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전 경북 청송군 진보면 시량리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김영길씨가 자신의 과수원에서 태풍으로 떨어진 사과를 살펴보고 있다. 김일우 기자
“사과가 떨어진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떨어진 거라….”
지난 5일 오전 경북 청송군 진보면 시량리 과수원에서 만난 김영길(53)씨는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3만9669㎡(1만2천평)에 이르는 김씨 과수원 바닥에는 설익은 사과들이 떨어져 나뒹굴고 있었다. 제9호 태풍 ‘마이삭’이 쓸고 지나가며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사과 40%가량이 떨어졌고, 사과나무 2500그루 가운데 10%는 바람에 쓰러졌다. 태풍이 지나간 지난 3일 아침 과수원에 주저앉아 담배 10여 개비를 연달아 피웠다는 김씨가 말을 이어갔다.
“사과 농사 12년째인데…. 올해가 제일 힘드네요.”
과수원 한쪽에는 김씨가 집에서 가지고 나온 전기톱과 빨간색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바구니 안에는 빵 몇조각과 옥수수 한개, 물이 들어 있었다. 오늘 그의 점심이다. 그는 태풍이 지나간 뒤 사흘 동안 매일 새벽 4시30분 과수원에 나와 종일 쓰러진 사과나무를 베거나 일으키는 작업을 했다. 너무 많이 쓰러진 나무는 아예 일으킬 수도 없었다. 그는 또 바닥에 떨어진 사과가 너무 많아 언제 다 치울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바로 치우지 않으면 나방 등이 몰려들어 멀쩡한 사과에 탄저병 등을 옮기기 때문에 마냥 미룰 수도 없다.
“이건 정상품이 못 돼서 버릴 수밖에 없어요.” “이건 탄저병에 걸렸네요.”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사과들도 연신 바닥에 버려졌다. 일조량이 부족해 사과가 제대로 익지 못한데다, 비가 많이 오며 탄저병 등 병해도 심해진 결과다. 김씨는 “사과가 떨어진 건 떨어진 건데, 10년 넘게 키운 사과나무를 베려니 눈물이 난다”며 “사과나무 심으면 5년이 지나야 첫 수확이 가능하다. 사과도 하필이면 크고 좋은 것만 골라서 다 떨어져 속이 상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5일 오후 경북 상주시 사벌국면 용담리에서 배농사를 짓는 이정원씨가 자신의 과수원에서 태풍으로 떨어진 배를 살펴보고 있다. 김일우 기자
“태풍이 또 온다는데 덜 익어도 그냥 일찍 따는 게 낫죠.”
지난 5일 오후 경북 상주시 사벌국면 용담리에 배를 가득 실은 1t 화물차가 멈춰 섰다. 화물차 주인으로 이곳에서 4만9586㎡(1만5천평) 규모로 배농사를 짓는 이정원(66)씨는 “나뭇가지에 달려 있던 배가 10~20%는 떨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국에서 배 생산량이 두번째로 많은 상주에서도 사벌국면 일대는 상주 배 생산량의 90%를 차지하는 주산지다. 땅이 비옥하고 자연재해가 적은 덕분이지만, 이번엔 상주 전역이 장마와 태풍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이씨의 과수원 배나무 밑에는 종이 포장지에 싸인 배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태풍에 떨어진 배를 나무 밑에 모아놓은 것이다. 다행히 비바람에 쓰러진 배나무는 거의 없었다. 뿌리가 옆으로 퍼지는 사과나무와 달리 배나무는 뿌리가 아래로 뻗어내려 비바람에 상대적으로 강하다. 하지만 일조량과 일교차가 적은 만큼 배 크기가 작았다. 게다가 올해는 지난해(9월20일)보다 보름이나 일찍 배를 땄다. 태풍에 떨어져 버리는 것보다 덜 익었더라도 일찍 따서 파는 게 낫기 때문이다.
이씨는 “보험 조사라도 빨리 해주면 낙과로 즙이라도 짜서 몇만원은 건질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농작물재해보험에 가입했지만, 전국적으로 농작물 피해가 많아 보험회사 조사 인력의 일손이 달리는 탓에 조사가 늦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풍이 지나가고 이틀이 지났지만 사벌국면 안에서 농작물 피해 조사를 마친 농가는 한 곳도 없었다.
청송 상주/글·사진 김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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