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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회보’ 뿌리던 들불야학생…죽은 동지들이 준 삶, 봉사로 채웁니다

등록 2020-06-16 05:00수정 2020-06-16 10:12

[5·18 40주년 기획] 오월, 그 날 그 사람들

⑪YMCA 사수 시민군 나명관

광천공단서 용접공 일하던 20살
윤상원 열사 등이 만든 야학 다니다
진압 전날까지 YWCA서 회보 제작

총 들고 지키다 계엄군에 붙들려가
고춧가루 고문 등 말못할 고초 겪어
“그 일 생각하면 힘들어도 견뎌”

풀려난 뒤 운전일하다 노동운동
“투쟁 위해 생계해결 시급” 깨닫고
운수업 꾸리며 어려운 동지들 도와

5·18재단설립동지회 초대회장 맡아
“임기안 무명열사기념사업 할 것”
1978년 윤상원, 박기순(앞줄 맨 왼쪽) 등이 주도해 만든 들불야학은 1981년 4기를 끝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광주 노동운동의 산실이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들불야학 학생들은 항쟁에 참여해 ‘투사회보’를 만들며 광주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했고 일부 학생들은 계엄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사진은 들불야학 1기 강학생들. 5·18기념재단 제공
1978년 윤상원, 박기순(앞줄 맨 왼쪽) 등이 주도해 만든 들불야학은 1981년 4기를 끝으로 문을 닫을 때까지 광주 노동운동의 산실이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 들불야학 학생들은 항쟁에 참여해 ‘투사회보’를 만들며 광주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했고 일부 학생들은 계엄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사진은 들불야학 1기 강학생들. 5·18기념재단 제공

1980년 5월27일 새벽 5시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 1층을 지키던 들불야학 출신 스무살 청년 나명관(60)씨는 창문 밖 1m 앞을 지나가던 계엄군의 눈빛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동료 윤순호(62)씨와 창밖으로 총을 겨누고 있다가 한 무리의 군인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는데, 선두에 선 군인과 시선이 마주친 것. 놀란 나씨는 멍하니 쳐다만 봤고, 그 군인은 짐짓 모른 체 가던 길을 갔다. 나씨가 새 삶을 얻는 순간이었다.

“그땐 나이도 어렸고, 군대도 갔다 오지 않아 총은 들고 있었지만 쏠 엄두가 안 났다. 다행히 그 군인도 같은 생각이었나 보더라. 그대로 꼬박 오전 9시까지 숨어 있었다. 군화 소리, 총소리가 뒤섞여 들리며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결국 공포심을 못 이겨 자수했다.”

계엄군에 붙들려 간 나씨는 인생 최대의 고통을 경험했다.

“진압작전이 끝나고, 대위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보더니) ‘수색을 어떻게 했길래 아직도 이런 놈들이 나와’라면서 옆에 있던 군인을 때렸다. 맞은 군인은 열받았는지 M-16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 가슴팍을 네차례 때리더라. 세차례까지는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네번째는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힘든 일을 겪어도 웃고 넘어갈 수 있었다.”

나명관 5·18기념재단설립동지회 회장이 4월29일 5·18기념재단에서 들불야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나명관 5·18기념재단설립동지회 회장이 4월29일 5·18기념재단에서 들불야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6남매 중 둘째이자 큰아들이었던 나씨는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를 마친 뒤 곧장 취직했다. 두살 아래 동생 용관씨와 광주 광천공단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돈도 꽤 모았다. 1978년 광천동에 윤상원 열사 등이 주도해 만든 들불야학이 생기자 1기로 입학해, 노동자의 권리를 배우고 사회에 눈을 뜰 수 있었다.

신군부의 등장에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로 뒤숭숭하기만 했던 1980년 5월 초 나씨는 저임금과 처우개선 문제로 회사 간부와 싸워 해직된 상태였다. 나씨는 5월14일께 전남대 정문에서 열린 시위에 참여했지만 금세 빠져나왔다. 학생 시위는 학생에게 맡기고, 노동자는 노동운동에 집중하자는 생각이었다. 5월18일 들불야학 동료들과 축구와 야구 시합을 하다 시내 쪽에서 큰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튿날 아버지의 만류를 뒤로하고 동생 용관씨와 함께 광주역과 전남대 쪽으로 나가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과 구타를 목격했다.

1980년 5월23일 들불야학이 제작해 나명관씨가 배포한 투사회보 6호.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1980년 5월23일 들불야학이 제작해 나명관씨가 배포한 투사회보 6호.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나씨는 21일부터 들불야학에서 윤상원, 박용준 등이 제작한 투사회보를 배포하는 일을 했다. 배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가 연로하신 부모님한테 붙들렸고, 23일에야 다시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24일 들불야학과 전남대 유인물 제작팀 ‘대학의 소리’, 박효선이 이끌던 문화팀 ‘광대’는 유인물 제작을 통일하기로 하고 도청과 가까운 와이더블유시에이로 작업 장소를 옮겼다. 나씨는 와이더블유시에이신협에 있던 최신식 등사기를 사용해 하루에 1만장이 넘는 종이를 넘기며 등사했다. 계엄군의 진압작전 하루 전인 26일에는 투사회보 9·10호를 연달아 제작하기도 했다. 나씨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자 네살 많은 동료 김상집씨가 약국에서 고무골무를 구해다 줬는데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단다. 나씨는 “내가 없으면 네가 장남 역할을 해야 한다”며 동생 용관씨를 억지로 집으로 끌고 갔고, 혼자 집을 지키던 아버지에게 큰절하고 나왔다.

와이더블유시에이로 돌아오자 계엄군이 온다는 소식이 들렸고, 도청에서 최후의 만찬이라며 빵과 우유를 보내왔다. 나씨는 윤상원을 찾아가 총을 달라고 했다. 윤상원은 걱정되는지 머뭇거리다가 “조심하라”며 총을 건네줬다. 나씨가 본 윤상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진압이 종료되고 계엄군에 연행된 나씨는 상상도 못 할 고초를 겪어야 했다. 들불야학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참여자들 이름을 자백하라는 고문이 시작됐다. 발바닥이 둥그렇게 부어오를 정도로 맞는 것은 예사였고, 구토가 나올 때까지 물을 마시기도 했다. 가장 힘들 때는 수사관이 머리카락을 아래로 붙잡고 고춧가루 탄 물을 코로 들이부을 때였다. 수사관은 “(들불야학 교장 격이었던) 김영철이 참여자 이름을 다 불었으니 빨리 말하라”고 유도신문을 했고, 결국 나씨는 여성들을 뺀 동료 17명 이름을 적어 냈다. 5·18에 가담한 단일조직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수사관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식당으로 데려갔는데, 고소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는 비빔국수가 나왔다. 모진 구타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였지만, 비빔국수에 군침을 흘리는 자신이 부끄러웠단다.

“나중에 윤순호 형이 말하기를 ‘네가 명단을 제출한 것도 모르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다 엄청 맞았다’고 했다. 지금도 만나면 ‘야 이놈아, 너 때문에 더 맞았다’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를 지키다가 자수한 나명관(당시 20살, 원 안)씨가 군 사재판을 받고 있다. 나명관씨 제공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와이더블유시에이(YWCA)를 지키다가 자수한 나명관(당시 20살, 원 안)씨가 군 사재판을 받고 있다. 나명관씨 제공

1980년 10월24일 1심에서 장기 3년, 단기 2년을 선고받은 뒤 같은 달 27일 풀려났지만, 하루 만에 다시 잡혀 들어갔고 12월29일 항소심에서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나씨는 1998년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받았다.

나씨가 잡혀간 뒤 매일 술로 보내며 건강이 악화된 아버지는 “며느리 손에 밥 한그릇 얻어먹고 죽으면 좋겠다”고 했고, 나씨는 들불야학에서 만나 종종 집안일을 돌봐줬던 여자친구 박미경(58)씨와 식을 건너뛰고 신혼살림을 차렸다. 아버지는 미경씨가 차려준 밥 두끼를 드신 뒤 돌아가셨다.

나씨는 생계유지를 위해 덤프트럭, 택시 운전 일을 했다. 1987년 처우 문제로 광주지역 첫 택시파업이 일어났을 당시 무직이었던 나씨는 파업 경험이 없는 회사 노조원들을 대신해 마이크를 잡았다가 노동조합법 3자개입 금지조항(2006년 폐지) 위반 혐의로 수배를 당했다. 3개월 뒤 노조와 사업주가 합의해 수배는 풀렸지만, 더 이상 택시 일은 할 수 없었다.

“광주 택시업계에 극렬분자라고 소문이 나 있더라. 5·18 때도 계엄군이 옷에 ‘총기소지 극렬분자’라고 썼는데 근 10년 만에 다시 극렬분자라고 불리니 먹고살 일이 답답했다.”

나씨는 제13대 대통령선거 날인 1987년 12월16일 뒤늦은 결혼식을 올렸다. 축하객들은 대부분 5·18항쟁, 노동운동 동료들이었고 주례는 당시 광주 사회운동의 큰형님 격이었던 이강(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상임고문)이 맡았다. “말이 결혼식이었지 사실상 시국선언 자리”였다.

나명관 5·18기념재단설립동지회 회장(오른쪽)이 1980년 들불야학을 함께 다녔던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명관씨 제공
나명관 5·18기념재단설립동지회 회장(오른쪽)이 1980년 들불야학을 함께 다녔던 동료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나명관씨 제공

나명관씨를 비롯한 들불야학 출신 5·18단체 회원들이 1980년 5월 계엄군의 진압작전 때 희생당한 동료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나명관씨 제공
나명관씨를 비롯한 들불야학 출신 5·18단체 회원들이 1980년 5월 계엄군의 진압작전 때 희생당한 동료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나명관씨 제공

1988년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가 생기고, 회사마다 민주노조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씨는 이때부터 돈을 벌자고 결심했다. 학생운동과 달리 노동운동은 투옥될 경우 혼자 뒷감당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노동운동을 뒤에서 지원하자고 생각했단다. 1989년 통학버스를 시작으로 관광버스업계에 뛰어들며 적잖은 돈을 벌었다. 망월동 묘역에서 행사를 할 땐 후배들에게 용돈을 쥐여주고, 상경투쟁을 할 땐 본인 소유 버스를 지원했다.

2018년 5·18기념재단 혁신 방안으로 5·18기념재단 후원회가 설립동지회로 이름을 바꿀 때 초대 회장을 맡은 이유도 어려운 형편의 동료들을 돕기 위해서다. 6개월여 남은 임기 동안 무명열사 기념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어떤 동지는 나에게 돈만 생각한다고 손가락질하지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돼야 투쟁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계엄군과 눈이 마주쳤을 때 한번 죽었다. 남은 인생은 죽은 동지들이 선물해준 것으로 여기고 봉사하는 자세로 살겠다.”

김용희 기자 kimyh@hani.co.kr

1980년 들불야학 강학 장소로 쓰였던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시민아파트. 재개발 구역으로 포함되면서 철거를 앞두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들불야학 강학 장소로 쓰였던 광주광역시 서구 광천시민아파트. 재개발 구역으로 포함되면서 철거를 앞두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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