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일러스트 장선환.
이금이 지음/창비(2020) 한인 미주 이민 100년사를 다룬 책을 보던 작가는 한 장의 사진에 사로잡힌다. 사진 속에는 앳돼 보이는 세 여성이 흰 무명 치마저고리를 입고 각기 양산과 꽃, 부채를 들고 있다. 이른바 ‘사진 신부’였다. 1903년 처음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온 이민자들은 대다수 독신 남성이었고 이들은 가정을 꾸리기 위해 사진결혼을 선택했다. 원 가족을 부양하려고,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게 싫어서, 가난과 여자에게 주어진 굴레를 벗어나고자, 여자도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등등의 이유로 사진 신부가 되기로 한 천여 명의 조선 여성은 대부분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버들은 훈장이었던 아버지가 의병으로 죽은 후 어머니와 함께 고단한 생계를 꾸려가다가 하와이로 시집가면 미국서 공부도 하고 영어도 배울 수 있다는 중매쟁이의 말에 솔깃해 사진 신부의 모험에 뛰어든다. 동갑내기 친구 홍주는 혼인한 지 석 달 만에 청상과부가 되어 산 송장처럼 집안에 갇혀 살다가 자유를 찾아서 기꺼이 사진 신부가 된다. 무당의 손녀로 태어나 돌팔매질을 당하며 천대받던 송화는 사람답게 살라는 할머니의 바람 때문에 마지못해 하와이로 향한다. 꿈을 품고 당도한 낯선 땅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속임수(남편들 대부분이 나이와 형편을 속인 일종의 ‘사기 결혼’이었다)와 변함없는 가난과 고된 노동, 폭력, 인종차별 등의 불행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처음 품었던 희망이 망망대해 너머로 가뭇하게 사라지는 와중에도 삶까지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버들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냉랭하게 구는 남편의 마음을 끝내 자기 것으로 만들고,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난 남편을 기다리면서도 주변의 이민자 여성들과 함께 노동으로 단단한 생활의 뿌리를 내린다. 버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다소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홍주는 속이 시원할 만큼 여러 금기를 깨뜨리며 삶을 갱신해나간다. 그는 평생 수절을 당연하게 여겼던 청상과부였지만 자유를 찾아 기꺼이 하와이로 왔고, 남편이 조선에 처자식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첩’이 되기를 거부하고 남편과 아들을 조선으로 보내고 홀로 하와이에 남는다. 세 여성 중 가장 먼저 한복을 벗어 던진 사람도, 자전거와 자동차 운전을 배운 사람도, 사랑에 늦은 나이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람도 홍주다. 제 뜻과 상관없이 하와이로 떠밀려 온 송화는 노인에 가까운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무병에 시달리는 등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시 버들과 홍주의 보살핌을 받아 가며 낯선 땅에서의 삶을 기어이 이어나간다. 이렇듯 소설이 가장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이다. 그 시절 하와이는 독립운동에 관한 서로 다른 정치 이념 탓에 갈등과 분열이 일어나지만, 이승만파와 박용만파, 윗동네와 아랫동네로 갈라진 싸움 속에서도 이들의 우정은 잠시 흔들릴 뿐 결국 분열을 초월한다. 정치적인 갈등보다 생계와 육아, 교육, 일상 공동체로서 이들의 연대가 훨씬 힘이 세다. 사진 신부가 되어 하와이행 배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몰락한 양반가의 딸 버들과 돈으로 양반이 된 부잣집 딸 홍주, 무당의 손녀 송화는 신분 질서와 경제적 계급의 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사진 속 세 개의 점으로 붙박인 세 여성은 하와이라는 척박한 곳에서 각자 때로는 같이 인생의 파도를 넘고 넘으면서 쉽게 끊어낼 수 없는 세 개의 선으로 이어졌다. 소설 말미에 홍주가 중얼거리듯 말한다. “우리 인생도 파도타기 아이가.” 인생의 파도가 닥쳐올 때마다 기꺼이 타고 넘어선 것은 어쨌든 그들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일으킨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섰을 것이다. 소설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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