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 기획] 오월, 그날 그사람들⑧ 포니 택시 몰며 광주 누비던 중 계엄군 무자비한 진압 보고 충격
“이러다간 다 맞아 죽겠더라고… 저놈들은 착검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차로 밀어불자고들 했지” 택시기사들이 항쟁 기폭제 돼
시위대와 함께하다 끌려간 이씨 척추 부서지도록 밟혀 장애 남아
89년부터 민주기사동지회 회장 5·18 망언 항의 집회 등 선봉에 “우리 같은 사람들도 불의에 맞서 싸웠다는 걸 국민이 알아줬으면…”
이행기 5·18구속부상자회 민주기사위원회 위원장이 1980년 5·18 항쟁의 기폭제가 된 택시 시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7013 포니’.
이행기(69) 5·18구속부상자회 민주기사위원회(옛 5·18광주민중항쟁 민주기사동지회) 위원장은 40년 전 자신이 몰던 택시 차량 번호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1980년 당시 광주에서 영업하던 택시는 모두 700여대였다. 법인택시가 500대, 개인택시가 100대, 한시택시(일정 기간만 영업을 허가한 택시)가 100대였다. 이 중 이씨는 한시택시를 몰았다. 80년식 새 차였다. 차는 비록 다른 사람의 소유였지만 이씨는 가정을 건사하게 해준 택시운전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때 브리사·포니는 신형, 코로나·코티나·쉐보레는 구형 택시였제. 나는 포니 한시택시를 몰았어요. 자동차가 귀한 시절이다 본께 택시운전하면 괜찮게 살았어요. 21살 때부터 택시운전을 했응께 친구들도 많았고 술도 자주 마시고,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1980년 5월20일 오후 7시께 버스를 앞세운 차량시위 행렬이 옛 전남도청으로 향하고 있다. 당시 택시기사였던 이행기씨는 제일은행건물 쪽(붉은 원)에서 버스 뒤를 따르고 있었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19일이었다, 평온했던 소시민의 삶에 소용돌이가 친 것은. 전날 비번이었던 이씨는 19일 아침에 여느 때처럼 일을 나갔다. 금남로에서 계엄군이 대학생을 붙잡아 옷을 벗기고 몽둥이로 두드려 패는 모습을 봤다. 택시운전을 하면서 학생 시위는 많이 봤지만 이날처럼 잔인하게 진압하는 것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점심때쯤 승객을 기다리기 위해 공용버스터미널로 가니 미리 와 있던 다른 택시기사 5∼6명이 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계엄군이 학생,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때린 뒤 도청으로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택시기사들은 광주 전역을 돌아다니니까 정보가 빠르잖아요. 누구는 백운동에서, 누구는 계림동에서 군인들이 사람을 때리는 것을 봤다는 거예요. 속에서 천불이 나불죠.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택시기사)는 괜찮겠지 싶었어요. 근디 오후부터는 난리가 나더라고요.”
산발적으로 열리던 시위는 점차 금남로를 중심으로 확대됐다. 시위대가 계엄군에게 돌을 던지면, 군인들이 쫓아가는 상황이 반복됐다. 계엄군은 착검을 한 채 주동자로 보이는 시위대 1명을 지목해 끝까지 추격해 붙잡았다. 시위대를 놓친 군인들은 주변을 지나던 시민들을 추궁했고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찍었다. 노인까지 맞는 모습을 본 이씨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1980년 5월19일 광주역 앞에서 계엄군들이 빼앗은 택시 등을 활용해 저지선을 구축하고 있다.옛 기무사령부 사진첩
이씨처럼 화가 난 일부 택시기사들은 조수석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도망가는 시위대를 태워 100여m를 주행한 뒤 내려주기도 했다. 택시 1대에 시위대 10여명을 태운 택시도 있었다. 돌을 실어다 시위대에 주는 기사도 있었다. 계엄군은 이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군인들은 택시들을 무작위로 불러 세웠다. 젊은 사람이 타고 있으면 무조건 끌어내렸다. 택시기사가 말리면 그 택시기사에게도 개머리판이 날아갔다. 학생을 태우고 가던 한 브리사 택시는 광주역 앞에서 계엄군이 차를 세우려고 하자 무시하고 주행했다. 검문을 하던 군인은 착검한 총을 차 문에 찔렀다. 총은 택시에 매달린 채 10여m를 가다 떨어졌다. 다행히 택시기사와 승객은 무사히 빠져나갔다.
생계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씨는 전날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뒤로하고 20일 아침에도 일을 나갔다. 군인 통제 때문에 시가지로 진입하지 못한 고속버스들이 무등경기장 앞에 승객을 하차시킨다는 소리를 듣고 거기로 갔다. 모여 있던 택시기사들은 ‘이대로 가만있으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냈다. 계엄군을 차로 밀어버리고 도청에 붙잡혀 있는 시민들을 구출하자고 했다.
“군인들이 잔인하게 해분께 이미 시민들은 기가 꺾여 부렀어요. 가만히 있으면 다 맞아 죽게 생겼더라고. 우리끼리 ‘저놈(군인)들은 착검하고 있으니까 차로 밀어불자. 도청 탈환하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군인들이 택시기사들까지 때려분다고 한디 얼마나 열을 받았겄소. 그때는 가족 생각도 안 나더라고.”
1980년 5월20일 광주시민들이 택시 시위 행렬을 따라 도청으로 향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꺼져가던 항쟁의 불씨를 다시 살린 차량시위의 시작이었다. 이씨 등 택시기사들은 오후 6시께 동료들을 무등경기장으로 불렀다. 택시 수십대가 유동삼거리와 공용버스터미널 쪽으로 나눠 도청으로 향했다. 이씨는 유동삼거리 대열에 합류했다.
“유동삼거리부터 도청까지는 2㎞가 직진이거든. 택시 수십대가 가니까 시민들도 호응을 해주더라고요. 라이트 켜고 경적 울리고 사람들 걷는 속도에 맞춰 천천히 갔어요. 멋모르고 대열에 들어온 차들은 시민들이 에워싸니까 빠져나가지 못하고 꼼짝없이 시위에 합류했어요.”
광주역 앞 사거리에 도착했을 땐 시민들이 시내버스를 끌고 나와 행렬의 맨 앞에서 이끌었다. 일반 자동차들도 합류해 차량 행렬은 200여대까지 불어나 있었다. 하지만 평화로웠던 차량시위의 대가는 혹독했다. 도청이 300m 남았을 때 전일빌딩 앞을 지키고 있던 계엄군이 저지하기 시작했다. 최루탄 수십발이 동시에 날아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거리에 연기가 자욱했고 계엄군이 몽둥이를 들고 쫓아와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시민들은 금세 흩어졌다. 차량 행렬 뒤쪽에 있던 차들은 방향을 돌려 피했지만 앞쪽에 있던 차들은 그러지 못했다. 대다수 택시기사는 차를 버리고 달아났으나 차마 생계수단을 포기하지 못했던 일부 기사들은 차 안에서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있다 몽둥이세례를 받았다. 이씨는 차에서 나와 제일은행 쪽 골목으로 도망치며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
1980년 5월19일 광주시민들이 불을 붙인 차량을 계엄군 쪽으로 보내기 위해 밀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이때부터 항쟁은 격화됐고 택시기사들은 본격적으로 시위대에 가담했다. 이씨는 시위대와 도청을 탈환하려 함께 행동했다. 이씨는 밤 9시께 충장로1가 입구 쪽에서 젊은 시위대 2명과 브리사 택시에 횃대를 매단 뒤 가속페달에 돌을 얹어 도청 쪽으로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차는 똑바로 가지 않고 길가 나무를 박았다. 이씨는 차로 가 운전대를 바로 하고 문을 닫으려는 찰나 머리 뒤쪽에 심한 고통과 함께 쓰러졌다. 멀리서 예의주시하던 계엄군이 뒤에서 급습한 것이다.
정신이 혼미해진 이씨는 끌려가며 도청 울타리 쪽에서 “이놈은 방화범”이라고 말하는 군인 목소리를 들은 뒤 기절했다. 눈을 떴을 땐 다음날(21일) 아침 옛 전남경찰국의 한 사무실이었다. 앞니는 3개나 부러져 있었고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사무실 안에는 시민 30명 정도가 있었는데 모두 이씨와 몰골이 비슷했다.
군인들은 2∼3분마다 한 번씩 사무실로 시민들을 끌고 왔고 나갈 때마다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한 군인은 “너희들은 살아도 평생 불구로 만들 거”라며 엎드려 있는 수감자들의 척추를 군화 뒷굽으로 찍었다. 이씨도 이때 척추뼈가 깨지는 부상을 당했다. 사무실을 지키고 있던 경찰들은 이를 보고 등에 대고 있으라며 뭉친 신문지를 줬다. 나중에 뭉친 신문지를 본 군인은 누가 줬냐며 경찰을 때리기도 했다. 무자비한 세월이었다.
1980년 5월20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들이 차량시위 앞쪽에 있던 시내버스를 멈춰 세우고 시위대를 끌어내리고 있다. 5·18기념재단 제공
이날 이씨는 평생 잊지 못할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경험했다. 점심때쯤 되니 헬기 소리가 들렸고 잠시 뒤 총소리가 이어졌다. 군인이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시작한 것이다. 바깥 상황을 몰랐던 이씨는 꼼짝없이 죽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화장실 창문을 가리키며 도망가라고 했지만 척추를 다친 이씨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다행히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철수한 뒤 시민군에게 구출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현행범으로 붙잡혔는디 살아남은 게 다행이죠. 이때 얼마나 무서웠는가 지금도 징 소리처럼 낮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 총소리 같아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요.”
간신히 가족들과 재회했지만 병원 치료는 꿈도 못 꿨다. “이놈은 방화범”이라는 군인 목소리가 맴돌아 집에 은신하기로 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이씨는 깨진 척추뼈가 잘못 붙어 장애가 생겼다.
몸을 어느 정도 추스른 다음 회사에 복귀했지만 시위 경력 때문에 정식 기사로 채용되지 않아 대무기사(일반 기사가 쉴 때 대신 일하는 임시기사)로 일했다. 1987년 어느 날 승객을 태우고 가던 중 오른쪽 다리에 마비가 와 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더는 운전을 할 수 없겠다고 판단한 이씨는 전남 함평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88년 6월2일 5·18광주민중항쟁 민주기사 동지회 창립식에서 이행기 당시 부회장이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이행기씨 제공
차량시위에 참여했던 기사들은 1986년부터 매년 5월20일마다 재현행사를 열었고 1988년 5·18광주민중항쟁 민주기사동지회(민기동)를 출범시켰다. 휘호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써줬다. 당시 부회장이었던 이씨는 이듬해 회장직을 맡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민기동은 5·18광주의거청년동지회(오청동)와 함께 5·18 희생자 명예회복과 책임자 처벌, 보상요구 활동의 선봉에 섰다. 1988년 전두환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뒤 백담사로 들어갔을 때 민기동 회원들은 특유의 기동성을 살려 백담사로 전두환을 만나러 갔다. 당시 경찰의 제지로 실패했지만 이런 정신은 지금도 남아 있다. 지난해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의원 3명이 5·18 망언을 했을 때 민기동은 국회 앞, 자유한국당 광주시당 앞, 전두환 자택 앞 등에서 열린 항의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지난해 4월 서울시 서대문구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집 앞에서 이행기 위원장(왼쪽 둘째) 등 민주기사위원회 회원들이 5·18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민주기사위원회 제공
5·18이 일어난 지 40년이 흐르며 민기동도 점차 축소되고 있다. 한땐 회원이 100여명에 달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회원은 30여명이다. 1996년부터는 5·18구속자회(현 구속부상자회)와 조직을 통합해 민주기사위원회로 명칭을 바꿨다. 그나마 2017년 관객 1000만명을 넘은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하며 5·18 때 택시기사들의 활동이 조명돼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이씨는 앞으로도 5·18 왜곡 저지 활동에 집중할 계획이다. 5월 항쟁에 불을 지폈던 차량시위를 알리고 광주를 폄훼하는 세력에 맞설 계획이다. “우리같이 못 배운 노동자들도 불의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을 국민이 인정해줬으면 좋겄소. 더는 우리를 폄훼하거나 욕되게 하지 말아 주세요.”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1988년 6월21일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5·18광주민중항쟁 민주기사동지회 창립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쓴 휘호 ‘사인여천’.민주기사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