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 사건 현장에서 경찰관들이 감식과 수색 작업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1980년 중반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은 연쇄살인범 이춘재(57)씨가 2일 법정에 선다. 부녀자를 참혹하게 연쇄 살해하고도 30년 넘게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씨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수원지법 형사12부(재판장 박정제)는 2일 오후 1시30분 수원법원종합청사 501호에서 열리는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재심 재판에 이씨를 증인 신분으로 출석시켜 심문할 예정이다.
‘진범 논란’에 휩싸인 8차 사건은 1988년 9월16일 당시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아무개씨 집에서 13살 딸이 성폭행당하고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이듬해 범인으로 지목돼 붙잡힌 윤성여(53)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소하면서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된 윤씨는, 이씨가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한 뒤인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검찰과 경찰은 재수사를 벌여 사건 조사 당시 윤씨를 상대로 가혹 행위와 증거조작 등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국, 법원은 올해 1월 이를 받아들여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범행을 자백한 이씨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잔혹한 연쇄살인범 이씨 모습이 재판에서 처음으로 공개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달 26일 “이씨가 피고인이 아닌 증인의 지위에 불과하다”라며 취재진의 사진 촬영을 허가하지 않았다. 법원조직법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거나, 피고인의 동의가 있을 때는 공판 개시 전이나 판결 선고 시에 법정 내 촬영을 허가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증인은 공판이 시작된 이후 재판장이 이름을 부르면 방청석 등에서 증인석으로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상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춘재는) 피고인이 아니라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한다. 증인은 공판이 시작된 뒤 증인석으로 나오게 될 텐데, 관련 규정상 촬영을 허가할 수 없고, 질서 유지 측면에서도 적절치 않다”라고 말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해 12월11일 ‘이춘재 8차 사건’ 직접 수사에 나서면서 형사사건 공개 심의위원회를 열어 이씨의 실명을 공개했다. 경찰도 엿새 뒤 심의위를 열어 이씨의 이름을 공개했다. 다만, 얼굴은 공개 대상에서 제외했다.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붙잡혀 조사를 받는 이춘재씨의 모습. 연합뉴스
이씨는 1986년 1월 군에서 제대한 뒤 같은 해 9월, 당시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서 이아무개(71)씨를 살해했다. 비극의 시작이었다. 연쇄살인 사건 1차로 기록된 이 사건 이후 그는 1991년 4월까지 10차 사건까지 저지른다.
지난해 7월2일 이 사건 수사를 마무리한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수사본부는 “이씨는 14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다른 9명의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과 강도를 저지른 것 으로 결론냈다”라고 밝혔다. 피해자 대부분은 성폭행 뒤 죽임을 당했다.
피해자 중에는 초등학교 2학년생도 있었다. 1989년 7월7일 화성군 태안읍에 살던 김아무개(당시 8세) 양이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된 ‘화성 초등학생 실종사건’은 주검이 발견되지 않아 살인사건으로 분류되지 않았지만, 이씨가 한 것으로 밝혀졌다. △1987년 12월 수원 화서역 여고생 살인사건 △1991년 1월 청주 여고생 살인사건 △1991년 3월 청주 주부 살인사건 등도 이씨의 범행으로 결론 났다. 1994년 1월 충북 청주에서 처제를 성폭행하고 살해한 혐의로 복역 중인 이씨는, 이 사건까지 합쳐 7년4개월 동안 모두 15명의 부녀자를 살해했다.
30여년간 범인의 윤곽조차 나오지 않았던 연쇄살인 사건은 지난해 7월 사건 현장 증거물에서 채취한 디엔에이(DNA)가 처제 살해 혐의로 수감 중이었던 이씨의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확인돼 영구 미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이 사건에는 연인원 205만여명의 경찰이 동원됐다. 수사대상자는 2만1280명, 용의자는 3천명에 달했다. 하지만 이씨가 저지른 모든 범행은 공소시효가 끝나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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