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 라훌(가명)씨가 사용하는 재래식 화장실. 화장실은 ㄱ씨 숙소에서 약 20m가량 떨어져 있다.
지난 30일 오후 5시. 일몰이 가까워오는 경기도 포천의 겨울 들녘은 빠르게 기온이 떨어졌다. 가산면의 시금치 비닐하우스에서 만난 라훌(가명·31)이 추위로 곱은 손에 연신 입김을 불어댔다. 그가 자신이 먹고 자는 숙소를 가리켰다. 비닐하우스였다. 작물을 키우는 하우스와 달리 지붕과 벽을 검은색 차광막이 싸고 있었고, 내부엔 컨테이너 두 동이 놓여 있었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컨테이너 한 동의 문을 열어보았다. 작은 세면대와 가스레인지가 보였다. 세면장과 부엌을 겸한 공간이었다. 벽면은 안팎의 온도차 때문인 듯 결로와 곰팡이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라훌이 잠을 자는 옆 컨테이너 안에는 이불과 옷가지, 소형 온열기가 놓여 있었다. “한국 추워. 일할 때 너무 추워.” 라훌이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라훌은 지난해 7월 비전문취업(E-9) 비자를 발급받고 네팔에서 들어온 이주노동자다. 낯선 한국에서 라훌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추위다. 처음 겪는 한반도 내륙의 겨울은 라훌이 네팔에선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극한의 계절이다. 라훌의 숙소에서 20m쯤 떨어진 곳에 마련된 재래식 화장실에는 ‘변’이 1월의 강추위에 꽁꽁 얼어 있었다.
라훌씨가 거주하는 가건물의 부엌 겸 세면 공간. 별도의 바닥 장판이나 타일도 없다.
숙소는 라훌을 추위로부터 충분히 지켜주지 못한다. 소형 온열기는 지역 이주노동자센터에서 사준 것이다. 이마저도 화재 위험 때문에 취침 때는 사용을 못 한다. 방 안 온도계는 영상 7도를 가리켰다. 라훌을 돕는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 김달성 목사는 “지난번에 왔더니 라훌이 추위 때문에 술을 마시고 있더라”며 “네팔에선 일절 입에 대지 않았던데, 한국에 와서 알코올 중독자가 될까 걱정”이라고 했다. 숙소 한쪽에 빈 맥주캔이 가득 찬 비닐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라훌이 비닐하우스에서 생활하는 것은 엄밀히 말해 불법이다. 2020년 12월20일 경기 포천의 가건물에서 생활하던 이주노동자가 동사한 뒤 고용노동부는 별도 대책을 내놨다. 신규 고용허가를 받으려는 고용주는 반드시 제대로 된 기숙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런 규정은 현장에선 지켜지지 않는다. 실제로 라훌의 근로계약서를 보면, 제공하는 숙박시설 유형이 ‘주택’으로 돼 있다. 일반적인 주택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치는 숙소지만, 라훌은 숙박비 명목으로 매달 20만원을 고용주에게 낸다.
사정이 이런데도 이주노동자들은 어려움을 호소할 데가 없다. 비전문취업 비자의 경우 처음 3년의 체류 기간을 준다. 큰 문제 없이 일을 하면 이 기간을 최대 1년10개월 연장할 수 있고, 4년10개월이 지난 뒤에는 재입국 고용허가 신청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체류 기간 연장과 재입국 고용허가 신청 권한이 고용주에게 있다는 점이다.
이주노동자는 일터를 옮기려고 해도 고용주 허가가 있어야 한다. 임금체불 등 예외적 상황에선 사업장 변경을 이주노동자가 요청할 수 있지만, 증명 책임이 이주노동자에게 있어 노동당국에 관련 민원을 넣기도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이주노동자의 체류 기간을 최대 10년까지 연장하는 내용의 고용허가제 개편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개편안도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할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기호 이주노동 연구활동가는 “국가가 이주노동자의 사업장 변경을 허용하면 당장 일부 사업주들은 타격을 입고 도태될 것”이라면서도 “그런 상황이 전체 산업생태계에 미칠 긍정적 영향을 봐야 한다”고 했다. 근로조건이 좋은 쪽으로 이주노동자가 옮겨가면 고용주로선 이주노동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는 다시 내국인의 근로조건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란 뜻이다.
ㄱ씨 숙소 입구. 검은색 가림막이 있는 비닐하우스 안에 컨테이너 가건물이 있다.
이승욱 기자
seugwook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