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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벽걸이 찬장이 ‘와장창’… 할머니는 피할 틈도 없었다

등록 2020-12-02 04:59수정 2020-12-02 08:14

[기획] 소셜믹스 아파트엔 차별이 산다
시설노후로 사고 감수해야는 임대살이
80대 노인이 떨어진 찬장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난 서울 강서구 ㄱ아파트 4단지 집에서 딸 이성숙씨가 할머니의 생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80대 노인이 떨어진 찬장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난 서울 강서구 ㄱ아파트 4단지 집에서 딸 이성숙씨가 할머니의 생전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서울 강서구 ㄱ아파트 4단지 임대아파트에 사는 지아무개(83)씨는 지난해 6월12일 아침 8시10분께 옆집에서 들려온 ‘와장창’ 소리를 또렷이 기억했다. ‘살려달라’는 비명 소리에 옆집 현관문을 열려고 했지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았다. 지씨의 부탁을 받은 이웃이 119에 신고한 시각은 8시30분. 이후 소방대원이 출동해 확인한 현장은 처참했다.

벽에 붙어 있어야 할 싱크대 상부장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 아래 정아무개(당시 87살)씨가 깔려 있었다. 경찰의 연락을 받고 딸 이성숙(52)씨가 오전 10시께 병원에 도착했지만, 정씨는 이미 숨진 뒤였다. 부검 결과, 정씨는 떨어진 싱크대 상부장에 갈비뼈가 부러져 숨진 것으로 나타났다.

정씨는 2004년부터 서울주택도시공사(SH·에스에이치)가 공급한 영구임대아파트인 이 단지에서 살아왔다. 1992년 지어진 이 아파트에 사는 1936가구 가운데 80% 이상은 기초생활수급자·노인·장애인 등 취약계층이다. 이 단지는 바로 옆 5단지와 함께 강서지역 대표적인 임대아파트 단지다.

정부 주도로 가양동 일대에 영구임대아파트 4개 단지와 분양아파트 4개 단지가 함께 들어서면서 울타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빈곤층과 중산층이 섞여 사는 동네가 됐다. 하지만 물리적으로만 한 지구일 뿐, 분양과 임대 아파트 두 진영 사이 벽은 높다. 이웃 아파트 한 입주민은 “바로 길 건너지만 수준 차이가 크게 난다. 분양과 임대는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라고 했다.

80대 노인이 싱크대 상부장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 서울 강서구 ㄱ임대아파트 집에서 사고 희생자의 사위인 박근배씨가 상부장이 달려 있던 벽면을 가리키며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80대 노인이 싱크대 상부장에 깔려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 서울 강서구 ㄱ임대아파트 집에서 사고 희생자의 사위인 박근배씨가 상부장이 달려 있던 벽면을 가리키며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시설노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임대살이

인테리어 업체들은 상부장이 떨어진 원인으로 노후화와 함께 벽과 상부장을 연결하는 시공목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을 꼽았다. 가양동에 있는 한 인테리어 업체는 “싱크대는 벽에 시공목을 붙인 뒤 걸어서 설치하는데, 지지대 역할을 하는 시공목이 문제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다른 업체는 “오래되다 보니까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떨어진 것 같다”고 추정했다.

딸 이씨는 평소 어머니가 ‘싱크대 상태가 불안하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엄마가 관리사무소에 싱크대를 바꿔달라고 했지만 ‘아직 교체 시기가 되지 않았다’는 답만 들었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분양세대와 달리 기초연금 등 45만원으로 한달을 생활하던 정씨가 싱크대를 교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관리사무소장과 에스에이치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관해 ‘혐의 없음’ 결론을 내렸다. 정 할머니가 상부장과 관련한 민원을 제기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위 박근배(52)씨는 “싱크대에 깔려 사람이 죽었는데 공사한 사람, 관리·감독하는 사람, 그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이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니냐. 왜 사과도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사고 소식에…그릇은 방바닥에, 설거지는 화장실에서

사고 뒤 에스에이치는 집집마다 싱크대 상부장 보수 공사를 했지만, 주민들의 충격과 불안감은 여전하다. 옆집에서 이웃이 숨진 뒤 지씨는 이후 그릇들을 싱크대에 넣지 않고, 거실 바닥에 늘어놓고 지낸다. 설거지도 화장실에서 한다. 정씨 아랫집에 사는 주민 ㄱ(79)씨도 사고 소식을 들은 뒤엔 “(상부장에) 그릇을 안 넣고 휴지나 플라스틱처럼 가벼운 것만 얹는다”고 말했다.

숨진 정씨의 옆집에 사는 주민 지아무개씨는 상부장에 그릇을 넣지 않고 바닥에 놓고 산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숨진 정씨의 옆집에 사는 주민 지아무개씨는 상부장에 그릇을 넣지 않고 바닥에 놓고 산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시설물에 문제가 생겨도 곧바로 교체가 안 되거나, 임대아파트에 산다는 것 때문에 주눅이 들어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주민 ㄴ(71)씨는 “주방 환풍기에서 소리가 너무 크게 나고 기름이 떨어지는 등 문제가 생겨서 바꿔달라고 했지만, (시설물 교체 주기인) ‘15년이 돼야 해 앞으로 2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자기 돈 10만원을 들여 환풍기를 교체했다.

ㄷ(78)씨는 싱크대 하부장 경첩이 부서졌지만, 그대로 두고 있었다. 그는 지난해 관리사무소에 고쳐달라고 요청했지만 “‘고쳐주겠다’고만 하고 실제 오지는 않았다”고 했다. ‘왜 다시 수리를 요구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는 “요새 집도 너무 비싼데 여기서 살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 웬만해선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ㄱ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 ㄷ(78)씨는 주방 하부장 문 경첩이 파손됐지만 문이 어그러진 채로 살고 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서울 강서구 ㄱ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민 ㄷ(78)씨는 주방 하부장 문 경첩이 파손됐지만 문이 어그러진 채로 살고 있다. 서혜미 기자 ham@hani.co.kr

한 단지에서 임대세대 70곳이 천장 누수 신고했지만

소셜믹스 단지인 서울 강서구 ㅅ아파트 3단지에 사는 김상진(69)씨는 비가 오면 천장에서 물이 새 마루에 빗물통을 받치는 게 일상이 됐다. 지난 8월 장마 뒤 거실 천장에 얼룩이 생기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물 새는 양이 많아졌다.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였지만 김씨는 “관리사무소에 문제를 신고한 뒤 에스에이치에도 하자 접수가 됐다고 들었는데 두달이 지나도록 점검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에스에이치가 2007년 공급한 이 아파트는 분양과 임대(장기전세) 세대가 절반씩 섞여 산다. 임차인대표회의는 올해 여름 뒤 천장 누수를 신고한 임대세대가 70곳이 넘는다고 밝혔다. 누수로 주방 천장과 벽면이 약해진 탓에 싱크대 상부장이 기울어 사고를 당할 뻔했다는 임대세대도 있었다. 관리소 쪽은 “분양세대 중에 천장 누수가 발생한 집도 있었지만, 이들은 직접 비용을 부담해 수리했다”며 “그러나 임대세대는 에스에이치에 수리 접수를 하는 절차와 비용 문제 때문에 수리가 늦어진다”고 말했다.

서울 강서구 ㅅ아파트 3단지 임대세대 주민들이 천장에서 물이 샌다는 민원을 낸 지 두달이 지났지만, 보수공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입주민 제공
서울 강서구 ㅅ아파트 3단지 임대세대 주민들이 천장에서 물이 샌다는 민원을 낸 지 두달이 지났지만, 보수공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입주민 제공

서울 강서구 ㅁ아파트 6단지에서도 스프링클러 부실시공에 따른 누수 문제로 임대세대와 에스에이치가 갈등을 겪었다. 누수 피해를 본 주민들은 지난해 8월 “스프링클러 동관에 싸구려 불량 자재를 썼다”며 보수를 요구했지만, 에스에이치 쪽은 자재와 시공에 문제가 없다고 맞섰다. 하자 보수가 늦어지는 동안 관리소가 누수를 막으려고 스프링클러 밸브를 잠근 사실이 소방 점검 과정에서 드러나 주민이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동대표 김아무개씨는 “만약 불이 났으면 큰 인명 피해로 이어졌을 것”이라며 “비용을 핑계 삼아 하자 관리에 소극적인 에스에이치가 스스로 ‘임대주택은 부실·사고 아파트’라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부실 관리’ 지적에 에스에이치는 “접수일로부터 15일 안에 보수처리를 권장하고 있으며, 보수처리 기간과 보수처리율은 주기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고 답했다.

서혜미 옥기원 기자 ham@hani.co.kr

▶바로가기: “임대는 상관마” 경비원 해고·잡수입 사용도 분양 마음대로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9724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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