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재심 청구인 윤성여씨(가운데 꽃다발 든 이)가 법원 청사를 나와 지인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윤성여(53)씨가 32년 만에 공식적으로 누명을 벗었다.
수원지법 형사12부(재판장 박정제)는 17일 수원법원종합청사 501호 법정에서 재심 청구인인 윤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자백 진술은 불법체포·감금 상태에서 가혹행위로 얻어진 것이어서 증거능력이 없다”며 “반면, (내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춘재의 진술은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합리성을 띠고 있어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된다”고 무죄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범행 현장의 음모와 피고인의 음모가 동일인의 것이라는 취지로 국과수 감정인이 작성한 방사성 동위원소 감정서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고 내용에 오류와 모순점이 있어 신뢰할 수 없다”고도 했다.
재판부는 이어 “과거 수사기관의 부실 행위로 잘못된 판결이 나왔다. 오랜 기간 옥고를 거치며 정신적·육체적으로 큰 고통을 받은 피고인에게 사법부 구성원 일원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날 법정에서 “피고인은 무죄”라는 주문이 낭독되자 윤씨는 재심을 도운 박준영 변호사,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이주희 변호사 그리고 여러 방청객과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이 사건을 재수사하고 재심 재판을 이끈 검사들도 피고인석으로 다가가 검찰을 대표해 윤씨에게 인사하고, 악수했다.
이 사건은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 박아무개(당시 13살)양이 자신의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 뒤 살해된 채로 발견되며 시작됐다. 이듬해 범인으로 지목된 윤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상소하면서 “경찰의 강압 수사로 허위 자백을 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결국 윤씨는 20년을 복역하고 2009년 가석방돼서야 자유의 몸이 됐다.
경찰은 지난해 당시 피해자 유품에서 발견된 디엔에이(DNA)를 재분석한 결과, 다른 범죄 혐의로 수감돼 있던 이춘재(57)가 진범임을 밝혀냈다. 이춘재도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자백했고, 윤씨는 지난해 11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올해 1월 재심 개시 결정이 내려졌다.
지난달 2일 오후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리는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9차 공판에 출석한 윤성여씨가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월부터 13차례 열린 재심 공판에서는 당시 수사기관 관계자와 과학수사 분야 전문가 등 21명의 증인이 출석했고, 이 과정에서 당시 경찰의 불법체포 및 감금, 폭행·가혹행위가 확인됐다. 윤씨의 유죄 증거로 쓰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서가 조작된 사실도 밝혀졌으며, 이 사건을 자백한 이춘재는 법정에 나와 자신이 진범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무죄 판결을 받은 윤씨는 이날 취재진에게 “앞으로 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앞으로는 공정한 재판만 이뤄지는 게 바람”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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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22402.html
김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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