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저병 등이 확산된 윤명옥씨의 고추밭. 오윤주 기자
“퇴비 1050포 378만원, 농약 5번 250만원, 종자 12봉지 21만원, 비료 32포 32만원, 거름 32만원, 비닐 28만원 등 품삯은 빼고 줄잡아 1천만원 정도 들었어. 그런데 농사는…. 이젠 농사 그만 지어야겠어.”
지난 4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자신의 고추밭에서 만난 윤명옥(73)씨가 ‘빚걱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4천㎡(1200여평)에서 지난해 고추 4천근(1근=600g)을 수확했다는 그는 “올해는 160근밖에 수확하지 못했다”며 누렇게 뜬 고추들이 매달려 있는 고춧대를 베어내고 있었다. “탄저병에 무름병이 겹쳐 쓸 게 하나도 없어. 50일 넘게 비가 왔으니 농사가 제대로 될 리 없지. 주변 농가 대부분 비슷해. 정말 마음이 너무 아프구먼.”
이런 전례없는 작황 부진은 더위 대신 물난리만 잦았던 여름 날씨 탓이 크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농업관측본부 자료를 보면, 누적 강수량은 716㎜로, 평년(263㎜)의 두배를 훌쩍 웃돌았다. 농업관측본부는 올해 전국 3만1146㏊에서 고추 6만2624~6만4784t을 수확할 것으로 전망했다. 3만883㏊에서 7만8468t을 수확한 평년에 견줘 17.4~20.2% 감소한 수치다. 농업관측본부 조남욱 연구원은 “올해 충북·경북 등 고추 주산지는 고추 생장에 필요한 일조량은 평년의 절반 수준인데다 탄저병 등 병충해를 동반하는 (많은 비가 내려) 강수량은 배가 넘는 등 악조건 속에 생산량이 크게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사상 최장 장마와 집중호우, 연쇄 태풍이 지나간 가을 들판에 시름이 깊다. 농민들은 ‘올해처럼 농사가 힘든 적이 없었다’며 한숨을 내쉬고, 도시민들은 추석을 앞두고 코로나19 확산에 ‘밥상 물가’ 폭등까지 겹치게 됐다며 걱정하고 있다. ▶관련기사 8·9면
지난 4일 전남 해남군 해남읍 내사리 인근 논에서 김광수씨가 제9호 태풍 ‘마이삭’ 때 쓰러진 벼를 살펴보고 있다. 김용희 기자
전남 해남에서 친환경 조생종 벼(일찍 심어 8월 말 수확하는 품종) 농사를 짓는 김광수(60)씨는 “빛깔이 누렇고 껍질 안에 90% 이상 들어차야 제값을 받는데 이번 벼는 80% 수준에 청미(덜 여물어 푸른 쌀)와 쭉정이가 많이 섞여 있었다. 올해 수확량은 10% 떨어질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올해 7차례 벼 생육상황을 조사한 농촌진흥청은 “볏논 10a(300평)의 생산량이 평년 530㎏ 안팎인데 올해는 26.5㎏쯤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재배 면적이 지난해 73만㏊에서 72만6천㏊로 줄어든데다 긴 장마에 따른 일조량 부족으로 ㎡당 벼알 수가 3만3841개로 평년 3만4005개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벼농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만생종(늦게 심어 9~10월 수확하는 품종)은 9월 햇볕에 따라 ‘평년작’은 기대해볼 수 있다는 게 농민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다.
경북 청송과 전남 나주의 과수농가들은 “이상기후로 착과가 잘 안됐고, 병해충이 돌아 품질도 떨어졌다. 그나마 (태풍으로) 낙과 피해가 극심해 생산비도 못 건질 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작황 부진으로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면, 도시민들 사이에서는 장바구니 물가가 걱정스럽다. 실제 농수산식품유통공사와 농촌경제연구원의 가격동향을 종합하면, 고추·오이·호박·사과·배·포도 등 농산물값이 예년보다 25% 이상 오른 시세가 한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채소인 배추·무는 지난해 가격의 2배에 접근했다. 13일 기준 고랭지 배추 10㎏은 지난해 1만3660원에서 올해는 2만4740원으로 81.1%, 고랭지 무 20㎏은 지난해 1만3천원에서 2만5480원으로 96.0% 올랐다. 열무 4㎏은 1만1640원으로 지난해(9400원)에 견줘 23.8% 올랐다. 풋고추는 10㎏ 한상자가 7만6600원으로 지난해 6만1480원보다 24.5%, 홍고추는 한상자가 5만4840원으로 지난해 4만4920원보다 22.0% 인상됐다. 30㎏ 단위로 거래하는 건고추는 값이 갑절까지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김장에 대비해 물량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벌써 치열하다. 8월 중순 품귀현상으로 가격이 2~3배 껑충 뛰어올랐던 상추는 10여일 전에야 상승세를 멈췄다.
과일은 사과(홍로) 10㎏ 한상자가 6만5020원으로 지난해(3만8480원)에 견줘 68.9%, 배(원황) 15㎏ 한상자는 4만5940원으로 지난해(2만8600원)보다 60.6% 올랐다. 쌀(일반미)은 20㎏ 한포대가 이날 5만780원으로 지난해 같은 날(4만9356원)에 견줘 2.8% 올랐다.
서울의 20대 직장인 ㄱ씨는 “지난달 동네 마트에 갔더니 상추 한봉지(100g)를 4천원에 팔았다. 삼겹살보다 비싼 상추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후로 상추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버틴다”고 말했다. 광주의 40대 주부 ㄴ씨는 “코로나로 집에서 아이 셋한테 세끼를 챙겨주는데 수박 한 덩이 2만5천원, 배추 1포기 1만원, 무 한개 4천원, 애호박 한개 2500원, 오이 한개 1500원 등으로 오른 농산물값이 부담스럽다. 추석물가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벌써 겁난다”고 전했다.
지난 5일 오전 경북 청송군 진보면 시량리에서 사과농사를 짓는 김영길씨가 자신의 과수원에서 태풍으로 떨어진 사과를 살펴보고 있다. 김일우 기자
문제는 이상기후에 따른 작황 부진이 올해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농촌경제연구원 성재훈 부연구위원은 “기온, 바람, 강수 등 예측자료로 볼 때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기후는 되풀이될 것이다. 이상기후에 취약한 지역과 작물을 찾아내 두루 알리고, 재해대책 법령을 고쳐 보상에서 예방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농촌진흥청 식량산업기술팀 강석주 지도관도 “쌀은 소비량보다 생산량이 많아서 작황이 좋지 않아도 가격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기후변화 속도가 워낙 빨라 이상기후에 대비한 품종개량과 기술개발이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안관옥 오윤주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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