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에서 부녀자 성폭행 살해 사건이 잇따랐던 1990년 당시 한 고교 앞에서 학부모들이 학생들을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화성연쇄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된 이아무개(56)씨가 ‘모방범죄’로 결론이 났던 8차 사건마저 자신이 저질렀다고 진술한 가운데, 범인으로 검거돼 20년을 복역한 윤아무개(당시 22·농기계 수리공)씨가 당시 재판에서 “고문을 당해 (자신의 범행을)허위로 자백했다”고 주장한 사실이 확인돼 사건의 진실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7일 경찰과 당시 재판기록 등을 보면, 윤씨는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한 가정집에 침입해 잠자던 박아무개(당시 13살)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이듬해 7월 경찰에 붙잡혔다. 같은 해 10월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씨는 항소했지만 2심과 3심에서 기각됐다.
윤씨의 2심 판결문을 보면, 그는 “이 사건 발생 당시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음에도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허위로 진술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검찰 및 1심 법정에 이르기까지 허위진술하도록 강요당했음에도 불구하고 1심은 신빙성이 없는 자백을 기초로 다른 증거도 없이 유죄로 인정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1990년 2월 선고공판에서 “윤씨의 자백 내용과 관련해 신빙성을 의심할만한 부분이 없고 수사기관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볼만한 아무런 자료도 없다”며 윤씨의 항소를 기각했고, 3심은 1·2심의 판결이 정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윤씨는 20년을 복역한 뒤 2009년 가석방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1심 재판부인 수원지법 형사합의2부는 1989년 10월23일 윤씨의 선고공판에서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의)방사성동위원소의 함량이 12개중 10개가 편차 40% 이내에서 범인과 일치한다는 감정결과에 따라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현장에서 수집된 체모 등에 포함된 중금속 성분을 분석해 용의자의 것과 대조하는 이 기법은 당시 첨단 과학수사기법으로 불렸다. 하지만, 현재 전문가들은 이 감별법으로는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며 재판부가 인정한 이 증거에 대한 신뢰성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는 상태다.
이에 대해 당시 수사 형사들은 경찰 수사본부 쪽에 “8차 사건의 현장 증거물인 정액과 음모 등을 분석한 결과 용의자는 B형이었다. 윤씨의 지문도 나왔고 자백도 일관성이 있었다. 행적과 탐문수사에서도 윤씨가 범인인 것을 확인했다”며 가혹행위 등을 통한 강압수사 의혹을 부인했다. 현재 자신이 8차 사건 범행도 저질렀다고 자백한 용의자 이씨의 혈액형은 O형이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지난달 18일 꾸려진 화성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
경찰 관계자는 용의자 이씨가 “다시 시작된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또는 연쇄살인범들의 특징인 ‘영웅심리'로 하지도 않은 범죄사실에 대해 허세를 부리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당시 수사기록 등을 바탕으로 이씨 자백의 신빙성을 검증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7일 기자간담회에서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이 너무 앞서 나가는 바람에 오히려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 수사과정에서 나오는 사실관계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혀 공소권도 없는 중요사건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주장하고 있는 취재진과 마찰을 빚었다.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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