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Book]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링 마 지음, 양미래 옮김 l 황금가지(2021) 2021년도 끝나간다. 이 팬데믹 상황이 시작된 지도 2년이 가까워진다. 이 감염병이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의 일상이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매일 외출 시 마스크를 쓰고, 어디 가든 큐아르(QR) 체크인을 한다. 일상이라는 말에는 반복되는 보통의 습관이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질병은 과거의 습관을 깨뜨렸다. 그리고 무너진 자리에는 더욱더 단조로운 반복이 들어선다. 링 마의 <단절>의 처음 몇 장을 읽고 나서 이 소설이 쓰인 시점을 확인해보았다. 이 책은 코로나19 확산 이전인 2018년에 출간되었지만, 현재의 공포를 명확하게 포착한다. <단절>에서는 인류를 좀비로 만드는 질병이 퍼진 이후의 세계와 그 직전 미국 이민자인 한 여성이 사회에서 분투하는 과정이 교차하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종말은 깨닫기 전에 이미 와 있었다. 많은 종말 소설이 말하듯이, 질병은 원인만이 아니라 징후이다. 캔디스 첸은 1980년대 생, 밀레니얼 세대로 뉴욕에 있는 출판 제작 대행사에 근무한다. 성경 부서 선임 코디네이터인 캔디스는 고급 성경을 제작하기 위해 임금이 싼 아시아 국가에 외주를 의뢰한다. 캔디스의 삶은 미국과 중국 두 문화에 걸쳐 있지만, 두 정체성은 양립이라 하기 어려운 형태의 공존이다. <단절>의 종말은 선 열병이라는 가상의 질병으로 가시화된다. 곰팡이 포자를 통해 공기 중으로 감염되는 선 열병은 중국 선전에서 처음 보고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최종 증상은 의식 상실이며 감염자들은 평소에 하던 행동들을 무한 반복한다. 옷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은 그대로 선 채로 계속 옷을 개서 놓는 일을 반복한다. 택시 기사는 차를 몰고 빈 도시를 돌고 돈다. 캔디스는 업무가 없어도 계약 만료일까지 사람 없는 사무실로 출근한다. 병에 걸리지 않았대도 자본주의는 생존을 위해 반복을 요구한다. 배경은 2011년, 월가 점거 시위가 있었던 해이다. 뉴욕을 빠져나온 후, 생존자 무리에 끼어 일리노이 주의 “시설”로 향하는 캔디스는 세계의 폐허를 목격한다. 열병에 걸린 사람들을 죽이고 상점을 약탈하면서 생존을 이어가는 이 무리는 어느덧 종교적 교리에 가까운 억압을 구성원들에게 가하기 시작한다. 캔디스는 자발적이지 않은 습관은 죽음이나 다름없다는 현실을 직시한다. 무리 속에 끼어 강요당하는 삶에는 자의식이 없다. 캔디스는 자신과 또 다른 생명의 안전을 위해 위험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규칙적인 일상, 즉 루틴은 삶을 지켜주는 안전책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습관에 과한 의미를 부여한다. 개개의 조직원이 예측할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사회가 굴러가기 때문이다. 제목인 단절(severance)은 예상할 수 있는 안전한 일상에서 끊어져 나오는 과정을 의미한다. 분명히 여기에는 위기와 파국이 있다. 그러나 습관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 종말의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작가인 링 마는 직장을 잃고 퇴직 수당(severance pay)을 받으면서 소설의 작업을 계속했다고 한다. 캔디스는 퇴직금을 받고서야 폐허인 뉴욕을 떠날 결심을 했다. 팬데믹 이후의 세계는 이제까지의 습관과는 단절된 삶일 것이다. 우리는 과거의 루틴에서 끊겨 나갔지만 그렇기에 매일을 새롭게 건설할 수 있다. 작가, 번역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