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강원도 강릉시 경포에서 산불이 발생해 551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산불예방 펼침막 뒤로 불에 타 흉물이 된 벌채목이 산을 이룰 정도로 높게 쌓여 있는 모습. 박수혁 기자
강원도 강릉과 충남 홍성 산불, 새만금 잼버리 사태, 오송 참사…. 2023년 사고와 사건 이후 수습 과정은 어떠했는지, 치유되지 못한 슬픔은 무엇인지를 ‘그날의 현장’에서 다시 짚어봤다. 편집자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했던 숲은 목탄 가루 날리는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화마가 할퀴고 간 마을 옆 빈터는 불에 탄 벌채목이 산을 이뤘고, 도로 양옆으로 이재민용 조립주택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지난 15일 찾은 강릉 경포해수욕장 주변은 여전히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지금으로부터 8개월 전인 4월11일, 이곳에선 순간 초속 30m 강풍에 넘어진 나무가 주변 전선을 덮쳐 불꽃이 튀면서 산불이 났다. 이 불로 1명이 숨지고 산림 120.7㏊가 불에 타는 등 273억8700만원의 재산 피해와 이재민 551명이 발생했다.
조립주택 한곳에서 고양이 ‘에미’와 ‘야옹이’ 밥을 챙겨주던 채명자(73)씨를 만났다. “원래 키우던 애들은 아냐. 길고양이지. (타버린) 예전 집에 살 때 가끔 먹을 것을 챙겨줬는데, 어떻게 알고 조립식 주택까지 찾아왔어. 참 신기하지.”
강릉의 한 조립식 주택에서 만난 채명자씨가 보여준 신발장 내부 모습. 이동식 주택이 좁아 신발장을 다용도 수납장으로 쓰고 있다. 박수혁 기자
산불은 채씨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한평생 살던 집을 잿더미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빚까지 안겼다. 남편 차기홍(74)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집이 다 탔는데 보상금은 1억 조금 넘어. 새집 지으려고 알아보니 요즘은 평당 1천만원 달래. 예전에 살던 30평 집을 지으려면 3억이야. 2억 가까이 빌려야 하는데 농사꾼이 고추와 옥수수 팔아서 그걸 언제 다 갚냐고.”
채명자씨는 가족 앨범을 챙겨 나오지 못한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았다. 그는 “추억이 고스란히 다 타버렸다. 손주들이 집에 오면 함께 앨범을 보면서 제 부모들 어린 시절 설명해주는 게 낙이었는데”라며 먹먹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경포 산불은 펜션을 운영하던 주민들에게 특히 피해가 컸다. 채씨는 “산불 나기 전 여기서 펜션 하던 사람들 대부분 대출을 받아 건물을 지었는데, 불탄 펜션을 다시 지으려고 대출을 받으려니 이전 대출금부터 갚으라고 한단다. 그런데 당장 뭘로 벌어서 대출금을 갚겠나. 그러니 실업자가 되는 거다”라고 안타까워했다.
화마가 할퀴고 간 강원도 강릉시 경포의 한 펜션단지 모습. 도로 어귀 표지판에는 다양한 이름의 펜션 간판이 붙어 있지만 이들 상당수는 지난 4월 산불에 타, 이곳에는 이재민용 이동식 주택만 놓여 있는 등 8개월이 지난 지금도 사실상 휴업 상태다. 박수혁 기자
펜션 3동이 모두 타버린 최양훈(49)씨는 “펜션 지으려면 기본으로 필요한 게 10억원인데, 정부 지원금은 일반 주택과 똑같이 1억6천만원 정도”라며 “워낙 피해가 크다 보니 주택 기준으로 책정된 보상금으로는 다시 지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생활비나 기존 대출금 이자 갚는 데 사용하고 있다”고 푸념했다. 그는 “한전이 관리하던 전선이 끊어져 산불이 난 게 분명한데, 보상을 받으려면 소송을 걸라고 한다. 고성 산불 소송이 4년 걸렸다는데 그동안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겨울 추위가 본격화되면서 이재민들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그들이 거주하는 조립주택은 전에 살던 곳에 견줘 단열도 난방도 시원찮다. 이재민 551명 가운데 조립주택 거주자는 239명(43.3%)이다. 이재민 이정훈(28)씨는 “조립주택은 전기 패널로 난방하는데 1월이면 전기요금 전액 감면 혜택이 끝난다”며 “노인들이 전기요금 걱정에 난방도 제대로 안 하고 견디다가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라고 했다.
충남 홍성 산불의 이재민 김만복씨가 재 너머에서 난 산불이 강풍을 타고 두 시간여 만에 곳곳을 불지옥으로 만든 지난 4월 산불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강릉 경포와 같은 달 산불이 발생해 113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충남 홍성의 아픔도 현재진행형이다. 서부면 어사리에 사는 김만복(71)씨는 “내 집 타는 줄도 모르고 불 끄러 다녔다. 집에 불이 붙은 지 20분쯤 지나니 지붕이 내려앉아 잿더미로 변해버렸다”고 당시를 돌이켰다. 그의 집이 불탄 건 홍성 산불 첫날인 4월2일 오후 1시쯤이었다. 재 너머에서 난 산불은 강풍을 타고 두 시간여 만에 이호리, 양곡리, 어사리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김씨는 현재 홍성군에서 지어준 26㎡ 남짓한 이동식 주택 두 동에서 장인·장모, 처남 등 5명과 함께 산다. 이동식 주택은 작은 주방과 붙박이장 딸린 방 한칸이 전부다. 그는 “가족이 많아 임시 주택에 살기가 너무 불편하다. 빚을 얻어서라도 집을 지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보상 문제로 한바탕 소란을 겪은 마을 분위기는 나빠질 대로 나빠진 상태라고 했다. 산수동마을 박헌규 이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졌지만, 산불이 꺼지고도 한동안은 새끼 밴 소·돼지의 유산이 잇따르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지난 15일 찾은 충남 홍성의 산불 피해 현장. 불이 난 지 8개월 남짓 지났지만 도로 주변 산은 바리캉으로 민 머리처럼 민둥산이 됐고, 남은 소나무 숲은 불을 먹어 밑동은 까맣게 타고 잎은 단풍이 든 것처럼 죽어 있는 등 화마의 상흔이 고스란했다. 산불 피해를 입은 김만복씨 집터(오른쪽)에는 임시주택이 있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4월 홍성 산불로 타버린 숲은 1454㏊에 이른다. 같은 시기 보령시 청라면, 금산군 추부면 등에서도 산불이 잇따라 충남의 산불 피해 면적은 축구장 2400개 크기인 1720㏊에 달했다. 이재민도 홍성 91명, 보령 13명 등 모두 113명(63가구)이나 발생했다. 홍성군 관계자는 “아직도 불탄 산림을 벌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나무 심기 작업을 마치는 데까지는 최장 3년이 걸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