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랑구 신내동 데시앙아파트 정운택 공동주택대표(오른쪽부터)와 김보곤 관리소장 등 입주민이 함께 25일 오후 단지내 관리사무소 회의실에서 아파트 운영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정부가 실거주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현실은 모든 권한이 소유권 중심이다. 소셜믹스 운영과 관리에서 실거주자인 임차인에게도 권한이 필요하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의 지적이다. 소셜믹스 단지의 ‘관리’를 소유자가 아닌 거주자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최 소장 말고도 많은 전문가들이 동의한다. 분양세대와 임대세대가 ‘공동대표회의’를 꾸려 함께 아파트 운영을 하는 일부 단지의 사례는 ‘공동 운영’이 분쟁을 방지하는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임을 보여준다.
소셜믹스 정책 취지가 퇴색하는 이유는 일부 구성원만이 아파트 관리권을 독점하기 때문이다. 노아무개 서울 마포구 ㅅ아파트 10단지 전 임차인대표회의 회장은 “분양인과 똑같이 관리비를 내는데 임차인과 아무 협의 없이 분양인 마음대로 부당하게 관리비를 쓰는 게 문제”라며 “소셜믹스는 임차인과 분양인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할 공동체다. 분양인의 독재를 막기 위해서라도 임차인에게 견제할 수 있는 권한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은 ‘분양세대로 구성된 입주자대표회의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 등 임대사업자가 혼합주택단지 관리에 관한 사항을 공동 결정하되 임대세대와는 임대사업자가 사전에 협의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임대사업자를 통한 사전협의 조항이 있을 뿐 임대세대는 결정 주체가 아니다.
앞서 서울시는 2007년 자체 규정인 분양임대혼합단지 공동주택관리규약을 개정해 소셜믹스 주택에선 분양세대와 임대세대가 공동대표회의를 의무적으로 구성하게 한 바 있다. 하지만 2015년 이 내용이 삭제됐다. 2017년 김현아 의원(전 자유한국당)이 임대세대도 함께하는 공동대표회의를 의무화하는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오정석 에스에이치(SH)도시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임대세대 비중이 훨씬 큰 단지에서도 제도상 분양세대에서 의사결정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해야 당장의 갈등이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 ㅅ아파트 관리사무소 관계자는 “분양과 임대를 섞어놓기에만 급급해 매일 곳곳에서 갈등 민원이 쏟아지지만, 기준이 없어 적절한 조처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관리소장들 사이에서 소셜믹스가 최악의 근무지로 꼽히는 이유”라고 말했다.
의무조항이 아닌 공동대표회의를 운영하면서 임차인 쪽 의견을 아파트 관리에 반영해주는 단지들도 있다.
서울 중랑구 신내데시앙포레(분양 720가구, 임대 1176가구)는 입주가 시작된 2013년부터 여러 해 동안 분양과 임대세대 사이 갈등이 극심했다. 최성주 전 입주자대표회장은 “(입주 초에는) 관리소장이 7명이나 바뀌고 회장단이 두세번 바뀔 정도로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파트 하자보수 건과 근처 고속도로·주택 건설로 인한 소음·분진 문제 등 공동 대응이 필요한 이슈가 터져나왔고, 주민 20명가량은 2014년 주민자치회를 꾸렸다. 자치회는 나눔 행사 등에 분양세대와 임대세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참여할 기회를 마련해 주민 화합을 꾀하기 시작했다. 공동대표회의 구성 의무 규정이 사라진 2015년 이후에도 이를 운영하며 수시로 현안을 협의했다. 김수길 전 임차인대표회의 회장은 “이틀이 멀다 하고 (최성주 전 입주자대표회장과) 만났다. 전화를 하루에 10통씩 한 적도 있다”며 “첫째도, 둘째도 대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내데시앙포레에서 약 1㎞ 떨어진 신내데시앙아파트(분양 359가구, 임대 967가구)도 한달에 한번 양쪽 대표가 모인 공동대표회의를 연다. 관리회사 계약 문제를 두고 소송까지 벌였던 양쪽은 법적 분쟁을 중단한 뒤 대화로 견해 차이를 좁혀가고 있다. 김군수 전 임차인대표회의 회장은 “싸워봤자 주민만 손해라는 인식을 같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보곤 관리사무소장은 “회의를 따로 하다 보면 (입주자와 임차인 간) 합의가 잘 안되는 측면이 있는데, 같이 모이면 합의가 수월하다”고 말했다.
서울 중랑구 신내동 데시앙아파트 정운택 공동주택대표(가운데)와 김보곤 관리소장(오른쪽 둘째) 등 입주민이 함께 25일 오후 단지내 관리사무소 회의실에서 아파트 운영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애초에 분양과 임대 세대의 차별이 생기지 않게 ‘잘 섞는’ 것도 대책 중 하나로 거론된다. 분양동과 임대동을 분리해 짓다가 점차 혼합형으로 옮겨가고 있지만, 개별 단지마다 사정이 달라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현재 임대동을 따로 짓는 쪽은 ‘큰 평수인 분양세대와 작은 평수인 임대세대를 한 동에 섞어 짓는 게 비용이 많이 들어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김진유 경기대 교수(도시교통공학과)는 “임대세대를 작은 규모로만 지을 게 아니라 크게 지어 다양한 평수를 공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에스에이치는 이후 공급하는 일부 소셜믹스 단지들에 분양과 임대 세대를 한 동과 통로에 적극적으로 섞는 방안을 적용해 시범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정부도 중산층 대상 중형(60~85㎡)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본격화하고 있다.
소셜믹스 구성원들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은난순 가톨릭대 소비자주거학과 교수는 “공공이 직접 세금을 들여 소셜믹스를 공급한 취지를 구성원들에게 이해시키고, 조금씩 양보하게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법·제도가 있어도 입주민들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정부와 국회도 소셜믹스가 서울시만의 문제라고 내버려둘 게 아니라 잘 섞일 수 있는 법·제도 기반을 만드는 데 함께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송경화 서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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