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오른쪽), 양금덕 할머니가 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강제동원 정부 해법을 규탄하고 일본의 사죄 배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7일 국회 앞에서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93) 할머니와 양금덕(93) 할머니가 나란히 기자회견에 나서 정부의 강제동원 해법안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강제동원 후유증을 겪는 김 할머니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를 끌고 갔는데 어디다 사죄를 받고 어디다 (배상을) 요구를 하겠느냐. 일본은 양심이 있으면 말을 해보라”고 힘겹게 외치며 듣는 이의 마음을 울렸다.
8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의 설명과 김 할머니 자서전 <마르지 않는 눈물>을 종합하면 1929년 전남 순천의 한약방집에서 2남2녀의 맏이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어렸을 적 풍족하게 지내다 일제의 수탈로 시련이 시작됐다. 일제는 공출을 빌미로 김 할머니 집 재산을 빼앗은 데 이어 1942년 아버지마저 경남 진해 비행기 활주로 공사장으로 끌고 갔다.
할머니는 한땐 전라도 명문학교로 꼽히던 순천공립여학교(현 순천여고) 진학을 꿈꿨지만, 이듬해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며 간신히 국민학교(초등학교)만 졸업할 수 있었다. 1944년 5월 집에서 동생 셋을 돌보며 지내던 중 일본인 여교사 오가끼 선생이 불렀다. 일본에 가서 일하면 중학교, 고등학교를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김 할머니는 어른들 몰래 아버지 도장을 훔쳐 오가끼 선생에게 갖다 줬다. 출발 며칠 전 친할머니의 눈물 어린 반대에 김 할머니는 “일본에 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오가끼 선생은 “이미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으나 안 된다”고 윽박질렀다.
1944년 일본 나고야성 앞에서 촬영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순천소대 모습. 붉은 원 안 소녀가 김성주 할머니다.자서전 갈무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여수에서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를 거쳐 나고야 미쓰비시중공업 항공기제작소에 도착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꼬박 일했고 동료와 이야기를 하거나 화장실을 가면 작업반장의 눈치를 받아야 했다.
몇달 뒤 6살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에 집으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기숙사 사감은 “2년 계약을 했으니 안된다”고 못 박았다. 비행기 동체 철판을 자르는 작업을 하다 왼손 집게손가락 한마디가 잘리는 상처도 입었다. 병원에서는 봉합 수술 대신 빨간 소독약 ‘아까징끼’만 바르고 붕대를 감아줘 평생 장애가 생겼다. 그해 12월7일 도난카이 대지진 때는 건물이 무너져 친구 6명이 죽고 김 할머니도 사람들에게 밟혀 왼쪽 다리가 꺾였다.
이듬해 집에서 온 편지에 기가 막힌 소식이 실려 있었다. 동생 정주(91)가 일본 후지코시 강재공업주식회사 도야마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정주 할머니도 1945년 2월께 “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오가끼 선생에게 속아 일본행 배를 탔었다. 다행히 해방되고 10월께 고향에 도착하자 아버지와 동생이 먼저 집에 와 있었다.
2000년 일본에서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에 나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 내에 있는 도난카이 대지진 순직비를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고 박해옥, 김성주, 고 김혜옥, 양금덕, 고 진진정씨와 고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 회장.자서전 갈무리
김 할머니는 1947년 18살 나이에 결혼했지만 ‘여자정신근로대’와 ‘일본군 위안부’를 구별하지 못했던 남편의 구박과 폭행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았다. 1948년에는 여순사건에 휘말린 아버지와 할머니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고 몇 년 뒤 남편도 자녀 셋을 남겨두고 폐병 등으로 숨졌다. 그는 공사장 막일, 식당일 등으로 평생 힘든 삶을 살았고 현재 경기도 안양에서 70대 아들과 단둘이 지내고 있다.
김 할머니는 일본에서 임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에 잘린 손가락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날들을 한탄했다. 무엇보다 오해를 풀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남편이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비슷한 삶을 살았던 동생에게도 미안했다.
김 할머니는 2000년 12월, 동생은 2003년 4월에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 최고 재판소에서 패소했다. 각각 2012년, 2013년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걸어 김 할머니는 2018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고 동생은 대법원 계류 중이다.
김 할머니는 일본의 사죄와 정당한 배상금을 받는 일이 지난 삶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김 할머니는 자서전에서 “일제 강제동원으로 신체 일부뿐 아니라 인생의 한순간을 잃어버렸다.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오해받고 평생 고통받으며 살아왔다”고 했다.
이국언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이사장은 “김성주·정주 자매가 일본 때문에 겪은 삶을 생각하면 우리 정부의 행태가 원망스럽다”며 “피해자들은 돈이 아니라 진정한 사죄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12월 일본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후생연금 99엔(한국 돈 1천원)을 지급하겠다고 하자 김성주 할머니(왼쪽 둘째) 등 피해자들이 한국 외교부 앞에서 항의집회를 하고 있다.자서전 갈무리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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