민 김길홍씨가 4일 괴산의 한 고추 방앗간에서 자신이 수확한 고추를 빻으려고 기다리고 있다. 오윤주 기자
고추 재배면적 254.1㏊ 가운데 46㏊(18%)에서 매몰·침수·유실 피해 신고가 접수된 충주시 식량작물팀 오희균 주무관은 “정밀조사를 해봐야 하지만 고추 재배농가의 피해 신고가 너무 많아 놀랄 정도다. 피해 정도에 따라 재난지원금 지급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재기 조짐이 보이는 등 유통 쪽도 들썩인다. 유기농산물 유통 영농조합법인 하늘농부 조철호(54) 대표는 “아직 김장철이 아닌데도 유통 분야에선 물량 확보전이 시작됐다. 값을 떠나 제대로 된 상품을 구하기조차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작황 부진에 따른 수확·출하 감소는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조사를 보면, 지난달 건고추(화건-기계 건조, 도매) 상품 600g(1근)이 1만7792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9763원에 견줘 82.2%, 평년 9334원에 견줘 90.6% 폭등했다.
조남욱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연구원은 “너무 길었던 장마로 인한 탄저병 등이 확산되면서 작황이 좋지 않아 수확량, 출하량이 줄면서 가격은 크게 오름세다. 태풍이 잇따라 지나간 터라 시장 상황은 또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태형(56·괴산읍 정용리)씨는 “정부가 농업 현장과 시장을 살펴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김장 이전부터 곳곳에서 대란이 일어날 수 있다. 코로나·기후 탓만 하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다”고 말했다.
괴산 음성/오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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