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강릉시 난곡동에서 발생한 산불이 강한 서풍을 타고 경포도립공원 일대로 번진 11일 오전 주민들이 난곡동 야산에서 난 불이 주택과 차량을 태우자 긴급히 대피하고 있다. 연합뉴스
“팔십이 다 되두룩 살았능기 바람이 당췌(매우) 이닷하게(이렇게) 씨게 부능 거는 츰이야. 씨커멍 연기거 구름처름 밀례오드니, 씨뻘건 불뎅이거 펄쩍펄쩍 근네(건너)뛔서 놀램절에(순식간에) 온 말~으(마을을) 찝어샘콌아.”
11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 인근에서 만난 김복례(78)씨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산불이 난 곳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김씨는 이날 오전 가까운 야산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빈손으로 몸을 피했다. 주민대피소가 마련됐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집과 살림살이 걱정에 마을 어귀에서 자리를 뜨지 못했다. 김씨는 “55년을 산 집이다. 불에 타버렸는지, 무사한지 소식을 모르는데 내 몸을 피한들 맘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쉴 수 있겠냐”며 “제발 산불이 비켜 갔길 바랄 따름”이라며 오열했다.
11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 인근에서 만난 김복례(78)씨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산불이 난 곳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박수혁 기자
이날 산불은 태풍급 강풍을 타고 경포호수 인근 마을과 경포해수욕장 북쪽 상가 밀집 지역을 덮쳤다. 해수욕장으로 진입하는 경포호변 도로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연기와 그을음 냄새가 가득했고, 왼쪽 야산은 시뻘건 불길과 짙은 회색 연기를 무서운 기세로 내뿜었다. 게다가 순간 초속 30m의 강풍까지 불어 대피하는 사람은 물론 불을 끄는 이들도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경포호수 안쪽으로 들어서자 번듯하게 지어놓은 2층짜리 목조주택 앞에서 텔레비전과 난로, 청소기, 신발 등 가재도구를 열심히 나르는 박순희(74)씨를 만날 수 있었다. 박씨는 “근처에서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설마설마했는데 바로 집 뒤까지 불길이 번졌다. 소방차 어디 갔냐. 소방차 1대만 지키면 집을 지킬 수 있는데…”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가재도구 옆에는 박씨가 키우는 강아지 복돌이와 쫀이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순간 ‘화르륵’ 소리와 함께 박씨의 집 뒤로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다.
11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 인근에서 만난 강승원(77)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산불이 난 곳을 바라보고 있다. 박수혁 기자
오후 들어 비가 오면서 불길이 잡히기 시작했다. 경포해변 가까이 펜션단지로 들어서자 마을 전체가 폭격을 맞은 듯했다. 까맣게 타버린 집들이 곳곳에서 앙상한 뼈대를 드러냈고, 부서진 기왓장 더미 사이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춘자(84)씨는 이번 산불로 55년 동안 살던 터전을 잃었다. 이씨는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 “아이고, 어떡해. 남편 영정 사진도 챙기지 못했어. 나는 이제 어디서 사나, 서울에 사는 자식들 주려고 만든 된장도 모두 타버렸다”며 울먹였다. 이씨는 이날 아침 일찍 공공근로를 하러 집을 나선 덕분에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 아들 조규수(57)씨는 “어머니가 그 시간에 집에 계셨으면 큰일 날 뻔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강릉 산불로 55년 동안 살던 터전을 잃은 이춘자(84)씨와 가족들이 불에 타버린 집터를 살펴보고 있다. 윤연정 기자
자리를 옮기자 까맣게 타버린 집과 차량 2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주인 조운현(69)씨는 어떻게든 집을 지키려고 했지만, 집 앞까지 불기둥이 접근해 와 황급히 대피해야 했다. 조씨는 “바람이 사람이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불었다. 연기 때문에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집을 꼭 지키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차도 뺄 시간이 없어서 홀랑 다 타버렸다”며 허탈해했다.
11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의 한 목조주택 앞에 텔레비전과 난로, 청소기, 신발 등 가재도구와 반려견이 대피해 있다. 박수혁 기자
11일 오후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 선교장 인근에서 난 산불에 타버린 건물 모습. 박수혁 기자
봄철 관광객이 몰리는 시기에 산불이 나자 상인들은 울상을 지었다. 근처 순두부집에서 일하는 권정숙(55)씨는 “경포에서 산불이 크게 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누가 이곳을 찾겠나. 집은 타버리고 손님도 끊기고, 경포가 홀랑 타버렸다.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고 탄식했다.
펜션을 운영해온 김재섭(48)씨는 멍한 표정으로 폐허가 된 집터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불덩어리가 사방에서 날아왔어요. 아무것도 못 챙기고 몸만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이게 우리 식구 유일한 밥벌이 수단인데 잿더미만 남았으니….” 그는 이 와중에도 이번 주말에 묵기로 한 투숙객의 예약금 환불 걱정을 했다.
11일 오전 강원 강릉시 난곡동의 한 야산에서 난 불이 확산해 큰 피해를 주고 8시간여만에 진화됐다. 산림청 공중진화대원들이 불길을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강릉/박수혁 김규현 심우삼 윤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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