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에서 무등산 군왕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중간에 자리한 무연고 묘 16기.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5·18 당시 행방불명자 암매장지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5·18민주화운동 당시 옛 광주교도소(광주 북구 문흥동)에서 사라진 민간인 주검이 무등산 군왕봉 자락에 묻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는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하고 발굴 조사 관련 절차를 밟고 있다.
13일 오전 광주 북구 두암동 방면 무등산 군왕봉 등산로에는 간간이 등산객들이 보일 뿐 한적한 모습이었다. 주택가에서 시작한 등산로를 10여분 걷자 ‘꽃피움절’(옛 미륵사)이 나왔다. 절 뒤편에 차단줄을 둘러친 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단 구역 안에는 작은 봉분(길이 1m, 너비 50㎝, 높이 50㎝) 16기가 흩어져 있었다. 목언 꽃피움절 주지 스님은 “봉분은 전에 있던 미륵사 주지 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알고 있다. 누구의 묘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5·18 당시 행방불명자 암매장지로 조사하고 있는 무등산 군왕봉 자락 무연고 묘 위치.
해당 묘지의 숨겨진 사연은 전남 광양의 옥룡(63) 스님한테서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전남 장성 백양사에 있던 고 춘봉 스님이 1996년 군왕봉 자락의 식당 건물을 매입해 미륵사를 열었다. 절 뒤편 묘지는 춘봉 스님이 1995년 제2순환도로 공사 현장에 있던 묘를 모아 이장한 것”이라고 말했다.
춘봉 스님은 매년 5월이나 명절이 되면 옥룡 스님에게 묘에 쌓인 낙엽을 치우고 소주를 사다가 부어주라고 시켰다고 한다. 춘봉 스님은 출가한 몸이었지만 때때로 막걸리를 마시고 취하면 묘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옥룡 스님이 사연을 물어도 춘봉 스님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불쌍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거뒀다. 알 것 없다.” 춘봉 스님은 1999년 쉰둘의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뜰 때까지 묘의 사연은 함구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실종자들의 가묘가 있는 국립5·18민주묘지 10묘역. 광주시에 등록된 5·18 실종자는 모두 78명이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이후 옥룡 스님은 2017년 10월 말 5·18기념재단이 옛 광주교도소에서 5·18 당시 행방불명자 암매장 의심 구역을 발굴 조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묘를 떠올렸다. 춘봉 스님이 1980년대 옛 광주교도소에서 교화위원으로 활동한데다 군왕봉 묘지와 옛 광주교도소는 직선거리로 2㎞도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춘봉 스님이 광주교도소 주검을 군왕봉으로 옮겼을 여지가 있다고 옥룡 스님은 생각했다.
1980년 5월31일 계엄사령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진상 조사’ 문건에는 광주교도소에서 민간인 27명이 사망했다고 기록돼 있다. 505보안부대 기록은 28명 사망으로 나와 있다. 5·18 기간 교도소에서 수습된 주검은 11구에 불과하다. 사라진 주검의 수(16~17명)와 해당 묘의 수(16개)가 엇비슷한 셈이다. 옥룡 스님은 5·18기념재단에 해당 묘가 행불자 암매장지로 의심된다고 제보했고 5·18기념재단은 2019년 말 5·18조사위가 출범하자 관련 내용을 전달했다. 5·18조사위는 광주교도소에서 사라진 주검과 연관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지난해 8월 현장 확인 뒤 그해 11월부터 발굴 조사를 위한 지표 조사에 들어갔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조사관들이 지난해 8월 광주 북구 옛 광주교도소에서 5·18 당시 교도소로 끌려갔던 광주 시민들의 증언을 듣고 있다. 5·18조사위 제공
현재 5·18조사위가 발굴 조사를 진행하거나 준비 중인 암매장 의심 지역은 군왕봉 등 52곳이다. 이 가운데 군왕봉, 5·18 당시 3공수여단이 주둔했던 옛 광주교도소와 전남대 일대, 계엄군과 시민이 교전했던 전남 영암, 전투병과 교육사령부(상무대)가 있던 광주 서구 치평동 황룡강 일대 등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작업의 속도는 더디다. 지난 2년간 국립5·18민주묘지 무명열사 묘역에서 광주시에 등록된 5·18 행방불명자 78명 가운데 2명의 신원만 확인하는 데 그쳤다. 차종수 5·18기념재단 고백과증언센터 팀장은 “행방불명자는 있지만 이들의 주검을 처리한 계엄군은 드러나지 않아 유족들은 고통 속에 살고 있다. 5·18조사위가 단 한명이라도 더 찾아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고검장이 검찰총장에게 보고한 광주 동향. 1980년 5월21일 군부대가 주검 6구를 가매장했다고 나와 있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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