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가습기 살균제로 희생된 피해자들의 신발 등 유품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의 한 법정에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400여 명이 정부와 제조·유통사 총 23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3차 변론기일이 열렸다. 2019년 2차 변론기일 이후 3년 만에 잡힌 기일이었지만, 재판은 단 5분 만에 끝났다. 처음 소장이 접수된 때는 2016년 5월이었다. 이후 6년 동안 열린 재판은 단 3차례 뿐이었다.
북적이는 법정 맨 뒤에 있던 피해자 이병엽(67)씨는 “재판 진행이 너무 지루한데, 신속히 진행해주시면 감사하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음 기일은 내년 3월로 잡혔다. 관련 형사사건 재판 결과와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의 보고서를 살펴보고 또 피해자별 인과관계를 정리하기 위해서다.
“만 6년 동안 손배소 1심, 가능한 일인가?”…애타는 피해자들
이씨는 1996년부터 가습기살균제를 사용했고 현재 만성 폐쇄성 폐질환과 천식을 앓고 있다. 2017년 천식 환자도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로 인정하도록 관련 기준이 바뀌면서 2018년 이씨도 ‘중증 천식 환자’로서 피해자 인정을 받았다.
그는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만 6년, 햇수로는 7년 동안 재판이 진행 중인데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어 “저는 정부에서 피해자로 인정했으니 판결을 빨리 내려달라고 진정을 내봤지만 ‘당장 판결을 낼 수 없다’ ‘어려운 재판이다’라는 답만 들었다”고 전했다. 법무법인 송무팀에서 일했던 이씨는 2002년 호흡기 관련 질환이 도져 회사를 그만 뒀다. 병원을 전전하며 살아오다가 2011년 ‘가습기살균제 사태’ 뒤에야 자신이 피해자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씨는 “지금까지 고생한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없어서 민사 소송을 하게 됐다”고 했다.
장기화하는 소송에 애가 타는 것은 이씨 뿐이 아니다. 김미란(47)씨도 이씨와 함께 소송을 하고 있다. 2010년 소엽중심성폐섬유화를 동반한 간질성폐질환 등의 진단을 받고 5년 뒤 사망한 김씨의 아버지는 피해 인정 기준이 개정된 2017년에야 피해자로 인정됐다. 김씨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소송 중이다.
김씨는 “관련 사건들 항소심 재판 결과를 보고 판결하겠다고 재판을 미뤘는데, 1심 민사 재판부가 자체 판단해야 한다”며 “1000명이 넘는 사망자, 7000명이 넘는 피해자들이 모두 과학적 증거인데 왜 실험용 쥐에서 증거를 찾는지, 사법부의 부족함을 피해자 부담으로만 떠넘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와 김씨가 참여한 손해배상소송은 가습기살균제 관련 민사소송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소송이 진행되는 지난 6년 동안 100명 넘게 소를 취하했지만 아직도 300명의 피해자가 소송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말고도 많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산발적으로, 장기간의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
판결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결국 입증의 문제 때문이다. 관련 법 개정으로 피해자의 입증 책임이 많이 완화됐지만, 여전히 소송의 문턱은 높다. 장기간 가습기살균제에 노출된 사실과 질환이 악화된 사실을 모두 입증해야 하는데, 특히 소송 상대방인 기업 쪽이 자사 제품만 썼다는 증거를 제출하라고 하면 마땅한 증거를 찾기 힘든 탓이다.
8월2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열린 가습기 살균제 관련 SK케미칼·애경·이마트의 유죄·강력처벌 촉구 기자회견. 연합뉴스
잇따른 피해자 패소, SK·애경 무죄 판결…“마냥 속도 내기 어려워”
반면에 섣불리 소송을 빨리 진행하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었다. 현재까지 진행된 법원의 판결들이 피해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천천히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박수진(51)씨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인 자녀들을 대신해 2019년부터 서울동부지법에서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박씨는 “마냥 속도를 내는 것이 불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미나마타병이나 삼성 백혈병처럼 희귀병이 아니라서, 일반인들도 걸릴 수 있는 병이다 보니 인과관계를 따지기가 더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2015·2017년, 그리고 올해 서울중앙지법과 남부지법 등에서는 정부나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들이 잇따라 나왔다. 인과관계 입증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2019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에게 제조·판매사가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첫 법원 판단이 있었지만, 실제 손해에 대한 ‘배상금’이 아니라 정신적 손해를 위로하는 ‘위자료’라는 한계가 있었다.
지난해 가습기살균제 제조·판매사인 에스케이(SK)케미칼·애경산업 등에 대한 업무상 과실치사 형사재판 1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됐다. 마찬가지로 에스케이케미칼의 가습기살균제 성분인 클로로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CMIT·MIT)과 폐 손상·천식 간의 인과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정남순 변호사는 “재판들이 계속 연동이 되다 보니 피해자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답답한 상태일 것”이라며 “피해자들은 당연히 (국가와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될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인과관계 입증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마냥 절차를 서두르긴 어려운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사참위 ‘정부·기업 책임 확인’ 보고서…‘정치적·입법적 해결’ 목소리도
지난 2일 발간된 사참위 종합보고서가 기업과 정부 책임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사참위의 지난 3년 6개월간의 활동을 담은 6권 분량의 보고서는 ‘정부와 기업(에스케이케미칼)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는 취지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국회는 보고서 내용을 적용할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관련 토론회를 준비 중이다.
피해자들을 대리하는 이정일 변호사는 “인과관계 입증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패소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새로운 연구 결과나 정부(사참위)의 공식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라면서 “사참위 보고서가 정부의 책임을 묻는 데 핵심적인 근거가 될 수 있다”며 기대감을 표했다.
사법부 밖에서의 구제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옥시를 상대로 소송 중인 조순미(53)씨는 “민사소송은 마지막 수단으로 하고 정치적·입법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라며 “‘국가 책임 인정’ ‘포괄적 배·보상’ ‘입증 책임 전환’을 강제하는 정치권의 입법 노력이 가장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혜민 기자
jh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